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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광에 이르는 길 (눅 9: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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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해 들어 가수 유니와 탤런트 정다빈씨의 자살 사건을 접하면서, 몹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아직 20대의 젊은이들이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 특히 이들은 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기에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 우리 중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분이 계신다면, 거꾸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 가 됩니다. ‘살자’ 하면서 크게 웃으십시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단순한 고통이 아닌, 의미있는 고통입니다. 자신의 성숙과 발전을 위한 고통이요, 영광을 가져다 줄 고통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다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을 보면, 인간이 겪는 절망의 세 단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입니다.
이들은 알콜 중독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맨 정신으로 사는 게 괴롭습니다. 술이 깨려하면 마시고, 깨려하면 또 마십니다. 늘 술 취한 상태로 삽니다. 산다는 게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합니다. 그 때, 도대체 산다는 게 뭔지 인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지 않고, 그냥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해 게임이나 도박이나 성적 쾌락에 빠집니다. 더 좋은 옷을 사서 입어보기도 하고,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아보기도 하고, 갈수록 강한 쾌락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속물근성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둘째 단계는,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입니다.
이들은 절망의 원인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절망하는 자신이 싫어서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똑똑한 사람처럼, 거룩한 사람처럼 행동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자신을 보면 한심합니다. 역시 절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셋째 단계는,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사소한 즐거움으로 자신의 절망을 잊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처럼 행동함으로 자신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왜 절망하는지 똑바로 바라봅니다. 무엇이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인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여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사람들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라고 했습니다. 때때로 찾아오는 고통은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몹시 힘듭니다. 하지만, 그 고통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과 그에 따른 절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2. 설날 아침입니다. 즐거운 명절이지만, 어떤 분들에게는 명절이 더 고통스럽습니다. 차라리 명절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부모님을 찾아뵙기 부끄럽고 민망하기 때문입니다.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오지 못하는 자녀들은 다들 딱한 사정이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며느리들의 고통이 심합니다. 그 많은 식구들 세 끼 밥상 차리는 것이 보통 힘들지 않습니다. 명절이 도리어 힘드신 분들은 오늘 예배를 통하여 새 힘을 얻으시고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교회력상 주님의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기도하러 가셨다가 얼굴에서 찬란한 광채가 나고, 옷이 희어져 빛이 나는 광경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기도하신 주님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듯이,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의 마음과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28절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사”
“이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아마 고민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께서 죽으신다니.’ ‘아니, 우리도 선생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한다니.’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예민한 제자들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밥맛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던 중에 변모하신 것입니다. 이 산상 변모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그 다음에 나오는 여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9장51절 이하에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말씀과 죽으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 사이에 오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흐름을 볼 때,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것은 아마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준비 기도하러 가셨을 것입니다. 이 기도시간에 부활의 영광, 하늘나라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빛나게 하셨을까요?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고난의 길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길이 영광의 길이 되는 셈입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가 영광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도다.”(갈6:14)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고난은 영광입니다. 아무나 고난당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감당할 그릇이 되기에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감당치 못할 고난은 주지 않으십니다. 고난을 감당할만한 그릇이 되기에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큰 고난을 당한 그리스도인은 큰 그릇이 될 사람입니다.

  행자부 장관인 박명재 장관은 가난과 질병으로 예수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소년시절에 어머니께서 폐결핵으로 포항도립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장남인 박장관은 집안 살림을 맡아 살아야 했습니다. 눈물로 밥을 지으면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박 장관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의 질병 때문에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가난과 고독 때문에 기도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의 눈물 때문에 약한 자의 눈물을 이해하게 됐다. 2남3녀가 모두 신앙인이 된 것은 역경의 세월이 가져다준 축복이었다.”
어린아이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큰 가난과 고독이 그를 큰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개그맨 마빡이는 단순한 행동을 지치도록 반복적으로 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계속 하다보면 엄청나게 힘들고 지쳐있는데도 웃으면서 계속 ‘마빡이’ 하면서 하는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즐겁게 감당하자는 것입니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데 따른 고통이므로,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런 고통이냐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고생하는 것,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고생함으로 그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설 명절이 되십시오. 그 때,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생,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십자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6:17)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노부모님을 뵙기 위해 5시간씩, 10시간씩 차를 몰고 내려오신 여러분, 여러분의 몸은 몹시 피곤하지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가족을 위해, 동서와 형제들을 위해 내가 좀 더 수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몸에 지닌 예수님의 흔적입니다.
오늘 설날에 다들 집안 일 하느라 힘드시는데, 아침 일찍부터 나와 수고하시는 교회학교 교사를 비롯한 봉사자 여러분들은 참으로 예수님의 흔적을 지닌 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한 고통이었지만, 결국은 부활의 영광,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영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영광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겪고 계시는 고난이 곧 영광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매일 주님께서 지워주신 영광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습니다.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하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사이의 대화의 내용도 앞으로 예수님께서 별세하시어 하늘의 영광 보좌에 앉게 될 것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고난의 길을 겪고 계시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는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그 고난으로 인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 위에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없는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오늘 특별히 고생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하늘의 영광이 여러분 마음 속에 가득차 넘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다같이 힘차게 찬양합시다.
“하늘의 영광 하늘의 영광 나의 맘 속에 차고도 넘쳐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영원히 주를 찬양하리.”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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