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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이루시는 승리 -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 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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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네 번째로 느헤미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어떠한 비탄한 지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회하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점을 승리의 출발점으로 삼는 은혜의 백성입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고 사명을 받은 즉시 그는 새로운 승리의 출발선상에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여러 준비들을 하며 그 가운데 많은 방해와 조롱이 있어도 결국 어려움을 딛고 새로운 출발을 이룹니다.
지속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마음을 드려 역사하고 모든 방해를 헤치고 나아갈 때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거침없이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방해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집중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때 하나님의 역사는 완공되어 우리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까지 본 느헤미야서의 내용이고 오늘 함께 나누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사단의 방해와 공작이 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국 끝까지 그 일을 위해서 힘쓰고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데 쓰임 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방해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꿋꿋하게 진행되어오던 하나님의 역사, 즉 예루살렘 성벽 수축이 오십이 일이라는 단기간에 마침내 완성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겁니다.
이 짧은 기간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은 백성들이 합력하고 집중하여 이루어졌다는 뜻이고 그 속도에 따라 사단의 무리의 공격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리라”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다면 그 선한 일을 시작하신 우리 하나님께서 마지막까지 그 아름다운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이러한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으로 대표되는 사단의 세력들의 끊임없는 방해와 집요한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마침내 집중되어질 때 오십이 일 만에 예루살렘 성곽의 수축이 완성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장면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이루는 모든 일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이루어지는 온갖 방해와 공작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성도들, 내 개인적인 모든 문제, 내 내부적인 모든 갈등도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여 승리하는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첫 번째 내용을 보게 되면, 수많은 방해와 지뢰밭과 같은 위험의 지경을 무릎 쓰고 헤쳐 가서라도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위에서부터 있는 내용들 가운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짐의 위대성에 대해 다시 한 번 마음 가다듬고 그 일을 꼭 이루어드려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길어서 우리가 15절-16절을 읽었지만 거기에 있는 내용을 보면 너무 집요한 방법들이 기술이 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것처럼 예루살렘 성벽은 시작해서 수축이 완공된 날까지 오십이 일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오십이 일이 걸리는 동안에 이전부터 있었던 방해공작이 너무나 많았어요. 오십이 일 동안 이루어진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너무나 다양한 방법으로 공작과 방해가 있었고, 그것도 각 방법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된 것을 생각하니 정말 끊임없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6장에서만도 네 가지의 다양한 방해방법이 여러 가지로 반복되어져 일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집요한 사단의 공격을 보면 <6장 1절-4절> 사이에서 보면 암살계획을 세우고 이 산발랏 일당이 느헤미야를 오노평지에 오라고 초청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알아차리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끈질기게 요구합니다. 몇 번이나 요구하는가 하면 같은 내용을 무려 네 번이나 요구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 내용을 파악했던 겁니다.
산발랏이 초청하여서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의논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죽이기 위함이라는 것임을 느헤미야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여전히 같은 대답으로 그 청약에 넘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비둘기 같은 순박함과 뱀 같은 지혜로움을 동시에 소지해야 합니다. 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이지를 동시에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법과 공의의 법을 동시에 소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사람은 순박하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이며, 뜨거운 열정을 가지되 냉철한 이지 속에 정확한 판단과 분석의 결과를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추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되 공의를 성취하며 동시에 사랑을 이루는 균형 잡힌 사고와 행동의 모습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은 사단의 세력, 즉 산발랏 일당이 오노평지에서 만나자는 것, 네 번이나 반복해서 요청 하는 것은 끊임없이 느헤미야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가 왜 넘어가지 않았을까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바르게 세워진 원칙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 안에 세워진 원칙일겁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솔깃해 질수 있어요. 귀에 그럴듯하게 들리고 마음에 그럴듯하게 감동적으로 느껴지고 또 여러 가지 삶의 상황에 서 내 눈에 보여 지는 것이 그럴듯하면 마음이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 분명히 파악을 하셔야 하는데 내 눈에서, 내 귀에서, 내 감각으로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것과 내가 평상시에 세운 바른 원칙과 과연 일치하는가?

