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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도다 (요일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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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요일 4 : 7 - 11
제 목 :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오늘날 이 시대의 특징을 말해보라고 하면, 뭐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들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둡다”라는 것이지요.  어둡다.  왜 어둡습니까?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사탄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엡 6 : 12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영들, 곧 사단이 공중권세를 잡고 지배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이처럼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시므로 광명이 비취어 졌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머물므로, 세상에 빛을 전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사 60 : 1절 이하에서 말씀하지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따라 합시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어나라는 겁니다.  그리고 빛을 발하라는 거지요.  어디로 빛을 발합니까?  어둠에 쌓여 있는 이 세상을 향해..  이것이 오늘 우리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오늘 날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바라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빛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은 분명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는데, 이 빛이 세상에 비취질 못하고, 세상에 영향력을 발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어둠에 삼킴 바 되어지는, 어둠의 세상에 영향을 받는, 역 현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빛을 잃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이 땅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여전히 어둠의 권세 아래, 지배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줄로 압니다. 

오늘 이 시대가, 우리의 주변이 이처럼 어둡고, 아픔과 고통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어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진리를 놓쳐버렸고, 또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독교를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여러분은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것을 우리가 연상할 수 있겠으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기독교의 가장 핵심 되는 진리는, 사랑이다. 

오늘 본문 7절과 8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할렐루야!!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 이 사랑,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요, 핵심인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핵심 진리인, 사랑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성경 지식은 있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재물은 얻었는데,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능력은 받았는데, 사랑은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너무 축복된 삶, 성령 충만한 삶에 집착하고, 치우치다보니, 완전히 극과 극이예요.  정작 중요한 진리인 사랑을, 우리는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재물이 많으면 무엇 합니까?  나눔이 없고, 섬김이 없는데... 
성령 충만하고 능력 받으면 무엇 합니까?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고, 연합하는, 합력해서 선을 아름다운 모습이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성도들이 사랑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주님이 말씀하고 있는  순수한 사랑이 아닌,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변질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사랑은 진정한 기독교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어둠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도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사랑이 빠지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책 속에도 보면, 온통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유행가 가사에도 보면 그렇지요?  온통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노랫말이 어딨습니까?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하면 안 되나요” 뿐만 아니라, 영화와 연극, 모든 예술 속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분명 이 세상도 사랑을 말하고 있고,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의 사랑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 자체가 병들어 있고, 그 개념도 잘못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보세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느니,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한다느니, 사랑하기 때문에 이별한다느니, 사랑하기  때문에 죽는다느니, 또는 죽인다느니, 분명 사랑을 논하지만, 그 사랑은 성경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행복한 감정입니다.  사랑은 기쁜 감정입니다.  아멘!! 
그래서 사랑하면 사람이 행복해지고, 사랑하면 그 마음이 기쁘게 되는 것이예요.  그러나 세상은 사랑을 말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그 사랑으로 모두가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가 불행해지고, 슬픔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사랑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가 속고, 또 속이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너무나도 잘못되어진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잘못되어진 세속의 사랑을 점점 닮아가고 답습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속의 사랑을,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이런 세상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른 사랑을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사랑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롬 13 : 12절에 보세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빛의 갑옷을 입자. 

