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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의 시로 찬양하라 (시 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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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기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일년 4계절이 뚜렷한 것은 우리의 삶에 여러 가지 기쁨을 줍니다. 봄이 되면 만물의 소생이 정신에 새로운 희망을 줍니다. 이때가 되면 한번쯤은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데 봄이라고 하는 기후가 도움을 줍니다. 울창한 여름은 생동감 있는 활력소를 제공하면서 창조적 건설에 강한 집념을 불러일으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가을이 되면 두 가지 마음이 생깁니다. 풍성한기쁨이 있는가 하면 약간의 외로운 느낌도 찾아오는데, 이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됩니다. 겨울이 되면 안식의 기쁨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더워서 온 나라 전체가 사우나 같은 열대 지방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언제나 꽁꽁 얼어붙어 일 년 내내 냉장고 같은 나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홍수라든가 물난리, 이런 것을 도무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얼음이 무엇인지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도 못하는 나라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살고 있는 땅의 성격과 기후에 따라서 사람들도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대륙성 기질이라고도 하고, 섬나라 기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추운 지방 사람들의 성격이 강성이 되는가 하면 열대지방 사람들은 풀어졌다는 말이 적합할 만한 성격이 형성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기후 조건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향에 장점과 단점이 아주 분명하게 있을 수 있는데, 장점이 더 많습니다. 장점은 풍성한 기후 조건에서 시적 감성이 풍부해 집니다.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을 보면 생명력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 가능하게 됩니다. 보기만 해도 시 한편을 쓸 만큼 생동감을 줍니다. 또, 조금만 있으면 가을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정서가 생길 텐데 그런 것을 보면 인생의 황혼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들은 우리 삶에 절대적으로 해가 되지 않고 도움을 주는 정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비발디의 음악 가운데 ‘사계(Four Season)’를 아주 좋아합니다. 체감으로 느낄 수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봄이 오는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음악이 시작됩니다. 샘물이 솟아 흐르는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 한 소리로 음악이 진행됩니다. 그러다가 제2곡 1악장으로 가면 여름이 시작되는데, 격렬한 폭풍이 불어오는 듯하고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하고 장엄한 천둥소리가 납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한 감정을 주는 곡으로 음악이 연결되다가 제3곡 가을이 되면 풍요를 누리는 농부가 마치 술에 만취가 된 듯 한 만족한 기분이 드는 느낌으로 음악이 전개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제4곡 겨울이 되면 심한 추위에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가 나고 마치 내가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듯한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격렬한 강추위의 바람을 일으키다가 봄이 다시 온다는 즐거움을 알리면서 음악이 끝이 납니다. 시와 음악에 있어서 우리나라 사람은 절대 음감이 아닌 사람일지라도 기후 조건 때문에 감성적으로 풍요함을 누리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부라고는 근처에 가보지 않았어도 음악은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 있어도 그 환경에 맞는 음악으로 고난을 이기는 민족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 민족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농사짓는 농부는 그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그 종류에 따라서 부르는 노래가 다 따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시와 음악으로 해결하는 문화를 가지고 살아왔고, 히브리 민족은 우리보다 조금 더 차원이 높은 시와 음악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삶을 시와 음악으로 해결하는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농부들이 논에 모를 심을 때, 김을 맬 때, 거두어 드릴 때, 타작할 때, 방아 찧을 때 부르는 노래가 모두 다 다릅니다. 바다에서 사는 어부들도 고기 잡으러 나갈 때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고, 잡아가지고 올 때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어서도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죽은 나를 대신해서 선소리꾼이 대신 슬프게 장송곡으로 들려주는 것이 우리나라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노래를 부르라고 합니다. 무슨 모임이든지 모였다 하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러서 끝까지 다 불러야 모임이 끝납니다. 우리나라가 아마 세계에서 노래방이라는 것이 제일 많이 있는 듯합니다. 어쨌든 구역 예배를 노래방에서 보는 교회는 대한민국 교회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것이 주제말씀이 되는데, 우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나 철학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언어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결정됩니다. 내가 말하는 언어나 내가 부르는 노래가 무슨 제목을 가지고 있느냐?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변하기 힘듭니다. 제 목회 경험으로 절대 변하지 않고 노래를 끝까지 부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무엇인가? 내가 쓰는 믿음의 시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신앙생활도 행복하고 또한 불행할 때도 있습니다. 항상 원망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고, 항상 찬양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변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변해도 행복하게 살 텐데도 변하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내가 쓰는 믿음의 시는 어떤 것인가? 내 언어의 노래는 무엇인가? 내 언어의 노래가 바로 그 사람이 됩니다. 