만약에 내 삶의 상황이나 내 감각이나 내 느낌은 모두 그럴듯한데 내가 이제까지 세운 원칙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내 느낌을 따를 것인가 원칙을 따를 것인가 결정하셔야 하는데 믿음의 사람은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듯해서 했더니 나중에 그게 아닌 경우가 너무 많았죠. 늘 말씀드리죠. 어떤 상태에서든지 우리가 내 마음에 드는 대로 행동하면 이것은 거의 실패할 확률이 많습니다. 과연 내가 이제까지 세워놓은 원칙가운데 맞느냐? 우리가 단기적으로는 실패하고 어려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원칙의 승리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세상의 모든 일도 마찬가지임을 우리는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느헤미야가 왕에게 모반하려 했다고 모함하게 됩니다. 네 번이나 안 듣게 되자 이번에는 또 다른 계책을 쓰게 됩니다.
뭐냐 하면 <5절-8절>까지 느헤미야가 왕에게 모반하고 선지자에게 거짓으로 선교 활동을 해서 예루살렘에 왕이 나게 된다는 겁니다. 즉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획책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야 네가 오노평지에 와서 우리에게 그것을 해명해라. 그럼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거기에 말려들지 않았던 겁니다. 이러저러한 풍모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계책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굳건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 삶은 늘 승리의 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그 구조는 분명한 원칙의 기준을 세우고, 원칙의 기둥사이를 왕복할 때 거기서 구조가 생기는 겁니다. 그것이 곧 시스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칙이 없으면 구조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승리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승리의 원칙들을 세우고, 그 원칙을 반복해서 지켜갈 때 승리의 구조가 우리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내 눈앞의 현상이 어떻게 된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과연 내가 이와 같은 승리의 원칙을 지켜가고 있는가? 그러면 내 눈앞의 이런 현상들은 시간이 가면 곧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고 원칙대로 나아갈 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이런 말씀 드리지요? 10년 동안 똑같은 노래를 부르면 그것이 ‘문화’가 된다고 합니다. 내 삶에 어떤 문화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삶속에 성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10년 동안이나 똑같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분명히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이고, 원칙 속에서 결국 우리는 문화가 이루어지고, 문화 속에 우리는 어떤 일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 또 이것까지 실패하니까 더 어려운 시험이 닥쳐오게 됩니다. 뭐냐 하면 스마야를 통해서 느헤미야와 백성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려는 겁니다. 느헤미야를 흔듭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는 꿋꿋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스마야는 제사장의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10절-13절>까지를 보면 이 당시에 제사장직을 맡았던 스마야를 돈으로 매수했습니다. 참 슬픈 일이고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는데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너무너무 가슴 아파 하는 일이지만 정말 우리 삶의 현실에는 이런 일이 있어서 우리 삶이 슬프고 어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선지자여 몸이 아픕니까?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무슨 일로 이렇게 밖의 출입을 안 하십니까?” 하고 문안하러 갔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거짓 예언을 합니다. “느헤미야야 당신이 오늘 암살돼서 죽게 될 것이다. 필연 밤에 와서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니 네가 성전 외소에 숨어들면 거기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니 너는 그리로 가라.”라고 얘기합니다.
느헤미야는 고민이 생겼어요.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믿음의 원칙으로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 외소에 들어가면 제사장이 아닌 느헤미야는 죽게 됐어요.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나? 제사장이 그렇게 이야기 하는데.’ 하지만 느헤미야는 거기서 결정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내 믿음의 원칙을 지킬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손에 죽으면 나는 그것을 영광으로 알리라. 내가 사람의 손에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손에 죽는다면 나는 더 처참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느헤미야가 원칙을 따른 결과 지혜로운 일이었어요. 이건 없는 일이고 꾸며낸 얘기란 말입니다. 또 느헤미야가 성전 외소에 가서 설사 하나님 앞에 죽지 않았다고 합시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지도할 지도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율법을 어긴 지도자이기 때문에 백성들은 더 이상 그를 따르지 않습니다. 결국 느헤미야의 신앙의 원칙은 그를 또 한 번 구원해 낸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입니다. 내부에 세력을 심어놓아 간악한 자들의 뜻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계획을 누설하고 전달하여 그것으로 왜곡시키고 계교와 계략을 만들어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6장 17-19절>을 보면 유다의 귀인들이 여러 번 도비야에게 편지 했고 유다의 내부 사회 속에서도 이미 내통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비야의 선행을 내 앞에서 말하고 또 내말도 저희들에게 전하매 도비야가 항상 내게 편지하여 나를 두렵게 하고자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 안에 있는 모든 비밀을 얘기하고 저쪽의 내용을 이쪽에 전해서 사람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 안쪽에도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성경은 이것을 뭐라고 얘기 하냐면 밤에 사단이 몰래 와서 가라지를 뿌렸다고 얘기 합니다. 항상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으며 양과 염소가 같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우리 내부적으로도 우리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인가 바로보고 그 가운데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 바로 판단해야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일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결국 느헤미야로서는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이 사실들을 믿음의 원칙을 가지고 헤쳐 나갔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에게 이런 원칙이 없었다면 그는 귀에 들리는 솔깃한 말을 듣고 넘어갔을 겁니다. 오늘 성경도 보면 정말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고 있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모반할 계획이 전혀 없었거든요. 심지어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네가 왕에게 반역한다고 성을 짓고 심지어는 선지자들도 그런 말을 하고 다니도록 네가 조종하지 않았느냐?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와서 정직하게 밝혀라.”

