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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화에로의 삶 (창 1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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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작품 중에 '거지 왕자'가 있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는 거지가 왕자로 오해되어 왕궁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가 거기서 한 일 중에 가장 괴이한 일이 바로 옥새를 어떻게 쓰는 것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옥새로 호두를 까먹고 식사 후에는 손 씻는 물을 마셔버립니다. 그러면 신하들은 왕이 하는 대로 해야했기 때문에 왕자를 그대로 따라 합니다. 그래도 그는 왕자인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어제까지만 해도 시궁창 속에서 자라난 한 소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할 줄 아는 것은 악한 말과 거치른 것과 무례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말투가 그렇고 내용이 그렇고, 삶의 목적이 그렇고, 방법이 그렇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거짓말이요, 소매치기요, 남을 괴롭히며 손해를 끼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임금이 그를 왕자로 삼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비밀입니다. 왕자로 왜 삼았는지는 일단 접어두시고 왕자로 삼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거지처럼 하고 다닐 때는 그를 괄시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자가 된 다음 어제까지 괄시하던 자들이 그를 계속해서 괄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동네 왕초가 전에 그를 괴롭혔다해도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왕자에게 손가락하나 까딱했다가는 그 왕자에게 터지는 정도가 아니라 왕으로부터 큰 곤욕을 당할 것입니다.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한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하늘과 땅처럼 바뀌었다 할찌라도 그의 수준도 같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성숙치 못해서 궁중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왕자이긴 하지만, 아직은 왕자답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 침대 아래에서 자는 것이 더 편합니다. 궁중에서 쓰는 말투보다는 거리에서 쓰는 말투가 훨씬 더 익숙합니다. 아무리 맛있는 반찬과 밥으로 식탁을 꾸몄다 할찌라도 그 식탁 앞에 앉아있는 것이 더 불편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시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신분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바뀌었다고 그 순간 나의 수준 마져 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히 왕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왕자답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제까지 살던 버릇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있다면 성도들 가운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거지왕자이야기처럼 바로 내 자신이 내가 왕자로 끝까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왕자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하들이 나에게 굽신거리고 환경이 모두 바뀌었어도 내 자신의 말투나 나 자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소원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자녀가 자녀답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났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성화에로의 삶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 우리 지난주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를 의로 여겼더라"는 성경에서 우리는 최초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엄청난 사건을 보았습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는 믿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새해부터 아브라함을 붙잡고 말씀을 묵상하지만,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가 하나님을 위해 한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브람은 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아내 마져도 버릴 수 있는 남자, 또 상황 앞에 얼마나 하나님과의 약속마져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결코 믿음의 조상이라는 그 고귀함을 발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셨고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은혜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고는 풀릴 수가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을 다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이 약속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지는 축복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보셨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4-5절에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7절에서는 땅의 축복도 약속하십니다.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반드시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 저를 그렇게 축복해 주신다구요? 그런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축복의 사인을 주세요. 징조를 보여주세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소와 염소와 양은 그 당시에 가장 귀한 재산이었습니다. 소를 이용해서 농사도 짓고, 또 그 고기를 먹기도 하고 우유도 마시고, 털로 의복도 만들고 그 가죽으로는 장막집도 만들었습니다. 재산의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도 3년 된 것을, 가장 중요한 요소, 재산을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께 먼저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삼 년 된 것입니까? 그 때가 가장 좋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내 인생의 프라임 타임이 언제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가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50대 초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바로 그 때거든요. 오늘 바로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프라임 타임입니다. 베스트 타임입니다. 즉 이 말씀은 '너의 재산 중에 가장 좋은 몫을 좋은 시기에 내게 바쳐라' 이 말입니다.