성경 전체는 믿음의 신앙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누가, 언제,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불렀느냐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창세기에서부터 믿음의 시는 요한계시록까지 계속됩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성경이 이렇게 감상적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케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케 하시며 궁창에는 새가 날고 바다에는 고기가 살게 하시며 땅에는 기는 짐승이 가득하매 생육과 번성을 주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잠언을 보십시오. 지혜의 시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욥기에는 고난의 시가 있어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애가서에는 슬픔의 시가 있으며, 아가서에는 사랑의 시가 있고, 출애굽기에는 방랑의 시, 전도서에는 허무의 시, 계시록에는 예언의 시가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지혜의 시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편을 보실 때 잘 모르시는 말이 계속 제목처럼 머리글자로 보실 것입니다. “쉬르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순례자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시는 순례자의 노래다.” “마스길” 교육적 교훈시, “믹담” 황금의 시, “힉가욘” 송영시, “마할랏” 병중에 부르는 노래 다 다릅니다. 교훈의 시를 보시면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회개의 시, 시편 51편을 보면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103편을 보면 감사의 시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애통의 시로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떠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는 버리지 마소서.”, 찬양의 시로 “찬양하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히브리 민족이 얼마나 시적으로 잘 표현했는가 하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홍해 사건을 봅시다. 애굽 군대에 죽느냐 사느냐, 바닷물에 들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박한 인생의 막다른 지점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한편의 시를 씁니다. 그래서 그 노래가 지금 성경에 그대로 있지 않습니까? 어떤 고통의 갈림길에서도 구원의 시를 써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과 관계성에서 해석하면서 그 내용을 시로 엮어서 고난을 이기는 지혜스러운 백성,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여러분이 서편제라는 영화를 보신 기억이 있으실 것입니다. 자기 딸에게 아버지가 영혼의 소리를 내야 된다고 그렇게 노래해서는 안 된다고 약을 먹여서 시각장애인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습니까? “세상을 보지 말고 너는 노래만 해!” 그래서 그런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 영화 아니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 오니까 주의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 행하는 자가 누구오니까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리로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우리 인생을 바라보면서 한편의 시로 모든 고난을 해결합니다. 하다못해 죄를 짓고 나서도 시를 씁니다. 원수가 쫓아오는데 빨리 도망갈 생각을 안 하고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한편의 시를 써서 마음을 달랩니다. “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주는 나의 생명의 힘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 하리요 군대가 진을 치고 에워쌀지라도 두렵지 않으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고 할지라도 나는 그 속에서 안연하리로다.” 억울할 때도 그 억울함을 표현하는 시를 썼고, 한나는 아기를 낳고서도 시를 씁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연애편지를 쓰시는데 문장이 모자라시는 분은 아가서를 읽어보십시오. 노인들도 읽어보면 가슴이 설레게 할 만큼 감미로운 애정시가 가득합니다. 예수님도 시적인 표현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가 하도 어려워서 고민을 할 때 한편의 시를 들려줍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아라! 수고도 안 하고 길쌈도 안 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갈 곳이 없는 예수님의 발걸음을 보면서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었을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고난을 시로 표현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애국시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비애의 시입니다. 바벨론 군대들에게 예루살렘 시인 하나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한 군대들의 힘의 지배를 받으며 사막에서 수로공사에 동원된 막노동하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짓밟힌 인권, 굶주리는 육체, 소망 없는 현실, 꺼져가는 정신력! 그런데 그 고통의 현자도 어느 날 밤 한편의 시를 써서 남겼습니다.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 나의 탄식 소리를 인하여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나는 광야의 당아새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적막한 밤에 단조롭고 음침한 기분을 주는 고독과 우울증의 시를 이렇게 써서 그 시가 오늘 우리들의 가슴을 울립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시를 쓸 수 있는 지혜! 모든 고난을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해석하면서 고난스러울 땐 고난의 시로, 즐거울 땐 찬양의 시로 성경의 전체는 시집으로 이 한편의 시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언어의 시 한 구절을 잘 가지면 평생 그 시를 읽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다 살고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후로 남은 일이 하나가 있는데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저 앞에 있는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끊임없이 순례자의 길을 달려가노라. 이게 내 인생이다.” 그가 부르는 시를 통해, 항상 말하는 그의 입의 언어를 통해 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조선 500년 한편의 시가 있기 때문에 국민정신에 놀라운 영향을 끼쳐주었습니다. 암흑과 같은 500년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시 한 구절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 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마음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것이 500년의 어두운 역사를 헤치고 빛이 난 한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정몽주 선생의 묘소가 바로 태재고개 넘어가면 있습니다.