그런데 그걸 밝히러 가면 그는 죽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나는 내가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살았는데 내가 너희에게 밝히고 할 것 조차도 없다. 나는 내 믿음대로 갈 것이고 내 진실대로 가면 된다.” 라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렸지요. 우리에게 진실이 중요한데 그 진실이 어디에 근거해야 하냐면 사실에 근거해야 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진실은 힘이 없어요. 나는 진실해요. 거짓말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내가 사실을 잘못 판단해서 틀린 것을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나는 열심히 전달했어요. 그렇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지식과 내용을 전달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진실했지만 사실과는 다른 것이고 그건 진리와는 다른 것입니다.
‘나 거짓말 안했어. 진실이야.’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을 수 있지만,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반드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올바른 사실에 근거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서 우리는 자신 있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어떤 사단의 계략도 물리쳐야 합니다.
사단의 책략은 결국 느헤미야를 공격하고 그 백성과 함께 그 역사를 그만두게 하는 것입니다. <6장 9절>을 보면 ‘이에 저희가 우리를 다 두렵게 하고자 하여 말하기를 저희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하고 이루지 못하리라 함이라’ 그러니까 결국 사단의 세력들이 이렇게 함은 피곤하여 주의 일을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그때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저처럼 손을 다 올리시고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이게 느헤미야가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사단의 세력이 이렇게 나를 준동하고 도저히 흔들어서 견딜 수가 없는데 하나님의 역사를 중단하게 하려는데 이제 내 손에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그는 기도하고 나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느헤미야서를 같이 생각해보면서 이게 세상 속에 있는 그대로의 일이라는 것을 느끼시겠지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냥 순연하게 되는 일 없어요. 그냥 와서 쓸데없는 말하고, 마음 괴롭히고 상처주고, 없는 말 만들어내고, 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다른 약점도 파헤쳐서 그것 때문에 우리마음을 더욱 낙심하게 만들어서 결국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중단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때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이죠? ‘하나님, 이제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우리는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 앞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그 일을 결국 이뤘습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시도하여 하나님의 일을 그만두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천명을 돕는 사람이 되기로 했으면 우리는 끝까지 그 일을 이루는 겁니다.

우리 교회의 교인은 언제까지 그 일을 한다구요? 끝까지 하는 겁니다.
우리교회 교인은 마지막에 가서도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끝까지 하는 겁니다.
따라서 합시다. “끝까지. 끝까지.”
저는 제 묘비명에 ‘끝까지’라고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해도 끝까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게 어려움이 있다고 내가 이 어려운 것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힘들어서, 어려워서, 못해서, 하기 싫어서, 안하고 못하면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힘들어서 못하고, 하기 싫어서 못하고, 정말 지루해서 못하고, 싫어서 못하고, 재미없어서 못하고, 그래서 안하고 못하면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단은 항상 우리에게 때로는 힘들게 하고, 때로는 재미없게 하고, 때로는 지루하게 하고, 싫증나게 하고, ‘나 그거 못 해. 안 해.’ 이렇게 만듭니다. 그러면 나중에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다. 이때 우리는 오히려 정죄하게 하려는 사단의 세력들에 대하여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하고 우리는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다라는 것은 내 힘의 미약과 사단의 공격임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시도는 속임수, 중상모략, 술수, 내부적인 방해자, 이것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단의 세력이 시도를 이룹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결국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은 어떤 일이든 시작했으면 마침표 찍고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분별하고 평가해서 계획서까지 다 세워놓아서 다음에 이런 일이 있으면 이렇게 해야겠다는 평가 진단서까지 만들어놓고 끝내야 됩니다.

