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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초대교회의 어른들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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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명절만 되면 부모님 생각에 힘이 듭니다. 가신지 오래 되었는데도 때로는 주체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명절에는 늘 어머님이 계시던 시골을 몇 시간씩 때로는 열 시간이 넘게 운전해서 가다보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가서 하는 일은 별 할일 없이 어머니 한번 뵙고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명절이 되어도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더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어머님 아버님이 계실 때 용돈도 더 드리고 잘 모시기 바랍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계신 분들은 잘 모시는 것이 정말로 큰 복인 것 같습니다.

명절에 부모님 생각과 함께 자주 떠오르는 것은 명절 때만 되면 어머님과 아버님이 자식들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입니다. 제가 눈으로 볼 수 있던 것만 해도 그런데 보지 못한 마음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가슴 아리는 것이 많습니다. 명절이 되면 신발이라도 하나 사주고 싶어 하시던 마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용돈을 제대로 주지 못하였지만 명절이 되면 한 푼이라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 그 마음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 있었습니다. 봄만 되면 양식이 떨어져서 굵어죽은 사람들의 소식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죽은 사람 이야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쓰레기통을 뒤져서 나온 음식이 독이 있는지 모르고 맛있게 먹고 난 뒤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연탄가스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이래저래 참 많이 죽었습니다.

바로 얼마 전 그때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동행했던 기자가 했던 고백입니다. 케냐의 나이로비를 방문하던 기자는 이번 취재일정은 시간여행을 뛰어넘는 문화적, 문명적 충격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 기자는 나이도 얼마 되지 않았을텐데 몇 세기를 거꾸로 간 느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케냐 나이로비의 키베라 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는 일행 모두 빈곤을 뛰어넘어 정말 비참한 참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들은 그런 광경에 하나같이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기자는 아프리카와 우리나라의 어제 그리고 오늘이 너무 선명하게 대비되었다고 독백했습니다. 대비된 이유가 있습니다. 1960년에 우리나라의 GDP는 84달러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아프리카의 최빈국이라는 콩고의 GDP가 280달러였으며 지금 이 기자가 방문해서 참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케냐는 300달러가 넘었다고 합니다. 함께 있던 일행 중 한 사람은 뉴욕에 있는 아들이 보고 뭔가 느낄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만난 한 외교관은 아프리카에서 근무하면 한국이라는 점이 너무 자랑스럽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1980년에 미국에 가서 디즈니랜드를 보았습니다. 그 때 미국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 ‘코리아’라고 하면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관계가 있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정도야 당연히 좀 알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물으면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때 디즈니랜드의 공중놀이 기계에 일본어 설명은 있는데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 자체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어디든 가기만 하면 삼성, 엘지 등의 광고가 무수히 많고 동구에 가면 대우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릅니다. 중앙대로 양 옆에 깃발이 쭉 걸려있는 모습을 보면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풍요가 언제까지나 당연하게 계속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전의 불행을 당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런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계 다른 나라를 보면 거꾸로 간 나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 책임이 대통령이나 몇몇 지도자들에게 있다고 하면 미안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지금 이 부요와 풍요를 누가 주었습니까? 대통령 혹은 그 사람들이 주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만이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그치시면 다 날아갑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머물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보고 그 은혜를 계속 주실 것 같고 대통령이 미워서 그 은혜를 끊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에 오래 머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자기 민족과 동포에 대한 책임감과 연민과 긍휼과 사랑이 유대인만큼 강한 민족이 없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 민족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로 전쟁이 나면 아랍 사람 쪽은 나가는 비행기 표가 동이 나는데 이스라엘 사람 쪽은 들어오는 비행기 표가 동이 난다고 합니다.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을 사랑하고 동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늘 가난한 자기 민족들에 대해서 구제를 많이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는 아예 구제를 담당하는 직원이 두 사람 정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때로는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구제헌금을 받으러 갑니다. 시장이나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제헌금을 받는데 금요일에 나갈 때는 광주리를 들고 나가기 때문에 쿠파 즉, 광주리 헌금이라고 말합니다. 또 급한 사람들을 위하여 매일매일 집집마다 다니면서 구제를 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쟁반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탐후리라고 합니다. 구제헌금을 모으게 되면 당일에 다 처리합니다. 급한 사람이 있으니 오래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급한 일이 있는 사람은 그 급한 일을 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지속적으로 생계 양식을 주어야 할 사람은 다음 일주일간을 버틸 수 있도록 열네 끼를 줍니다. 하루에 세 끼를 다 먹을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하루 두 끼만 먹으라고 열네 끼를 주는 것입니다. 주로 이 구제헌금을 받는 사람들은 당시 가장 생활능력이 없던 과부들이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두 부류의 교인이 있었는데 한 부류는 본토 출신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히브리어에 속하는 아랍어를 했기 때문에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히브리말을 다 잊어버리고 헬라어를 말하기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왜 같은 교회에서 히브리파 과부들은 도움을 잘 받는데 헬라파 과부들은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불평의 문제가 교회에 생긴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도 그리고 교회도 어디서든지 좋은 일이 있으면 많이 배워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름철에 불교인들이 절에 모여 하안거를 하는데 이는 스님이나 신도들이 모여서 좋은 수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우리 기독교도 좀 배웠으면 합니다. 카토릭에서는 피정이라고 하는 것도 합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교역자들이 침묵 수도를 연구하고 있는데 배울만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하는 구제헌금은 사실 유대인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던 편협된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입니다.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기독교는 이 편협한 민족주의를 넘어가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생각할 것은 구제를 할 때 작은 우리끼리가 아니라 우리를 뛰어넘는 좀 아량있는 폭넓은 사랑을 가지고 하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초대교회에서 하는데 좋은 일에는 항상 어둠이 틈탑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에 불평 불만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교회가 나누어지는 어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을 때 그리고 귀한 일을 하려고 할 때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틈만 나면 어둠이 틈을 탑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좋은 일이나 큰 일, 귀한 일이 있을 때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인가 세상의 세속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이 판가름납니다. 기도하는가 하지 않는가? 우리 힘으로 하고 또 그렇게 우리가 한 것으로 우리끼리 즐거워하고 놀고 마느냐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느냐? 또한 이 모든 일은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으니 하나님께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세속적인 사람인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람인지 나누어집니다.

