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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든 마음이 먼저 고쳐져야 한다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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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

여러분, 명절인 설날은 설날 음식이 있어서 설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주시지만, 오늘 명절 설날을 맞는 주일에 정말 설날 음식과 같은 말씀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새해 설날에 주일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주시는 복있는 말씀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성경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입니다.
베데스다는 예루살렘 동쪽 양문 곁에 있는 조그만 연못인데, 그 연못은 간헐 온천이라 이따금 물이 솟아오르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 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도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그 연못가에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행각 다섯을 지어서 병자들이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거기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전설이 어떻게 생각하면 좀 황당한 것이 사실 말이 안되는 것이 언제 물이 동할지도 모른다는데, 정말 고침을 받아야 될 병자들은 동하는 물에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막상 물이 동하면  제일 먼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물이 동하는지를 보아야 들어갈텐데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이 어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걷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가겠습니까?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틀림없이 이러한 사람들보다 훨씬 건강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아마 무좀에 걸린 사람들이나,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나 근육통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설이 있다 하더라도 베데스다 연못 주변에는 결국은 오랜 기간 동안 고침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많이 있게 마련일 것입나다. 그 중에 제일 정도가 심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언급된 38년 된 병자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38년된 병자와 같이 절망적인 사람들이 대책없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솟아오르면 가장 먼저 물 속에 뛰어 들어가리라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데스다에 가신 예수님께서 아마 가장 중환자였을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 네가 낫고자 하느냐? ” 하고 물으셨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 아닙니까? 물으나마나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38년이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모든 것을 포기할 만한 세월입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낫고자하는 소원이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하여 38년 된 병자는 대답했습니다.
“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 
그는 감히 “낫기 원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낙망한 채 있었던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에 ‘내가 정말 그렇게 나음을 받을 수 있을까?’ 낙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고침을 받을 길이 없다는 깊은 낙심을 주님 앞에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 부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정말 은혜의 삶을 누리고 살려면 우리 마음에 있는 낙심이라는 무서운 병을 고침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 본문의 말씀이 38년이나 병으로 고생하는 특별한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이 어떤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40년 만에 처음 고등학교 동창회에 참석하였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동창회에 갈 때는 흥분했답니다. ‘다들 어떻게 변했을까?’ 그러나 가서 너무 실망했답니다. 나이가 들었고 체중이 늘었고 옷이 바뀌었을 뿐, 한두 시간 지내다 보니 40년 전과 똑같더랍니다. 변한 것이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40년이 지났는데.

여러분은 고등학교 졸업 때와 얼마나 달라진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이것은 고쳐야지, 달라져야 해.’ 하고 깨달은 뒤,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10년 전 일이고, 20년 전 일이고, 30년 전 일이고, 40년 전 일이라도 달라졌습니까? 38년 된 병자가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감동적인 연설로 유명합니다. 그가 한 연설 중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ꡒ나는 내가 바라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되어야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될 수도 있었던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어제의 그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ꡓ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올해는 작년과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 하나 새로워진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문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고 물으십니다. “너는 변화가 일어날 것을 믿느냐?” “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누구나 아멘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저는 변화를 원합니다.” 하지 못하고 “변화되면 좋지요!”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 그러리라고 믿고 기도했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낙망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내 삶의 변화에 대한 기대를 버렸습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실 수 없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 네가 낫고자 하느냐? ”고 물으신 것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므로 자기 삶에 기적이 일어나기를 정말 기대하는 믿음을 일으키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으시다면 묻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변화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우리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모르게 포기하고 있는 것들을 오늘 일으켜야 됩니다. 
기도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기도하는 열정도 믿음도 없다면 낙심 때문입니다. 매사에 모든 사람에게 불평과 원망만 늘었다면 낙심 때문입니다.