대부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시작하고 나중에 흐지부지하고 그 일에 대하여 잊어버리고 싶어요. 다른 사람도 잊어버려주길 원해요. 그러나 우리는 안돼요. 시작한 일이 있으면 끝까지 마침표 찍고 끝내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평가해서 자료까지 만들어놓고 다음에 이 자료를 써야겠다하고 생각하고 정리하고 끝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흐지부지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그 일을 이루셨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열심히 기적 일으키고 천국복음 전하다 끝난 것이 아니라,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원의 완성을 끝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비둘기 같은 순결하고, 뱀 같은 지혜를 동시에 이루어야 하고, 열정과 함께 냉철한 이지를 소유해야 하며, 바른 분별력과 추진력을 가져야 하며, 굳건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과 느헤미야는 굳건한 신뢰가 있었고, 또 백성들끼리는 서로를 믿는 힘이 있었기에 합력할 수 있었겠지요. 모든 백성들이 한 분깃씩 가져와서 마치 레고 블록 맞추듯이 딱딱 맞춰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최선을 안 하는데 괜히 나만 많이 가져가는 것 같아’ 이렇게 생각하면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함을 믿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열심히 하니 나도 열심히 해야지’ 라고 생각해서 하나 둘씩 블록 맞추듯이 맞춰갔던 것입니다. 사단의 계교는 때로는 너무 간교하여 ‘정말 그것이 옳을까’하는 미혹에 빠뜨릴 때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신앙의 원칙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말에 귀가 솔깃한가? 내가 눈앞에 보이는 현상에 솔깃한가? 가 아니라 내가 정말 원칙에 충실하고 있는가가 우리에게 있어서 성공하고 있는가, 실패하고 있는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바른 원칙을 가지고 그 원칙을 고수한 사람들입니다. 언제나 사단의 방해는 내부에 방해자를 심어두고 그것을 통해 어려움을 끼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시도를 무너뜨리기 때문이죠.

두 번째로 예루살렘 성곽이 오십이 일 만에 완성됐는데, 도대체 예루살렘 성곽이 이렇게 완성되기까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늘 6장만해도 네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무려 네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한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입니까? 그 오십이 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렇게 많은 종류를 열거하기에 숨이 찰 정도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끊임없는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승리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분별력과 단호한 의지력입니다. 바른 분별력입니다. 어떤 것이 옳은가, 그른가,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분별력이라는 겁니다. 그것도 내 눈앞에 보이는 것만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멀리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분별하는 겁니다. 바른 판단에 대한 단호한 결단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올바른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만약에 분별이 잘못되면 그것은 수고하면 수고할수록 더 큰 어려움만 끼칩니다. 어떤 미혹에도 확신하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 단호한 결단의 의지력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는 정말 솔깃한 말이 많습니다. 눈에 그럴듯한 그림들이 많단 말입니다. 마음속에 그럴듯한 움직임이 생겨납니다. 이건 뭐죠? 감정, 정서적인 작용입니다. 그런데 우리 심정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었기 때문에 내 심정 흐르는 대로 간다라는 것은 곧 잘못된 것입니다. 내 심정 흐르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의 말씀이 지도하는 대로 가야하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자꾸 와서 그럴듯하게 얘기하면 한 번 두 번 들으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원칙은 뭡니까? 내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끊습니까? 계속 듣습니까? 계속 들으면 끌려가는 것이고, 끊으면 원칙대로 살며 우리는 거기서 은혜를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거기에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너 선악과 먹으면 안 돼. 너 죽어.” 하고 얘기했지만, 사단이 와서 “너 죽지 않아.” 하고 얘기하니까 거기에 끌려갔던 겁니다. 원칙대로 잘라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적이 너무나 많아요. 눈에 좀 그럴듯해서 나갔다가 저 계곡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한 분별력과 분별해서 결정한 바를 단호하게 결단할 수 있는 의지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승리의 원인 중에 아주 중요한 원인이 있는데 그것은 집중력입니다. 오십이 일에 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느헤미야는 거기서 판단했을 겁니다. ‘내가 처음 총독으로 부임했는데 이 백성들은 다 힘이 없어서 그냥 겨우 있는 백성들입니다. 만약 공사의 기간이 길어지면 분명히 의견이 분열 될 거야. 그렇다면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의견이 분열되기 전에, 한 번에 힘을 모아 눈에 가시적인 효과를 보여줘야 이 사람들이 그 가운데서 용기를 얻고 그 다음단계의 일을 해 나갈 수 있을 거야.’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건 일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거기서 분별한 겁니다. 집중해야지.