이제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잘못된 세속의 사랑의 개념은 벗어 버리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빛의 갑옷,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갑옷을 입고, 세상의  어두움과 맞서 싸워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함으로, 새롭게 광명이 찾아오게 하고, 이 땅의 사람들이 다시금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만들어 나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7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라고  했는데,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첫째는, 서로 믿으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서로 간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결코 사랑을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이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했을 때에,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할렐루야!!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를 끝까지 믿어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며, 무슨 행동을 하든지, 다 믿어 주시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 신앙생활 중에 실수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주님 앞에  중대한 잘못을  범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음을 믿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가 언제입니까?  지금 주님은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실 때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고난의 십자가를 지셔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줄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수제자인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며, 다른 제자들도, 결국에는  다 뿔뿔이 흩어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참으로 서글픈 일 아닙니까? 
가룟유다야, 원래 버림받을 운명이라서 주님이 상관하지 않으셨지만, 나머지 열 한 제자에 대해서는, 주님이 얼마나 그들을 아끼셨습니까? 
3년 동안 공들여 훈련시킨 제자들인데, 그러한 그들이 앞으로 저지를 일들을  생각하면, 속에서 분노가 솟구치고, 치를 떨어야 할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님의 예견대로,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으로는 늘 주님을 사랑한다 말했지만, 그 마음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습니까?  그런 베드로를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여전히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금 베드로를 찾아가지 않습니까?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무슨 뜻입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믿느냐?  라고 하는 뜻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끝까지 나를 믿지 못해서,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떠나갔지만, 지금은 네가 나를 확실하게 믿느냐?  라고 하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뭐하고 대답을 합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또한, 이제는 내가 주님을 믿는 줄, 주님 아실 줄로 압니다.  라고 하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이 만남 이후의 베드로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죽기까지 순교하는 모습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어떤 위협과 환난이 다가와도, 이제는 주님을 향한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고, 진정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를 향한 신뢰, 서로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 서로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이것이 전제 되어질 때,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으로 인정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보세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베드로는 주님을, 십자가라고 하는 죽음의 자리로 내 몰았지만, 주님은 여전히 베드로를 찾아 오셨고, 베드로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나누는 사랑은 어떻습니까?  특별히 대인관계 속에서, 이런  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상대방을 신뢰하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이런 사랑이 없어서, 서로 간의 관계가 깨어지는 경우들을 얼마나 많이 봅니까?  가정이 깨어집니다. 부부간에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서로를 믿지를 못해서, 결국 불화하고 갈라서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나라 이혼 률이 세계 1위라고 하잖아요?  전체 부부의 1/3이 이혼했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서로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서로를 신뢰하지 못해 결국  관계가 깨어지고, 등을 돌린 경우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퀴리 부인을 아시지요?  퀴리 부인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 때까지,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며 자랐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단 한번도 엄마의 키스를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학교에 갈 때와, 학교에서 돌아올 때, 다른 엄마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숱하게 키스하면서 인사를 하는 데, 왜 우리 엄마는, 나에게 한번도 키스를 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런 마음에 고민하며 슬퍼했지만, 결국 엄마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마음에 결론을 내리고서는,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은 채, 다른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자랐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도 엄마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사랑의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엄마가 딸에게 키스해주지 않은 것은, 그 딸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퀴리 부인의 엄마는, 일생 동안 결핵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딸에게 키스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엄마가 왜 자신에게 키스를 하지 않았는지를, 엄마가 결핵으로 죽은 다음에서야, 그녀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키스해 주지 않는다고 하는 단편적인 사건만을 두고 그 사랑을 의심하면서, 끝내 자신도 엄마에게 사랑을 베풀지 아니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뒤늦게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눈으로 사랑을 그리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여러분 아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눈에 보이는 자로 측정하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여러분, 부부간에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 간에도, 서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뢰함으로 끝까지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가 보기에도 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가 아닙니까?  좀 부족해도, 좀 흠이 있어도,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주님을 향한 신앙을 믿으며, “저 사람, 저거 완전 사탄이야, 사탄”  이렇게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베드로가 주님의 용서함으로 다시 변화되어졌듯이, 그 사람도 나의 이해와 용서로 결국 이렇게 변화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용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서로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서로 배려하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배려가 무엇입니까?  배려는 상대의 마음을 세밀하게 살피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해심이지요.  서로에 대한 이해심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주님이 무엇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까?  화목제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주님이 화목제가 되어 주셔서 하나님과 하나 되게 만드셨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이 우리를 이해하시고, 배려해 주셔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화목제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야, 이 죄악 된 세상에 살면서 너희가 어찌 죄를 안 지을 수 있겠냐?  더군다나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없이 살았는데, 어찌 세상의 죄를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겠느냐? 
내가 이해한다.  내가 하나님께 너희들을 용서해 달라고 말씀드릴 테니까, 이제부터는 나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화목제인 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해 주시는 마음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 가운데 누가 이 자리에 앉아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벌써 지옥 불에 떨어졌을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화목제로 죽으셨기에,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믿음으로,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하는 줄 믿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오늘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에, 주님이 우리를 향해 나타낸 그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나타날 때, 비로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인 줄, 우리가 진정한 신앙인줄 알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내 기준에 다른 사람들을 자꾸 맞추려고만 합니다. 내가 곧 법이요, 진리요, 내가 곧 정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결코 남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입으로는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학 실험을 하는데, 벼룩을 한 마리 놓고 시험을 합니다.
첫 번째 실험은, 벼룩을 통에다 넣어 넣고 그냥 명령만 합니다.  “뛰어, 뛰어” 그 통 안에서 벼룩이 뜁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실험에 들어갔습니다.
통에 있던 벼룩을 꺼내, 다리를 다 떼어 냅니다.  그리고 다시 통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명령을 합니다.  “뛰어, 뛰어”  벼룩이 뛰겠습니까? 
못 뛰지요, 다리가 없는데 어찌 뛰겠습니까? 

그런데 이 실험자는 보고서에 이렇게 써 넣습니다.  “벼룩은 다리를 떼어 내면 귀가 먹음”  다리가 없어서 뛰지 못한 것인데, 이 멍청한 실험자는 벼룩이 귀가 먹어서 명령을 듣지 못해, 뛰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누가 판단한 것입니까?  실험자의 판단입니다.  오판이지요.
실상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 주관에 의해 판단을 한 것입니다. 

