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 '나'가 문젭니다(2): 뉘우치는 요나 (욘 1:17 - 욘 2:10)..

  • 잡초 잡초
  • 311
  • 0

첨부 1


<주님 뜻보다 내 뜻이 앞설 때>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 목사님이 미국 동부
테네시 주의 작은 동네 교회에 부임했습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마을에 원자 에너지를
개발하는 공장이 들어서자 엄청난 붐이 일어났습니다.
마치 일산이나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설 때 전국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 듯이,
그 작은 동네에도 미국 각처에서 온 외지 사람들로 북적대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이 담임한 교회는 역사가 112년이나 된 유서 깊은 교회로서
예배당이 참 아름답기는 했지만 매우 작고 비좁았습니다.

이제 이 작은 동네에 타지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게 되자
목사님은 교회를 좀 증축도 하고 해서 그들을 교회로
다 끌어들이는 전도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평신도 지도자들의 반대가 여간 거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잠시 여기 있다가 경기가 죽으면 다시 떠날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오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니 우리끼리만 잘 해보겠다는 뜻이었지요.
크게 낙담한 목사님은 그러면 이 안건을 다음 주에
교인 총회에 붙여서 투표로 결정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투표할 때 평신도 지도자들은 목사님이 아직 이 교회에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애송이 목사이기 때문에 투표권도 줄 수 없다며,
자기들끼리 표대결을 해서 목사님의 제안을 부결시켜 버렸습니다.

결국 목사님은 그 교회를 떠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사모님과 함께 그 교회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 마을이 너무 변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도 있듯이, 그 동네는 예전의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물어 물어 옛날 교회자리를 찾았는데, 맙소사 그 아름답고 고즈넉한
옛날 예배당의 모습은 그대로인데 바비큐 식당으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주차장에는 온갖 종류의 자동차, 오토바이, 트럭 등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르간과 의자들은 한 구석으로 밀쳐져 있었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바비큐 음식을 먹느라고 소란스러웠습니다.
넋을 잃은 목사님이 사모님께 한 마디 했습니다.
"여기가 여전히 교회가 아닌 것이 참 다행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 곳에 올 수 없었을 것 아니오."
(It's a good thing this is not still a church, otherwise these people couldn't be in here.)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실화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보다는
우리 생각을 더 앞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이 장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인가를 따지기보다는
내 이기심과 내 명예와 내 고집을 더 앞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미국 한인 교회에 부흥회 인도 차 갔는데 예배당
건물 앞에 어울리지 않는 게시판이 하나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어울리지 않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에
치우는 것이 제일 좋다고 생각할 게시판이었습니다.
이 게시판을 왜 치우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담임목사님 왈,
창립 멤버가 되는 아무개 권사님이 이 게시판을 세웠는데
자기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못 치운다고
하도 고집을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강사님이 한마디했습니다.
"목사님, 지금부터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 권사님 눈에 빨리 흙 들어가게 해 달라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고집을 앞세운 적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먼저 구하기보다 내 이기심과 체면을 앞세운 적도 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때가 참 어리석고 불신앙적이었다는 후회가 들지 않습니까?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요나는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 앗수르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폭삭 망해도 시원찮을 판에 그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구원받을 메시지를 전하라니요!
요즈음 젊은이들의 코미디 프로에서 하는 말처럼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요나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는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무작정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보다는 자기의 알량한
신학, 편견, 자존심, 고집을 더 앞세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요나를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탄 배에 엄청난 풍랑이 일게 하셔서 요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게 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리해서 요나는 고요한 바다에 풍랑이
일게 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서는 바다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다에 내던져졌으나 물고기를 예비하신 하나님>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은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편안히 항해하던 배에 요나 때문에 풍랑이 일었습니다.
용케도 제비뽑기를 해서 요나가 딱 걸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나가 자기 잘못을 시인했다는 사실입니다.
1: 12절을 보세요.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여러분,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하여 요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 필수적입니다!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고 요 '나'가 욕심 사납고 고집 세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배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잠잠하고 평안하던 바다가
갑자기 노한 풍랑이 일어난 까닭이 자연 때문도, 선장 때문도, 그 어떤 뱃사람
때문도 아니고 바로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문제의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깨달음만 있으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됩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요 '나'에게 모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바다 속에 뛰어드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배가 안전해졌고 뱃사람들도 살았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자기 과오를 깨닫고 인정하니 모든 풍파가 일시에 그쳤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에 보면 요나가 자기 책임을 통감하고 바다 속에
뛰어드니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 한 마리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큰 물고기가 도대체 어떤 물고기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고래나 큰 상어를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요나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고전 10: 13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옳습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나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되 버리시지 않습니다!
요나를 바다 속에 내던지신 하나님은 또한 물고기도 예비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밤낮으로 삼일 동안을 있게 됩니다.
물고기 뱃속은 무덤처럼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곳입니다.
사방이 막혀 있어서 인간적인 기대와 소망이 끊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바로 이 물고기 뱃속에서 거듭납니다. 
이 모든 고난이 자신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한 징벌임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합니다.