여러분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집중력입니다. 사람은 보통 가지고 있는 능력의 1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100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10%사용하면 10이라고 합시다. 50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집중해서 40정도의 능력을 발휘하면 그 사람은 100의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만약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에 따라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다 결정된 겁니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아요. 언제든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좀 부족하다 생각해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실성과 그리고 집중력을 통해서 그 사람이 이룰 수 있는 일의 업적은 전혀 틀립니다. 우리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미한 여러 상황 속에서도 그 일을 집중해서 주의 일을 흩트리지 않아야 합니다.

쳐들어온다고 해도 분리해서 한편은 지키고 한편은 일하고, 한 편으로는 병기를 잡고 한 편으로는 기계를 잡고, 물 길으러 갈 때도 기계를 잡고,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가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집중을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는 겁니다. 집중이라는 것은 그렇게 길게 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단기간으로 일을 정했던 것입니다.

제가 늘 보면 이런 일이 있습니다. 1년 대강 준비해서 10년 동안 아주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10동안 정말 어렵게 준비해서 1년 안에 집중해서 그 일을 마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과연 대강 준비하여 오랫동안 고생할 것인가, 확실하게 준비해서 단기간에 그 일을 끝낼 것인가를 우리는 분명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집중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가지치기 안하면 집중하지 못합니다.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정리할 것 정리하고 우리는 가야할 목표를 분명히 단선화 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 물위로 걸어오실 때 사람들이 유령이라고 놀라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믿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주님, 만약에 주님이시어든 나를 명하여 물위를 걸으라 하소서”
“오라” 예수님이 한마디 했어요 그랬더니 베드로가 혈기대로 그대로 물에 뛰어들었어요. 그랬더니 물위를 정말 잘 걸어요. “아 내가 정말 걷네.” 그러면서 옆을 보니 바람이 있어요. ‘깜짝 놀라서 무서워하는지라’-이것은 뭐죠? 단선으로 주님을 보고 걸어가다가 복선이 생겼어요. 그 순간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만 바라보고 집중해 달려갈 때는 괜찮았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복선적 요인이 생기니까 거기서 그냥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그때 구조 요청을 합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그랬더니 주님께서 도와주셔서 다시 물에서 건져냄을 당하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집중하지 못하고 복선적인 요소 가운데 방황하면 그때는 빠져 들어가는 겁니다.

가야할 목표가 분명하면 스쳐가는 일들은 우리들에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한눈 팔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경우에도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수시로 집중할 수 있도록 느헤미야는 늘 그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 목표가 뚜렷하면 모든 것은 스쳐가는 바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목표가 뚜렷하지 못하면 모든 것에 이리저리 관심이 가는 겁니다. 사람이 100M달리기를 하면 100M 뛰는 사람이 드물다고 합니다. 여러분 100M달리기를 하면 100M갑니까? 삐뚤삐뚤 가니까 이 사람은 110M갑니다. 100M 뛰는 사람과 110M뛰는 사람과 어떻게 같을 수 있습니까? 그건 경기가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집중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지요?
반드시 나아가야 할수록 우리는 정돈을 해야 합니다. 반드시 가야 할수록 단순화 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이와 같은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느헤미야의 또 하나의 승리의 요인은 지구력입니다. 어떠한 어려움에도 지칠 정도의 집요한 공격에도 가야할 목표를 분명히 바라봤습니다. 힘든 것과 그것을 그만 둬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힘든 것과 그만 둬야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느헤미야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뭐라 하면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옵소서.” 힘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힘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손에 힘을 주시옵소서. 내가 힘이 빠졌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가지고 내가 새로이 달려가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내 힘이 다하였나이다. 차라리 나를 거두어가소서.” 이건 믿음의 사람이 할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의 힘이 다하여 도저히 기력이 쇠진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애굽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애굽에서는 고기 가마 곁에 있었고 거기서 부추와 오이를 마음껏 먹었는데 여기 와서 아무것도 못 먹고 날마다 만나 같은 거나 먹고 있으니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하고 불평하니까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뭐라 하나요?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내손이 짧아서 너에게 미치지 못하느냐’ 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메추라기를 보내주시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기도하나요?