자! 아브라함은 10절에 그대로 순종하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지금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구별하여 드릴뿐만 아니라 제물을 쪼개어서 바칩니다. 여기'제물의 중간을 쪼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고대 언약의식을 보면 제물을 가져다가 중간을 쪼개서 양쪽에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맺기로 한, 두 사람이 함께 그 사이로 지나갑니다. 이런 의식을 행함으로써 "누구든지 언약을 파기하면 이 짐승처럼 쪼개져 죽을 것이다."라는 무언의 강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의 중간을 쪼갰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약속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젠 내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가는 헌신의 아름다움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에서도 협력하는 중국에 문둥병 환자를 돌보기 위해 떠나는 위대한 선교사의 파송 예배에 지난 월요일 날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 날 축사하시는 한 목사님의 간증에 얼마나 마음에 통증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뭐, 달리 통증이 온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부끄러움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이 섬기는 선교 단체에 얼마 전에 여수에 있는 애향원 교회에 시무 하시는 양장로님이란 분이 전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문둥병으로 실명을 해서 앞을 보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중국의 나환자를 돌보는 한 단체에 선교비를 보내왔습니다. 1000만원을 보낸 것입니다. 뭐 일반 사람에게는 기부금으로 큰 액수가 아닌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 장로님은 생보자입니다. 한 달에 나라에서 주는 얼마 안 되는 돈을 꼬박 꼬박 모아두었다가 1000만원을 헌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사연을 적었는데 얼마나 감동이 되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꿈이 병원을 세우는 것인데, 그 병원은 못 세우지만, 그들을 위해 약값에 보태 써 달라고 선교비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린 것입니다. 자신의 앞가림조차도 버거운 분이신데, 무슨 헌신이 일어날 수고 그 입에서 무슨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 손에 무슨 감사하다는 예물이 들려질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은혜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영적으로 누리고 보니 비록 육신은 망가졌지만 감사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그 물질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아브라함은 이 장엄한 언약을 붙잡고 믿음으로 사는 모험의 여정을 떠납니다. 그 동안 숱한 인생살이에서 부딪히는 것들을 자신의 경험으로 해결하려했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이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개를 펴기도 전에 우리의 성숙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11절에 보면 "솔개가 그 시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쫒았더라" 약속의 의식을 거행하기도 전에 솔개는 제물을 훔쳐가려고 계속 덤벼들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체에 덤벼드는 이 솔개들에게 사체를 도둑맞지 않으려고 밤새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이보다 답답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12절에 보십시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함으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약합니까? 말씀 앞에 순종 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와 그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면서도 불구하고, 때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도 마음놓고 받을 수 없을 만큼 우리의 영육은 퍽 약합니다. 한마디로 항상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언약의 현장에서 두려움 속에 있는 아브람을 보십시오. 이 연약성은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해서 금방 벗어 던질 수 있는 겉옷도 아니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증세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일생 동안 연약한 존재로, 피조물다움을 벗지 못한 채 살아야합니다. 이와 같이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로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돕는 자, 다시 말하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계시는 성령은 본래 육신의 사람이었던 우리를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 세상에서 장차 누릴 영광의 기업을 누릴 수 있도록 소망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주님은 결코 이것을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자녀들을 결코 놓치지도, 또 포기하시지도 않으십니다. 롬8: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로마군인이었습니까? 아니면 빌라도 였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아끼시던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 분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한번 얻은 구원이 언제라도 다시 잃어 버려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불안정한 것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선물을 언약하시면서 아무도 그 무엇도 우리에게서 이 선물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보장해 주셨습니다. 요한10:28에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제물을 쪼개놓고 기다렸던 시간 때가 언제입니까? 12절입니다. "해질 때에 아브라함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함으로" 밤! 입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밤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피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싫어하는 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구의 낮과 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생의 낮과 밤을 주셨습니다. 사45:7절에 보면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란도 창조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싫어하는 이 고난의 밤을 주셨습니까? 여러분, 우리 인간은 밤을 통과하지 않으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아니하는 고약한 기질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에 바로 쓰임을 받는 인물 치고 인생의 밤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뭐, 요셉이나, 모세, 다윗, 그리고 엘리야를 보면, 하나님께서 역사의 자국을 깊이 남기기 위해 큰그릇으로 사람마다 깊은 밤을 통과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밤을 통과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밤을 전혀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솔로몬 왕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왕궁에서 태어났고, 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를 이운 다윗 밑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에게는 밤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생애 가운데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었지만, 밤이 없는 인생을 살았던 그는 결국 비참한 존재로 끝났습니다.

