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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山上)과 산하(山下) (출 34:29-35, 고후 3:12-18,눅 9:2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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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아줌마 전성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아줌마”를 제목으로 한 노래가 나오더니 이제는 “아줌마”를 주제로 한 드라마도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대한민국에는 “남자”, “여자” 외에 “아줌마”라는 특수계층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어떤 목사님은 “아줌마 영성”을 주장했습니다. 아줌마 영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아줌마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조폭과 아줌마의 닮은 점”입니다. (1)조폭과 아줌마는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2)조폭과 아줌마 공히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3)문신을 하는데 조폭은 온 몸에, 아줌마는 눈썹에 영구 문신을 한다. (4)조폭도 아줌마도 자기 가족을 끔찍이 챙긴다. (5)조폭이나 아줌마나 무대뽀로 겁나는 것이 없다. (6)밤만 되면 무서워지는데 조폭은 밤에 무섭게 설치고 아줌마들은 밤이 되면 남편이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무서워진다. (7)조폭도 아줌마도 칼솜씨가 뛰어난다 등등이다.

    아줌마의 본성이 야성으로 들어날 때는 이와 같이 무서운 조폭의 수준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아줌마의 본성이 영성으로 활용되게 되면 엄청난 복음의 잠재적 존재로 유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아줌마의 영성적 본성이 드러나야 열심 있고 활기찬 교회가 될 수 있다고 그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아줌마의 본성이 영성으로 드러나려면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최초의 사마리아 전도인이 된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단지 여인들에게만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누구나 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2.  오늘은 예수님의 산상 변모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함께 그 옛날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에 관한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모세나 예수님이나 다같이 산에서의 변화를 통하여 놀라운 새 시대를 열어나가게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1) 먼저 모세의 산상과 산하의 사건을 따라가 보도록 하십시다.

  a.  모세가 처음 산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은 그가 40세에 애굽에서 도망 나와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의 목자생활을 하고난 후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였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모세를 부르시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고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전 혈기 방장하던 시절, 그가 막강한 힘을 가졌을 때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참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간 쌓아올린 모든 공든 탑을 완전히 포기해 버리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을 망명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제 모세의 나이 80이 되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손에든 목자의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게 된 그런 시점입니다. 애굽에서도 이미 모세에 대하여는 다들 잊어버렸습니다. 그에게 인간적으로 재기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은 이미 다 사라지고 난 후였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과거 40여 년 동안 오직 양떼들을 위하여서만 사용하던 그 막대기는 이제 능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막대기 앞에 천하제일의 바로도 무릎을 꿇었으며 장강대해 홍해도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막대기로 치니까 반석에서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막대기를 들고 모세는 400여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그 백성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향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b.  모세가 두 번째 산행을 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후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는 그 거룩한 하나님의 산에서 40일 40야를 금식한 후 하나님이 친수로 쓰신 십계명 돌 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 백성에게 요구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애굽의 모든 삶의 스타일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주변 국가들의 그것도 역시 따르지 말아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법도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여기에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록해 주신 그 법도를 이제 마음의 심비에 기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가 잠시 하나님을 만나노라고 그들을 떠난 사이에 삽시간에 우상숭배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였습니다. 그래서 돌 판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히브리서에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잠시라도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뗄 때 사탄은 재빨리 그 틈을 노립니다. 그때 우리는 사탄의 공격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앞서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c.  분노한 모세가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뜨린 것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출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다시 산행을 결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세를 산위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우리를 향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간들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는 이러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은 어떠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뒤를 안전거리를 확보한 채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와 같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끝내 모세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에만 집착했습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손가락이 지향하는 달을 보아야 하는데 끝내 그 손가락 끝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모순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채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사람들, 본질적인 것은 제쳐둔 채 지엽적인 것에 매달려서 그것을 확대시키고 재생산하여 오늘 여기서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께 돌아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주님께 돌아가면 우리 눈을 덮고 있는 수건이 벗어진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신 주님은 다시금 우리로 하여금 종의 멍에를 매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참 자유를 향유하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의 산상과 산하

  a.  오늘 신약 본문인 누가복음 9:은 저 산위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같이 빛이 났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세탁기술로도 할 수 없으리만큼 주님의 옷이 하얗게 빛이 났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인성에 가려졌던 영광스런 모습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아니 왜 예수님은 그 생애 climax에 이 놀라운 산행을 결심하셨습니까? 그것은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기도, 기도 하는데 기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기도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그 영광스럽고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주님처럼 오늘 우리도 변화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변화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선행이 우리를 변화시켜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 알량한 지식이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다줍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에게 변화를 가져다줍니까? 만남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과 만나면 병든 사람이 고침을 받습니다. 귀신이 쫓겨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습니다. 변화는 다른 곳으로 말미암지 않고 내가 주님을 만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과 만나는 장소, 주님과 만나는 시간 거기가 바로 오늘 나의 변화산입니다. 그리고 성도 여러분에게 바로 오늘 이 자리가 여러분의 변화산이 되어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b.  그런데 그 변화의 현장에 모세와 엘리야가 동참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주님과 더불어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옛날에 모세가 그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서 구원하였듯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그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산상 변화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어야 하고 그 십자가만을 바라봐야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옛날 엘리야가 구름타고 승천했듯이 우리 주님께서 그 백성에게 하늘나라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로 가시게 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본향은 여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전적인 비중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종말론적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 생애 마지막, 그리고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서 오늘을 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신을 들메고 허리를 동이고 음식을 먹었듯이 천국행을 준비하면서 여기서 사시기 바랍니다. 이미 출발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c.  제자들이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에 얼떨떨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까 모를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이는 내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베드로는 그 영광을 언제까지나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천막 셋을 짓겠다고 제의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 주신 것은, 복을 주신 것은 나만을 위해서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까지 힘써 천막을 쳤으면 이제 걷으시기 바랍니다. 연륜의 천막, 직분의 천막, 체험의 천막, 기득권의 천막, 지식, 물질의 천막을 걷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산상에서 놀라운 은혜를 받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으면 여러분을 기다리는 저 산 아래로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동 서부교회도 이제 집을 다 지었다고 여기 안주하려하지 말고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십시다.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십시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진정한 출애굽인줄 믿습니다. (김오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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