‘하나님 정말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셔서 우리에게 고기를 주셔서 힘을 내게 해 주십시오’ 라고 요청해야 하지요. 왜 한탄해요. 우리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부족한 것이 있으면 구하세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하세요. 그걸 가지고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결국 끝까지 그 일을 이루고 완성하였다는 데에 오늘 본문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결국 백성들과 마음을 합하여 그 일을 이룬 겁니다. 오늘 주의 성도들 어떤 일이든지 시작했으면 그 일을 완성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교회일이 됐건, 아니면 세상의 어떤 일이 됐건, 직장의 일이 됐건, 사업의 일이 됐건, 인간관계가 됐건, 그 일을 이루셔야 합니다. 우리 가끔가다 보면 그 일이 망해도 그 일 다음에 일어날 준비 해놓고 망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냥 망하니까 다 끝이야 하고 인간관계도 다 깨뜨려버리고 한탄하고 다른 사람 핑계하면 다음에 도저히 다시 일어날 수가 없어요. 관계가 다 깨졌는데 다음에 누가 돕겠어요. 정말 우리가 실패했어요. 우리가 경쟁해서 상대방이 승리하고 내가졌어요. 그때 내가 정말 열심히 해서 최선을 다해 힘을 다했지만 나보다는 당신 능력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하고 또 다른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패자의 모습일겁니다. 우리가 패배했다고 해서 상대방 비방하고 ‘나는 그게 아닌데, 상대방이 잘못했고...’ 이러면 우리는 더 누추해지는 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지금 아니라도 다음에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고 오히려 그 때를 위해서 힘을 비축해 두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무너질 때 다음에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고 무너집시다.”

우리는 반드시 일어나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어떤 경우도 남의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보면 항상 하나님 앞에 승리를 간구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승리의 모습을 온 세상에 나타내는 은총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명성의 확립입니다. 출발부터가 분명해야 합니다. 확신이 없는 출발은 중도에 어려움을 만나면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출발과 목표에 대한 정당성이 있어야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분명한 대의명분과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는 뚜렷한 목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뚜렷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이 명분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명분이 아니고 형식상의 논리가 아니라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 스스로의 사역에 대한 바른 정체감과 자존감 그리고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요소 중의 중요한 것은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냐?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지? 이 일을 해서 내가 정말 어떤 기여와 공헌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떳떳한 정체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자존감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중요하다. 나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하찮아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우리자신이 무너지고 망하는 겁니다. 자존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 우리 옆의 사람과 한 번 인사 합시다.
“당신은 너무 중요한 사람입니다. 나는 정말 너무 중요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아주 존중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 대할 때 정말 극진하게 대하십시오. 우리 믿음의 사람은 정말 극진하게 대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극진하게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니까. 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인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니까. 세계에서 매너 안 좋은 사람을 제일 싫어해요. 매너라는 것은 차문 열어주고 의자 빼주고 하는 이것만 매너가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주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열등감에 빠지지도 말고,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노력을 하고, 또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정체성을 가지고 자존감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 나는 그의 도구로써 내 역할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는 자신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 따라서 합시다.
“정체성, 자존감, 자신감” 이와 같은 멋들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왜 승리해야 할까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두 가지 내용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매 믿는 자의 숫자가 더하더라. 백성들의 칭송을 받으매 제자의 수가 더하더라’ 라는 내용이 반복돼서 엇갈려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면 믿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또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으면, 그들의 생활의 모범을 보이면 그 백성이 칭송할 때 많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선한 행실을 이루게 되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의 승리하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역사를 그 백성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주의 영광을 받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의 기쁨과 영광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통해 하나님의 어떤 영광이 나타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오늘 시간이 돼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상당히 잘하면 사람이 평가를 받습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워낙 탁월하게 그 일을 잘하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사람이 한 게 아니야, 하나님이 하신 일이야.”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야.”
저는 여러분들이 워낙 탁월한 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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