낙망이 무섭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낙망하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누가복음 18장1절)

그러면 어떻게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기대를 일으킬 수 있습니까?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던 오른 편 강도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인생이 끝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할만큼 무서운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 상의 한 강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가, 가운데 달려있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용서의 주님, 사랑의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합니다. “ 주님,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
그 때 그 강도는 구원받았습니다. 그의 일생은 100% 실패였습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는 구원의 희망을 토했습니다. 그것으로 그는 구원받았습니다. 완전한 역전입니다. 한평생 죄에서 구원받으려고 도를 닦고 닦은 사람들도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큰 죄를 지어 십자가 형틀에서 죽는 순간 구원받았습니다. 두 사람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조차 구원의 갈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았습니다. 다른 편에 있었던 강도는 십자가에 달릴 때 이미 포기했습니다. 아주 막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도 욕하고 저주하고 그는 이미 마음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옆에 달렸으면서도 그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기대를 잃어버리고 믿음을 놓져버리는 그 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과 내게 주어진 변화에 대하여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낙심스런 환경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 낙심스럽고 아무리 기다려도 변화가 없는데, 어떻게 지금에 와서 변화될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나가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가 제대로 반응하면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와 이 민족에 대한 기대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신과 환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 보시고 ” “ 아셨다 ”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신을 볼 때 그는 낙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얼굴은 어떠했을까요?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께서 “ 네가 낫고자 하느냐? ” 고 물으셨을 때 그는 낙심스런 대답 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38년 된 이 병자는 정말 절망입니다. 이렇게 누워있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는 눈에는 그 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날 물에 들어가고 말 것도 없이 그 날 자기가 누웠던 자리를 둘둘 말아서 가지고 일어나서 가게 되어 잇는 것입니다. 보는 눈이 어떠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 가라”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도 전혀 낙심치 않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신과 가정과 삶의 형편을 보면서 낙심했습니까? ‘나는 도무지 안돼. 기대를 갖고 살아보았지만 얼마나 오랜 기간을 이렇게 지냈는가? 이제는 다 끝났어.’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어떠실까 한번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도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진실을 말합니다. 그가 낙망하신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낙망치 않으신다면 우리가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변화는 이렇게 오고 이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학교에서 김용의 선교사님의 일화 하나가 참 귀해서 여러분에게 옮겨드리기 원합니다. 한 번은 선교사 모임에 말씀을 전하러 갔었답니다. 하루 먼저 도착하여 다음날 말씀을 준비하고 있는데, 수련회에 참석하신 선교사님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답니다. 그 대화를 듣다가 너무 낙심을 했답니다.ꡒ이제는 너무 지쳤어요.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아요. 이제는 은혜 받는 것이 무서워요…ꡓ은혜를 사모하는 가운데 말씀을 전해도 쉽지 않은데, 저렇게 낙심한 선교사님들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나? 싶어 잠이 오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그 때 갑자기 깨달아진 것이 있었답니다. 이것이ꡐ누구 편에서의 문제인가?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람 편에서의 문제임이 깨달아졌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깨달아지는 것이ꡐ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의 하나님이지ꡑ라는 것이었답니다. 하나님께서 만일ꡒ00야, 내가 너를 사랑하려고 많이 애를 썼단다. 그런데 이제는 너를 보면 무섭다.ꡓ이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솔직히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만한 가능성이야 너무나 많지 않은가? 만약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주님이 나를 보시고ꡒ이제는 지쳤다. 더 이상 아무 느낌이 없어. 느껴지지 않는다.ꡓ고 말씀하신다면 어떠하겠는가? 주님이 지치실 가능성이나 포기하실 가능성이 단 1 %만이라도 있다면 복음은 끝장인 것이다. 지금은 괜찮아도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다면 역시 끝장인 것이다. 주님은 언제까지나, 어떤 처지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이 다르신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낙심에 빠질 때가 많은데,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은 낙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 증거입니다. 