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온 국민이 울분에 차서 견딜 수 없었을 때 한 시인이 한 줄의 시를 써서 지금까지 우리 가슴을 울리고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나이다.” 님의 침묵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민족 슬픔을 위로받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저는 윤동주 생가에 가서 이 시를 읊으면서 얼마나 많이 가슴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다 부르는 국민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아리랑”입니다. 아리랑, 신 아리랑, 밀양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진도 아리랑, 경기 아리랑 다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의 역사에 대해서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풀이입니다. 유력한 전설로 고려 말년에 한 충신이 무너지는 고려를 슬퍼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하는데 강원도 정선 마을 산 고개를 넘을 때 너무 슬퍼서 그 고개를 넘어갈 수가 없는데 그 자리에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나를 넘겨주오.” 눈물로 그 고개를 넘어가서 남긴 한 편의 시가 우리 민족 전체 국민 정서에 자리 잡은 시로, 수백 년 우리 민족의 한을 달래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여보시요! 당신은 항상 부르는 노래가 그 곡조요? 당신이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돼! 아직도 당신 언어에는 그런 말 밖에 못해! 좀 다른 노래를 불러봐!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시를 써봐!” 신라시대에 너무나 가난해 옷 한 벌을 백번이나 기워 입는다 해서 ‘백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다 아실 것입니다. 이 분은 낡고 낡은 거문고 하나로 시를 읊으면서 살았습니다. 설날이 되었는데 집집마다 떡방아를 찧는데 이쪽 집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면서 음식을 장만하고 “쿵더쿵 쿵더쿵” 전부 떡방아를 찧는데 자기 집만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인이 너무 슬퍼서 “우리는 왜 이렇게 가난해서 즐거운 시간이 다가오는데 떡방아를 찧지 못하고 슬프게 있어야 되나?” 너무 슬퍼서 눈물을 뚝뚝 흘리니까 남편된 백결 선생이 “내가 제일 아름다운 떡방아를 찧을 테니 들어보시오.” 그 낡은 거문고를 부인 앞에 탁 놓더니 그 자리에서 작사,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는 겁니다. “쿵 쿵 쿵덕쿵 쿵덕쿵! 이게 얼마나 좋은 떡방아 소리요?” 이 음악이 방아타령이 되었고 경복궁 타령으로 발전했습니다. 만약 백결 선생이 떡만 많이 해먹고 죽었다면 누가 그를 기억하겠습니까? 그런 분들이 당대에는 어렵게 살았지만 우리에게 끼친 정신문화는 큰 것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유난히도 고난이 많은 백성으로 성경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필요한 하나님을 생각하며 시를 써서 그 고난을 이겼습니다. 보통 시를 쓰는 사람들은 마음도 물질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이 고독하고 비어있을 때 영생의 샘이 흐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민족은 자신들의 삶의 과정에서 생기는 기쁨과 슬픔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모두 해석했으며 그 마음을 시로 적어 남겨진 위대한 유산이 오늘의 성경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찬란했던 문명은 그 당대 사람들에게는 편리를 제공했지만 후대 사람들에게는 쓰레기를 남겨 주었습니다. 여러분, 세계 여행 많이 다니셨을 것입니다. 무엇을 보러 가셨습니까? 쓰레기 보러 가는 겁니다. 다 헐어진 옛날 문명의 어떤 현장을 보고 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지만 정신문화가 따라가지 못하면 그것은 다 쓰레기입니다. 무너진 원형극장, 사치 문화의 옛 터전, 폐허가 되어서 어떻게 처리 곤란한 쓰레기더미를 문명의 문화라고 구경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오늘 말씀의 “지혜의 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예수 믿으면서 좀 지혜 있게 생각하고 내 언어가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가? 한편의 믿음의 시를 가지고 고난을 이기는, 이것을 영적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가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믿음의 시 한편만 잘 간직하고 있으면 그것이 나의 일생에 힘이 되는 영적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 소유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여! 그대는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임을 알라.
사랑이 부족하다고 외로움을 말하는 자들이여!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버렸노라.
할일이 없다고 한탄하는 자들이여! 가장 귀한 일 예배를 잊었는가?
기쁨이 없어 우울한 자여! 당신은 손닿는 곳의 그 성경은 언제 보려는가?
눈을 떴는가? 천지 만물을 보는 기쁨이 어떤가? 입을 열었는가? 말하는 행복이 즐겁지 아니한가? 잠을 깨웠는가? 기다리는 일터가 고맙지 아니한가?
만날 수 있는 이웃이 있는가? 그것은 그대의 삶의 샘터요.
따뜻한 식탁이 준비되었는가? 생명을 지켜주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예배드릴 교회가 있는가? 당신의 영원을 약속하는 안식처요.
지금 건강한가? 당신은 원망할 자격이 없소. 죽을병에서 주님을 보는가? 당신은 영생이 약속되어 있소.
베풀며 살아갈 수 있는가? 당신은 부유한 자요.
구제를 받았는가? 좋은 이웃의 소유자요.
봉사할 직책이 있는가? 당신 없으면 세상이 안 돼!
날마다 돌아갈 가정이 있는가? 하늘나라 그림자의 소유자요.
가족이 존재하는가? 당신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이요.
뭐가 부족해서 얼마나 더 많이 주어야 하는가? 내 언어는 무엇인가?
이렇게 풍성한 하나님의 영적 은혜 가운데 있으면서 내가 무엇을 불평하며 살고 있는가? 내 영혼의 사도적 관찰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는가?”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울어라! 그리고 사람을 향해 웃어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영혼에 믿음의 시를 살려내셔서 시편적인 삶을 사십시오. 이 많은 분량의 시편은 내 인생이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필요한 믿음의 시를 우리들에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가 무엇인가? 내가 항상 말하는 나의 언어의 지혜의 시는 어떤 제목인가?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시를 가지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여! 오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저희들이 영적으로 잘 살피면서 내 언어의 시는 무엇인가? 내 입으로 어떠한 말을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는가? 내가 부르다 죽을 노래 제목이 무엇인가? 바울 선생과 같이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언어의 시를 발표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지혜 있고 능력 있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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