보세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한 방법도 밤의 방법이었습니다. 골고다를 향하는 잔인하고도 무서운 저 십자가의 길! 예수님에게 그것은 밤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견딜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었으면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절규하셨겠습니까?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전 인류를 위하여 피 흘리게 하시고 그 처절한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인류가 죄 용서함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밤의 섭리입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여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임하실 때 '연기 나는 풀무로', 그 다음에는 '타오르는 횃불'로 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풀무불의 연기와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때 자녀인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훈련의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풀무입니다. 풀무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풀무는 쇠를 녹일 뿐만 아니라 또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마치 풀무불 속에 들어가 깨어지고 달구어진 다음에 하나님이 쓰시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런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연기 나는 풀무는 다른 게 아닙니다. 13-14절입니다. 다 함께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여기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이 예언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함으로써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이 이스라엘 민족의 마지막 드라마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고통 다음에 희망을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이방나라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가 몇 대 만에 다시 돌아온다고 했습니까? 사 대 만에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아브라함 다음의 일 대가 누구입니까? '이삭', 그 다음은 '야곱', 또 그 다음은 '요셉' 그리고 요셉 다음이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출애굽하는 모세가 등장해서 그 백성을 시온의 땅으로 회복시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풀무불을 지나 그들에게는 타오르는 횃불의 미래가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한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역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보편적 삶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체험을 가리켜서 '깨어짐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풀무불 속에 들어가 깨어지고 달구어진 다음에 하나님이 쓰시는 것처럼 우리 인생이 쓰임 받기 위해서는 이런 시련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깨뜨려져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도 400년이라는 풀무불을 지나게 하시고 단련하시는 것입니다.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이 고난의 시간은 더 연장될 뿐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개인의 삶 속에도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나를 부수십니다. 나를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가 본문을 묵상하다가 성경에서 재미있는 구절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사야 28장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연단시키고 단련시키는 모습을 아주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소회향'이라는 식물이 나옵니다. 소회향은 꽃씨의 일종인데, 떡을 만들어 먹을 때 그 속에 집어넣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소회향을 거둬들일 때는 작대기로 떨고, 좀더 큰 식물인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곡식은 수레바퀴에 넣고 돌리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을 한국 농촌에 비유한다면, 깨 같은 것은 아마 작은 회초리로 탁탁 털면 될 거고, 콩 같은 것은 도리깨를 가지고 열심히 두들겨야 할 것입니다. 보리 같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절구방아 속에 넣고 찧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사람 역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만들어지는 모습이 저마다 다릅니다. 깨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회초리를 가지고 달달 쳐서 깨우쳐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콩처럼 하나님이 도리깨를 가지고 작살을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야 정신차리고 새로워져서 주님을 붙들고 주의 말씀 안에서 만들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구방아에 넣고 찧지 않으면 결코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에 거센 풍랑과 시련이 임하거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큰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큰 방법으로 내게 임하시는구나'하고 말입니다. 또 하나 이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내가 너무 고집이 세니까 하나님이 나를 절구방아에 넣고 찧으시는구나.'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만드실 때 저항하지 마시고, "하나님, 고통을 통한 분명한 교훈을 배우겠습니다. 저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풀무불 그것은 아픔의 체험이었지만, 이 풀무불을 잘 지나간 사람에게는 타오르는 횃불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자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풀무불을 통과하고 횃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풀무불 연기 속에서 숨막히듯 몸부림치다가 주저앉아버리거나 질식해 버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오늘 연기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연기 건너편의 횃불을 향해서 전진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 순간 자기 인생이 연기 속을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연기 건너편에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예비하신 횃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을 붙잡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횃불을 준비하고 다가오시는 분,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요 8:12). 그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빛을 발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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