이런 문제가 생겨서 교회가 어렵게 되었는데 교회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니 점잖은 사도들이 나서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여러분, 그 동안 우리가 구제의 일을 했었는데 이것은 우리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 일은 때가 되면 우리가 손을 놓고 여러분이 하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면서 여러분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받는 지도자들을 뽑아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뽑힌 지도자들에게 그 일을 맡겨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때 뽑힌 일곱 사람을 일곱 집사라고 하는데 집사라고 꼭 규정하지는 못합니다. 잘못하면 오늘의 직분하고 혼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분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처럼 일이 잘 해결되었는데 오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이 어른이냐, 어른은 어떤 일을 하느냐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하시는 분들은 나라의 최고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을 잘보고 가정이나 세상이나 교회의 지도자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 어른이란 문제를 해결해 주고 풀어주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잘 나섭니다. 그러나 덜 좋은 일인 경우에는 잘 나서지 않는데 여기서 어른인가 아닌가가 가늠되어 집니다. 어른은 사람들이 섭섭해 할 때 나서서 사람들의 섭섭한 마음을 달래 줍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때 자꾸 부추기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든 불평이 없어지도록 잘 챙겨주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원망하는 일이 있을 때, 속상하는 일이 있을 때에 남의 일이라고 보고만 있지 않고 그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힘을 주는 사람이 어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잘 나서지 않습니다. 그런 일에 있다 보면 자기 돈이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그런데 구애받지 않습니다. 내 돈 보다도, 내 수고 보다도, 내 힘든 것보다도 그 사람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어른입니다. 이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노릇입니다. 진짜 어른은 문제를 풀어주고 문제를 쉽게 해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진짜 남편이라면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고 자녀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대통령도 국민을 편안하게 끌고 가는 사람이 어른입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고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어른이 아닙니다. 반대로 나이가 아무리 적어도, 아무리 별 볼일 없는 자리에 있다 해도 문제를 풀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 그 사람이 어른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어른이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이 앞장섰습니다. 그러다가 교인들이 많아지고 구제의 규모가 커지고 대상이 더 많아지다 보니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잘못인지 얼른 알아챘습니다. 자신들의 한계가 왔는데 그 한계를 알지 못했다는 것을 금방 안 것입니다. 이런 분이 바로 어른입니다. 옛날에는 잘했고 모든 것을 다 내가 했어도 어느 순간이 되면 내가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낫겠다는 이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니라고 하는 한계를 아는 것이 어른입니다. 이렇게 한계를 아는 사람은 사실 지금까지 내가 잘해온 것도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어른은 자기가 잡은 것, 가진 것을 놓을 줄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들도 마찬가지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어려운 것은 한 번 잡은 것을 잘 놓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이 마이크 한 번 잡으면 놓지 않으려 하는 것, 권력을 한 번 잡으면 임기가 끝나도 뒤에서 뭔가 해보려고 별별 애를 다 쓰는 것, 이런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습니다. 가장 못난 지도자들이 자꾸 더 많이 더 오래 쥐려고 합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못난 사람일수록 자꾸 더 모으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얼마나 있는지 생각하고 쓸 줄도 알아야 참된 어른입니다.

