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눔과 소박한 경제생활을 위하여 (마 6:11-13; 출 16:1-5)

  • 잡초 잡초
  • 228
  • 0

첨부 1



그 동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배웠습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두 가지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두 가지가 따로 놀면 우리는 일관성 있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의 본 뜻을 왜곡시키게 됩니다. 사실 교회사와 한국교회를 돌아보면 그런 우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자신을 위한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버지를 위한 기도와 연결시켜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버지를 위한 기도에서 주제어를 굳이 뽑자면 나라를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 전체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우리들 자신을 위한 기도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더욱 깊게 드러나게 됩니다. 즉 우리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들이 하나님나라의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런 관점에서 첫 번째 주제로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할 양식 즉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는 일용할 양식을 모두에게 공급해주는 나라

이 기도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지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담겨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한 측면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사람은 제일 먼저 매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이 공급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오늘 우리에게 필요할 양식'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태복음 본문의 문맥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끝난 다음, 용서(6:14-15)와 금식 문제(6:16-19)를 다룹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맘몬과 일상적 필요 즉 먹거리와 옷을 주제를 다룹니다(6:20-34). 핵심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그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줄 테니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용할 양식은 매일 필요한 먹거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다니던 선교단체의 QT교재 제목이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물론 그 제목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충분히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육적 먹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에 주목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배고픈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사건은 모든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14:32-21, 막 6:30-44; 눅 9:11-17; 요 6:1-13). 물론 요한의 경우 무리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만 얻으려하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쓸 것을 권면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증언합니다(요 6:26b-27a).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육적 양식과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은 무리들이 육적 양식에만 사로 잡혀 영적 양식에 대한 갈망을 상실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시기 전 오랫동안 무리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주제를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기록합니다(눅 9:11).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병을 고쳐주시는 사역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어쫓는 일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28; 눅 11:20)'. 세례요한이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인가에 대하여 의문이 생겨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냈을 때, 마침 예수님은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 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주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눅 7:22):

가서, 너희가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 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여기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신학자들은 문맥상 가난한 사람은 마 5:3과는 달리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정치·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고 보는데 일치합니다. 그들에게 들려지는 복음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이 돈이 없어서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일상의 필요들을 공급해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출 16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해방된 지 얼마 안되어 광야에서 양식이 떨어져 어려움에 봉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차라리 애굽 땅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먹다가 죽는 편이 훨씬 더 좋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합니다. 왜 우리를 애꿎게 광야까지 끌고 나와 굶어 죽게 만드냐고 아우성을 칩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아침에는 만나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매일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둬들이게 하셨습니다. 많이 거두어들인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두어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함께 모아 다시 골고루 나누니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먹다가 남는 것이 있으면 다음 날을 위해 저장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사는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6일 째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거둬들여 안식일에는 쉬게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집착하다 하나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식으로 양식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들의 뇌리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져주시는 분이란 점이 깊이 각인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은 좀더 일상적인 방법을 통해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즉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열심히 경제활동을 하고 정의로운 경제제도가 확립되어 누구도 굶는 사람이 없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정의롭고 평화로운 경제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사 55:1-2 (1) 너희 모든 목마른 사람들아, 어서 물로 나오너라. 돈이 없는 사람도 오너라. 너희는 와서 사서 먹되,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지불하지 말고 포도주와 젖을 사거라. (2)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세상 나라에선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은 돈은 돈대로 내고 수고는 수고대로 하면서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억울한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돈 없고 힘없어도 포도주와 젖을 먹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34장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은 배불리 먹으면서 양은 굶기는 이스라엘의 못된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십니다(겔 34:3-4). 이어서 참 목자 하나님과 메시아의 할 일을 선포하십니다;