욘 2: 2-9절에 나타난 요나의 회개 기도 내용은 이렇습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 스올 즉 음부(陰府)와 같이 사방이 막히고
인간의 기대와 소망이 완전히 끊어진 곳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칩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그동안의 자기 삶이 삐뚤어진 삶이었음을 인정하고 회개합니다.
바다 속 깊은 곳에 내던져져 큰 물결이 자기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머리를 휘감을 정도로, 저 바닥에까지 내동댕이쳐진 것이
다 요 '나'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루어졌음을 인정합니다.

이제 요나의 기도는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의 눈앞에서 쫓겨났어도 반드시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고 결단합니다.
4절을 보세요.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아, 얼마나 좋은 말인지요!
지금 이렇게 저 밑바닥에까지, 무덤 속과 같이 사방이 막히고 절망스러운,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 들어와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겠다는 결심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힘들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해도
다시 내리 성전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고난 한 가운데에 혈육이나 세상을
의지하면 멸망하지만 다시 주님 계신 성전을 바라보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힘든 일을 만날 때마다 주님 계신 성전을 다시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저 절망의 밑바닥에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 구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세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바다 속에 내던져서 죽은 자들이나 들어가는 구덩이
속에 빠졌지만 하나님께서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우리를 외면할지라도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버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풍덩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해두셨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일을 당하여 고난과 위기의 바다 속에 던져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냥 바다 속에 죽게 하지 않으시고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겠다고 결단합니다.
8-9절을 보세요.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기 보세요.
요나는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저버리며 헛된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달리 살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먼저 요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과 마지못해서 억지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감사가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지키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은 비록 내게 손해가 오고 내 자신이 고달파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꺼이 신실한 마음으로 지키고야 말겠다는 결단이지요! 
그러면서 요나는 맨 크뜨머리에서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고백이지요!
바다 속에 던져져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자기가 살길은 오직 주님 한 분께 있다는 것이지요.

옳습니다.
사람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 앞에서
서게 될 때 그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변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참된 구원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자, 지금까지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우리의 요 '나'가 어리석고 고집 사나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요 '나' 때문에 풍랑이 불어닥치고 주변 사람들이 다 힘들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빨리 깨닫고 요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 '나'가 책임지려는 자세를 가지고 고난의 바다에 풍덩 뛰어들 때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놔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살릴, 물고기를 예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변화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요나는 어두컴컴하고 사방이 꽉 막혀, 그 어느 곳에서도 출구를 발견할 수 없는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에서 부서지고 깨어지는 회개의 기도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요나가 고난과 위기의 바다에 빠져들었지만 하나님은 물고기 뱃속을 예비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징계의 바다에 뛰어들면
하나님은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살길을 열어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물고기 뱃속 한 가운데에서, 아무도 의지할 곳 없고 칠흑같은
어둠과 사방이 꽉 막힌 이 물고기 뱃속에서 진실한 회개와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요나의 요 '나'는 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회개하는 가운데 깨졌습니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변화되었습니다.
지난 날 자기 고집대로 막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순종하며 살겠다고 매서운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나'가 옛사람을 청산하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물고기 뱃속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무덤 같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오직 주님의 빛만을 바라며,
사방이 꽉 막혀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을 때 주님만 바라보며
가장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죄과를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새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결론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물고기 뱃속에서 온전한 회개가 일어나니 마침내
그 뱃속에서 나오는 날이 왔다는 것이지요!
그 지긋지긋한 노아의 홍수가 끝나는 날이 마침내 왔던 것처럼
요나의 물고기 뱃속 시련도 드디어 끝나는 날이 왔습니다.
요나의 요 '나'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서지고 새사람 되니
물고기 뱃속 시련도 끝이 나고 육지로 토해내는 날이 왔던 것이지요!

여러분,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새사람 되어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준비되면 물고기 뱃속 시련은 반드시 끝날 날이 옵니다.
욥 23: 10절은 말씀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餘地를 만들어보자>
안자가훈(顔子家訓)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밟는 폭은 겨우 몇 치에 불과한데
왜 한 자가 넘는 언덕길에서 굴러 넘어지며,
한 아람이나 되는 통나무 다리에서 자칫하면 강물로 떨어지는가?
좁은 언덕길, 좁은 다리에 여지(餘地)가 없기 때문이다.
진실이 사무친 말도 남이 믿어 주지 않고, 천지에 부끄럽지
않은 주장도 남의 수긍을 얻지 못할 때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내 언행, 내 사람됨에 여지가 부족한 까닭이다.
나를 비방하는 이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점을 반성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여지가 필요합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내가 하는 일은 다 좋고 옳은 일이다, 그 빡빡함이 문젭니다.
요나에게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헤아릴 여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바다 속 물고기 뱃속 안에 들어가 부서지고 깨지고 나서야
자기 뜻이나 자기 고집이나 자기 편견이나 자기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스라엘 민족의 원수인 니느웨를 생각할 여지가 생겼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여지를 여러분도 가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