성령을 보내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팀 한셀이란 유명한 교육자가 10만에 만난 성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10년 전에도 참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10년 만에 만났을 때 놀라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충만했고 기쁨과 확신에 넘쳐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 줄 수 있겠니?" "예, 로마서를 다시 읽고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과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셨음을 깨달은 후 부터야." "그것은 전에도 마찬가지였잖아?" "맞아, 난 죄인이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었어. 그러나 전에는 내가 크리스천이 되었으니 더 이상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늘 생각했었어.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면, 며칠 동안 나 자신을 저주하고는 했지. 그런데  로마서를 읽고 두 가지 중대한 것을 분명히 깨달았어. ‘나는 내가 죄인이고, 또 앞으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어. 나는 언제나 이기적이고 죄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 그 후부터 내가 죄를 범해도 숨기거나 좌절하지 않게 되었어. 죄책감으로 나를 쥐어뜯는 일은 하지 않지.ꡓ
  오래 전에 로렌스 형제가, 당신은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받았다고 해. 그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 그는 ‘나는 그저 하나님께 고백하고 나서 계속 살지요‘라고 말했대. 음---그게 바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거지. 그러나 두 번째 깨달은 것은 더 놀라운 거야. 그것은 내가 만일 어떤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야. 내게 좋은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난 그것이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어.
  그 후부터 나는 나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 가를 지켜보는 재미로 살고 있어. 나는 그저 그 분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고 놀라고 기대하는 것 뿐이야.ꡓ전에는 나는 나의 죄성을 바라보며 낙심에 빠져 살았어. 그러나 이제는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제는 난 항상 내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보고 있어. 이것은 일시적 감정이 아니야. 정말 생생한 사실이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건이야.”
  내 친구는 변화되었다.ꡐ나쁜 사람ꡑ으로부터ꡐ좋은 사람ꡑ으로가 아니라, 좋은 사람ꡑ으로부터ꡐ놀라운 사람ꡑ으로 말이다. 그녀는 전에도 성실하고 도덕적인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복음의 진리와 성령님에 대하여 깨닫고 난 다음 그 삶은 불이 있는 사람, 불을 붙이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주위에 성실하고 품위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속으로는 죄책감과 염려로 가득찬 그릇되고 우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변할 수 있습니다. 깜박거리는 촛불 같은 삶이 아니라 화려한 불꽃이 타오르는 신앙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변화의 가능성은 예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지난 주간 탈북 청소년 DTS가 열렸습니다. 탈북 청소년들은 좀처럼 눈물을 보이는 법이 없답니다. 예수님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특히 북한에서의 이야기, 중국에서의 이야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말하려 하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5주간의 DTS 마지막 주간이었던 지난 주간, 탈북 청소년들의 마음이 열렸답니다. 고백이 터지고 눈물이 터지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였답니다. 그들의 끔찍했던 지난 과거를 들으며 섬기는 이들도 다 울었답니다. 한 학생은 탈북 과정에서 부모가 죽는 것을 보았고 한 청년은 중국에서 공부시켜 달라고 조르는 자기를 위하여 아버지가 중국인 농장에서 일하다가 공안에게 붙들려 북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보기만 해야 했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식당에서 이쑤시개 뭉치로 강도 짓을 했던 청년의 고백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다 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수료 예배 때, 한 자매가 간증을 했습니다. DTS를 시작할 때 자기 삶은 너무 힘들었답니다.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데 ‘아, 힘들다’는 생각만 했답니다. 그 때 DTS에서 배운 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더랍니다. ‘힘드니? 많이 힘드니?’ 하나님께서 물으시더랍니다. ”예, 힘들어요.“ 했더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모두 다 그래.’ 하시더랍니다. 그러면서 ‘사람마다 형편은 다 다르지만 힘든 것 자체는 다 같은 거야. 모두 다 그렇단다.’ 그래서 자기만 힘든 것이 아님을 알았답니다. 그러면서 같은 탈북 청소년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부모님이 보고 싶지요? 형제들이 보고 싶지요? 여러분,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것이 많지요?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용기를 잃지 말라고 하시더랍니다. 자신은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답니다. 한국에서 적응하기도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롭고, 자꾸 죄짓고. 그래서 자기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더랍니다. ‘DTS 섬기시는 미국 선교사님이나 목사님이나 선생님이나 너나 나는 다 똑같이 사랑한다. 때가 다를 뿐이다. 쓰임받는 시기만 다를 뿐이다.‘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너무나 기뻤답니다. 정말 놀라운 간증이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임이 분명하였으니까요!

  우리는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능력있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먼저 치유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러면 자신과 환경을 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기대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에 대해서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 인생은 소망이 있습니다. 반드시 38년 된 병자가 자기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기적이 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여러분을 그렇게 일으키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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