겔 34:11-15 (11)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12)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13)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그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여러 시냇가와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겔 34:23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그가 친히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는 사건을 자세히 기록함으로 그 분이 바로 에스겔서에 약속된 목자요 메시아이심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보다 오히려 더 영적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영의 양식을 무리들에게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임무는 충분히 완수되었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육의 양식이야 각자가 주머니 사정에 따라 알아서 해결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여 그들을 이제 돌려보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짜고짜로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몹시 당혹스러운 듯 예수님께 퉁명스럽게 답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빵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다가 그들에게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들은 척 만 척 그들에게 무리 가운데 빵이 얼마나 있는가 알아보게 하신 다음, 수거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고 떼어서 무리를 먹이십니다. 그 과정에 제자들을 확실하게 동참시키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무리들을 50 명 혹은 100 명 씩 나누어 푸른 잔디에 앉게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건네주시는 빵과 물고기를 각 그룹에 나눠주는 일을 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걸렸겠죠. 그 긴 시간동안 그들은 예수님이 무리들을 먹이는 것을 정말로 중요시 여기는 분임을 마음에 깊이 새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모습에 나타납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롭게 형성된 신앙공동체는 함께 먹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겼습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일 뿐 아니라 집으로 흩어져 빵을 떼면서 순수하고 기쁘게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굶주리거나 헐벗은 사람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행 2:42-47). 그 사역을 영적으로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그 일을 감당할 사람으로 성령과 지혜 그리고 믿음이 충만한 사람을 세웠습니다(행 6:1-7).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범위는 어떻게 잡아야할까요? 일차적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믿고 아는 그의 자녀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의 형상을 닮고 창조된 모든 인간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사람 그리고 이방인에게도 햇볕과 비를 내려주셔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해 먹을 거리를 공급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마 5:45; 행 14:16-17).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어 받아 일용할 양식이 그리스도인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갈 6:10) 그런데 이런 기도가 경제총량으로 따져서 세계 10위 권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2. 감사하고 의존하는 삶을 살라는 뜻

첫째, 우리 모두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는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에게 의존적인 존재임을 인식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먹거리와 입을 것을 책임주실 거라고 곧 말씀하실 거면서(마 6:25-34) 왜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 걸까요? 부모와 아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맛있는 간식을 줄 거면서 손을 내밀고 '주세요'라고 말하도록 시킵니다. 간식을 먹여 주는 과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모르긴 몰라도 적지 않은 분들이 어떻게 하면 적게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풍요가운데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기 않게 된 데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날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 모두 여전히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임을 날마다 새롭게 인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럴 때 매일의 식사시간은 아버지와 좀더 가까워지는 축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3. 나눔의 삶을 살라는 뜻

둘째,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양식이 주어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제임스 멀홀랜드는 『예수님처럼 기도하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질적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여야 하는 책임을 떠맡겠다는 약속이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일용할 양식을 얻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제 작년과 작년 말에 독거노인들에게 쌀부대를 나눠주셨던 분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겁니다. 그 어르신들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를! 심지어 우리 명단에 없던 분까지 한 부대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하셔서 난감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구촌으로 범위를 넓혀보면 5초에 2명, 1분에 24 명(이중에 18명은 어린이) 하루에 35000 명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성 바실리우스의 명언을 마음에 깊이 새길 만 합니다:

여러분의 집에서 썩고 있는 그 빵은 굶주린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침대 아래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그 신발은 신발 없는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옷장에 쌓여 있는 그 옷은 헐벗은 이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금고에서 값이 떨어지고 있는 그 돈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4. 소박한 삶을 살라는 뜻

마지막으로 매일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엔 소박한 삶을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필요 이상의 사치품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금욕주의를 우리에게 심어주시려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나혼인잔치 하객으로 참여하셔 물을 포도주로 바꿔주심으로 그날만큼은 마음껏 마시며 하나님이 축복하신 결혼의 기쁨을 만끽하도록 하셨습니다(요 2:1-10). 얼마나 자주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는지 '먹보요 술꾼'이라는 별명까지 얻으셨습니다(눅 7:34). 그럼에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 하심은 여전히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나누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소박한 삶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지구촌의 가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의로운 방법으로 부를 창출해낼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부의 창출에 성공했다고 해도 자신을 위해선 소박한 삶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딤전 6:6-10). 누가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만 이해하면서 막상 풍요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의 경제적 측면을 이해하면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후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난에 처할 줄도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빌 4:11-13). 가난해도 낙심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이웃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때론 가나혼인잔치의 경우처럼 풍부한 삶을 즐길 줄도 압니다. 하지만 풍부에 매몰되지 않고 곧 바로 소박한 삶으로 돌아갑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