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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라가려거든 (마 16:2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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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4-26)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가장 핵심 설교라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서 이 말씀을 거듭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사람들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마19:37-39, 막8:34-37, 눅9:23-27, 14:25-27, 17:33, 요12:25).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복음전도자를 들라면 사도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은총을 받은 사도바울이 그의 삶에 종막을 고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 사실 사도바울에게는 자랑거리가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전통과 가계를 자랑할 수 있고, 놀라운 지성과 학문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많은 글을 썼기에 기록을 자랑할 수 있고, 선교하면서 나타난 이적과 기적들을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모든 마음을 기울여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외쳤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소중히 여겼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치욕적인 죽음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고, 죄가 지닌 무섭고도 엄청난 깊이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틀에 죽어가는 자들을 보았다면 ‘죄의 결과가 이렇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듯이,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십자가의 자랑은 하늘과 땅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아갈 때 사람이 죄악 속에 얼마나 깊이 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지루한 사랑에서 얼마나 높이 오르실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에게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고통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오는 고통은 결코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십자가의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1. 개인의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하자면 희생의 짐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의 삶이란 희생적인 봉사의 삶입니다. 크리스찬은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기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때 개인의 고난이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는 인간 생활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사회나 나라나 어느 곳에서도 이 고난과 불행과 비극은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태도는 그 고난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그 고난속에 파 뭍혀있는 보화를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고통의 십자가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아야 합니다. 고통과 고난은 우리들을 견고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조개속에 모래 한 알이 들어가 아픔과 통증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조개는 그 특유의 액체를 내어 모래를 싸고 또 싸서 나중에는 그것이 진주가 됩니다. 고통중에 생겨나는 것이 진주라는 보화입니다. 영롱한 다이아몬드도 수없는 깍임의 아픔을 통과해야지만 만들어 집니다.

동방의 의인이였던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몽땅 빼앗기고 10남매가 죽고 자신의 몸은 문둥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리고 부인도 떠나가 버립니다. 친구들도 그를 구박하면서 힐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신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라고 고백하면서 고통을 이기도 나니 그 고통은 갑절의 축복을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요셉도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급으로 팔리고 보디발 집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13년간이나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러한 아픔 때문에 후에 총리대신이 되어서 고통가운데 있던 자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에게 기자들이 와서 성공한 비결을 물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나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나는 가난하고 무식하므로 하나님께 생명걸고 간절히 기도하다가 지혜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라” 고 하였습니다. 카네기는 가난이라는 고통 때문에 성공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축구선수로서 올림픽 결승전에서 2초전에 25m전방에서 골인을 시켜 미국을 승리하게 한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노만필』이란 이 축구선수는 어렸을 때 소아마비였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하는 마가복음 9장 23절 말씀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빌립보서 4장 13절의 말씀에 사로잡힌 후 그는 “나도 걸을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다가 걷게 되었고, 후에는 “나도 뛸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난 후 그는 뛰게 되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약함과 고난과 실패, 그리고 고통이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운 십자가가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사람의 십자가가 있으며, 우리의 육체를 찌르는 질병의 십자가가 있고, 경제적으로 고통을 주는 경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내가 잘지고 나가게 되면 십자가가 변하여 부활의 영광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라든지, 가정적인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는 문제들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고통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지고 나가시면 언젠가는 우리들에게 부활의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개인에게 있는 십자가를 잘 지고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세베데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님께 와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하소서 할 때 예수님은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수 있느냐”(마20:22)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베데의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은 사명을 확인하고자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는 사명의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1장24절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고백한 것은 사명때문에 와지는 고난을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십자가”를 뜻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라틴어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온 것인데 ‘고문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문대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형벌가운데 가장 참혹한 형벌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고대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어 왔던 사형법입니다. 알렉산더 왕도 그가 점령한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즐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는 드로사람 일천명을 십자가에서 처형을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릴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 상에서 완전한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죄악가운데 있던 우리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고난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은 사랑의 사명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훈련하고자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통하여 유익을 가져왔음을 체험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틴루터는 “고난은 축복을 가져다 주는 지름길이다”, 하턴풍언은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살려고 하는 이는 고통을 보석으로 삼는다” .M.NL.영안은 “고난은 성공의 축대를 쌓는 것과 같다”, 지스레이는 “고난보다 더 중요한 교육은 없다”, 도미트 아스는 “고난을 모르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없다”, M.T.시세로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그 영광도 크다”, 이광수는 “초년 고생은 말년 낙의 근본이라, 네가 자라면 오복이 구비하고 남이 우러러 보는 사람이 되리라”, 에머슨은 “대부분의 생의 고난은 우리 자신이 햇빛에 서 있기 때문에 생긴다”, H.W.비쳐는 “고난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어려움이 우리에게 찾아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써 하나님의 신임의 증거라고 간주해야 한다”

사명자들에게 다가오는 고난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 대가를 치루는 일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이 평안을 얻게 됩니다.

3. 십자가가 있는 자들은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실때에 우편에도 강도가 있었고 좌편에도 강도가 있었습니다. 좌편의 강도는 죄로 인하여 멸망에 처하면서 주를 바라보지 못하였지만, 우편의 강도는 같은 죄의 십자가를 지고 있었지만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며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였습니다.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 프랜시스코는 성당에서 십자가를 보고 큰 은혜를 받아 평생을 십자가만 생각하며 생활하였고 마침내 성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고난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을 향한 구원의 십자가를 잘지게 되면 우리들의 모습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쉼을 얻게 될 것이며, 구원의 반열에 서게 될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지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들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들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다고 하면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며 고난에서 승리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십자가가 여러 성도들에게는 능력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신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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