벼룩의 입장은 다리가 떨어져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뛸려고 해도 못 뛰는 마음에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이런 벼룩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한 채, 보고서에 귀가 먹어서 못 뛴다고 하니, 벼룩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간관계가 자꾸만 오해가 생기고, 자꾸만 틀어지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대방을 살피는 마음이 부족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볼 때 상대방이 좀 부족해도, 좀 마음에 맞지 않아도, 좀 잘못되어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넓은 가슴으로 포용하고  품어줄 줄 알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벧전 4 : 8절에 보세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할렐루야!!  할렐루야!!!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이런 배려의 마음을 다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조금만 살피면, 상대방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왜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지, 왜 그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면,  자연히 도움의 손길로서, 상대방에게 다가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살핌이 없고, 이런 배려의 마음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허점과 약점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허점과 약점 때문에 내가 힘들고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난하게 되는 거지요.  여기에 무슨 사랑이 있겠습니까?  사랑이 있다면 분명 형식적인 사랑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가짜입니다.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남부러울 데가 없을 것 같은 이 여자는 큰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녀에게 눈썹이 없다는 겁니다.  정말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약점을 감추기 위해, 항상 짙은 화장으로 눈썹을 그리고 다녔지만 마음은 늘 편치를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여자에게도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정말로 사랑했습니다. 남자도 여자에게 다정하고 따스하게 대해 주었고, 둘은 결국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눈썹 때문에 항상 불안해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도, 여자는 자기만의 비밀을 지키면서, 행여나 들키면 어쩌나, 그래서 자기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나, 따뜻하기 만한 남편의 눈길이 경멸의 눈초리로 바뀌는 건,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에게,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상승일로를 달리던 남편의 사업이, 일순간 망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둘은 길거리고 내몰리게 되고, 그래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연탄배달이었습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여자는 뒤에서 밀며 열심히 연탄 배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던 오후였습니다.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리어카의 연탄재가 날라 와서, 여자의 얼굴은 온통 검뎅이 투성이 되었습니다.  눈물이 나고 답답했지만, 여자는 닦아낼 수 없었습니다.  혹시나 자기의 비밀이 들킬까봐,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때 남편이 걸음을 멈추고 아내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눈썹부분만은 건드리지 않고 얼굴의 다른 부분을 모두 닦아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자는 깨달았지요.  남편이 자기의 약점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남편에 대한 감동의 눈물과, 사랑의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남편은 그 눈물까지 다 닦아준 후 다정하게 웃으면서,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서 사실, 한 참을 울었습니다.  그렇다고 소리 내서 엉엉 운 것은 아니고, 소리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 내렸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모두가 이런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분명 이 세상은 환하게 밝으리라.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는 이런 배려의 사랑을 나눔으로서, 우리 성천 교회를 환하게 만들고, 나아가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직장과  사업처, 그리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사랑의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세 번째는,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서로 섬기며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또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섬김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를 내어주신, 희생의 사랑입니다.
막 10 : 45절에 보세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믿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눅 14 : 26절에 보면,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당신이 우리를 섬기며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를 향해 주님과 같이 섬기며 사랑할 것을 원하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나 쉽지가 않지요?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을 위해 내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가운데  누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을 만큼, 희생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실현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까?  그 진의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내어 놓으며 우리를  섬겼듯이, 우리는 다른 이웃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섬기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남을 위해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항상 최선을 다해 섬기라는 겁니다.  이런 섬김의 모습을, 주님은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영국의 한 전쟁 영웅이 병들어 죽었을 때, 그의 집에서 나온 일기장이 큰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왕에게 받은 훈장을,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웃에게 성금으로 전달했다.  더 값진 것을 주고 싶었지만, 그것이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내가 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무슨 뜻입니까?  이 전쟁 영웅은,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과 재물을 어려운 이웃에게 다 베풀어 주고, 마지막 남은 훈장까지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가 신문에 나가자, 성금이 여기저기서 이어지기 시작하면서, 그야말로 홍수와 같이 밀려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섬김이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적은 것이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남을 돕고자 내가 최선을 다하는 그 섬김은,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생각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실천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구제를 많이 하는 선한 크리스챤에게 물었다.
“당신은 그렇게 남에게 많이 주면서, 어떻게 살아갑니까?”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너무나 풍족하게 베풀어 주시니, 제가 나누어주지 않고서는 압사 당할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멘!!  그 받은 은혜와 축복을 이웃들과 함께,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형제와 자매들과 함께 나누는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나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한 은혜와 축복을, 우리가 나누지 않고,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고, 그저 자기만을 위해 축적하고 쌓아 놓는다면,  우리는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난 욕심에 의해, 깔려 죽고 말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 성도들이 달리 죄지을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런 욕심이 죄인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함께 나눌 줄 아는 섬김의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상대방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며, 약점을 보완해 주며 드러내지 않고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가진 최선의 것, 최상의 것으로 말없이 베풀고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대로,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내가 먼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고, 내가 먼저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찾아가,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오해와  다툼으로 인해 멀어진 관계 속에 찾아가, 화해하고, 화평케 할 수 있다면,  힘들고 지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따뜻한 위로의 말로, 격려의 말로 세워 줄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가 어둠으로 가득 차 있고, 변질된 사랑으로 모두가 불행하게 살아갈지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주님 닮은 사랑을 가지고, 저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의 영역에서 사랑을 실천해 나간다면, 분명 이 세상은 변화되어지고, 분명 환하게 밝아지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세상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이런 귀한 사랑으로 아름다운 세상,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는 데 앞장 서는, 우리 성천 교회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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