못난 원숭이 이야기 잘 아실 것입니다. 인도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입니다. 단단한 상자를 만들어서 구멍을 파고 그 밑에다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두는데 손만 겨우 들어가는 구멍을 만들어 두면 원숭이들이 손을 집어넣어 과일을 잡습니다. 그런데 손이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과일을 놓으면 손이 빠져 나오는데 원숭이는 손을 놓을 줄 모릅니다. 원숭이와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 때문에 이것도 잃어버리고 저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아주 초라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사도들은 알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들이 쥐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다 내어 놓았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열두 사도가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라고 말했는데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이런 고백은 잘하지 못합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겉으로 표현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잘난 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못난 짓을 해서 여러분 사이에 이런 문제가 생기게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부 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분이 어른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의 훌륭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물러갈 준비를 하는 사람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면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서서히 준비해서 때가 되면 편하고 자연스럽고 아주 좋게 물러갈 수 있도록 하고, 때가 되면 아주 깨끗하게 물러갈 줄 아는 분이 어른입니다.

네 번째는, 어른은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놓고 포기한다고 다들 이야기합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은퇴했다가도 번복하기도 하고 또 간다고 별별 약속과 다짐을 하고도 나중에 아주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거기에 대한 실제적인 준비를 해 놓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내 자리에 쓸 만한 사람을 미리 준비해 놓았으면 쉽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있어야지 내가 물러가고 내가 손을 놓고 나는 이렇게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세우는 이 일이 바로 어른들이 해야 할 노릇입니다. 사실 말은 쉽지만 이 모든 일들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남에 대해서는 왜 저렇게 욕심이 많고 오래 쥐려고 하느냐고 말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 경우이면 매우 힘듭니다. 돈 많은 사람이 주머니 열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자신의 주머니는 하나도 열지 않습니다.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권력을 내가 잡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로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놓을 때는 놓고, 한계를 알고, 문제를 풀어주고 그리고 사람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을 세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세워놓으면 자기는 이제 완전히 퇴물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할까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봐야만 이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에 가능합니다. 여기에는 논리가 있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되면 정말로 무능한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돈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렇게 좋게 보이던 권력이나 귀하게 보이던 돈이 별로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너무 좋은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권력이나 돈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은 하나님 맛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정말로 큰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어느 날 내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재물이 하나님께로, 세상에게로, 다른 사람에게로 넘겨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이 쉽습니다.

어른들이 이렇게 했을 때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 말씀을 보면 교회가,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들이 뒤로 물러나고 일을 넘겨주니까 모든 교우들이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놓아야 합니다. 자꾸 뒤로 물러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이 왕성해졌다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종이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종에 복종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제사장들이 기독교를 제일 반대했는데 이 사람들도 기독교에 귀의하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사도행전 6장을 통해서 어른이어야 할 사람에게 문제를 풀어가고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놓을 것은 빨리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른이어야 할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분부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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