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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근 동산으로 오라 (아 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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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해설

이 아가서는 솔로몬이 쓴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 역사적으로 성경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책입니다. 그 이유들 중 하나는 거룩한 책이 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나 외설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만약 교회에 이 아가서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싶으셨던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 한 가지가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가서를 깊이 연구하다 보면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은밀한 삶의 신비를 발견하게 하는 진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솔로몬이 아가서를 썼을 때는 이방여인들과의 연혼(連婚)으로 인해 그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렸던 때가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전성기 시절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는 실제로 사랑에 빠져 본 경험이 있었던 사람으로서 여인과의 사랑의 경험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체험을 대비해서 신앙의 진리를 풀어갑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주 깊은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거기서 받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의 느낌은 이 세상살이에서 일어나는 다른 어떤 경험과도 비교하여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여인과 주고받은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경험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사랑이다: 그 독점적 관계

오늘 솔로몬이 묘사하고 있는 이 아름다운 사랑은 개인적으로 보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자면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깊어진다는 사실을 제외해 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 주기도 쉽지는 않지만, 그 사랑을 바르게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교만하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처럼 낮아지는 삶, 거룩한 하나님 앞에 더더욱 살기를 그리워하는 삶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 사랑의 관계를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12절).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는 바는 무엇일까요?

참된 의미의 신앙은 인격적인 신앙이고,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조화를 이룬 신앙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바로 아는 지식과 그분에 대한 우정 어린 사랑의 경험과 그 사랑을 삶으로 고백하고자 하는 의지적 실천이 조화를 이룬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삶을 위해서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또 다른 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영성’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난 신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영적 교제가 시작됩니다. 기도와 말씀 안에서 그 교제가 풍성해져 갈수록 그분의 생각과 마음들이 우리 속에 전달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공급해주는 이 사랑의 교제에 대해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중요한 진리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사랑의 관계는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독점적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정한 영적 생활이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참된 열매를 맺는 풍성한 영적 삶을 위해서는 내면의 세계가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점령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다른 사랑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성격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단둘이 있는 것이 아니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며,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모두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은 상대방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연애 경험을 하나님 사랑을 설명하는 소재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기대하는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듯이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잠근 동산”이라는 표현은 동산으로 들어가는 울타리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덮은 우물, 봉한 샘”이라는 말은 그 안에 위치한 우물은 아무에게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주인 외에는 쉽게 열려질 수도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동산의 묘사를 통해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가 이중 삼중으로 보호 장치가 되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신자만의 배타적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사랑 없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감격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순결은 경건의 보금자리

아무에게나 결코 열려질 수 없는 이것들을 주인은 아주 쉽게 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동산도, 우물도, 샘도 주인의 손길을 고대하고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동산에서 홀로 감미롭게 누리던 산책이 끝나면 동산도 닫히고, 우물도 나뭇잎으로 덮이며, 샘도 봉해집니다. 그리고 주인이 다시 찾아와 줄 그날을 위해 배타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기다립니다. 이것이 바로 ‘순결’입니다. 순결은 단지 도덕적으로만 깨끗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점령당해야 할 오직 한 사람에게만 점령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순결은 이처럼 그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지배당하기를 즐거워하고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접근을 거절하는 배타적인 사랑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경건’이라 부르며, 이 경건은 순결 안에 깃드는 영성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십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희랍어로 “청결한 자”라는 말은 “물 같은 것으로 씻겨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인가에 의해 마음이 씻겨진 사람들이 복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불결하다 하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씻겨 주실 때 우리는 깨끗하고 순결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홀로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점령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만 마음을 바치고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자 하는 이 세상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타적인 마음을 가지게 하심으로 순결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잠근 동산, 덮인 우물, 봉한 샘과 같습니까? 우리의 신앙의 순결을 빼앗기 위해 정욕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다가오는 무례한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이 있습니까? 잠근 동산에 “딸깍”하고 주인이 문을 여는 소리를 들은 신부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은 채 누군가에게만 맑은 물을 마시게 하기 위해 정결함을 유지하던 그 우물은 자기 위의 낙엽이 치워지고 뚜껑이 열리는 순간 얼마나 황홀했을까요? 수많은 시간을 오직 한 사람만을 기다려 왔기에, 주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열리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기에 그의 기쁨은 더더욱 컸을 것입니다.

네 마음을 지키라

죄와 어두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매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보다 더 큰 사랑과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령한 은혜의 빛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우리 자신의 무지와 마음의 더러움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하거나 매우 분명한 그분의 음성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허공을 맴돌다 다시 땅에 떨어지는 낙엽 같고, 진실한 우리 마음도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에 의해 점령되는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의 순결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의 교통은 오직 순결한 영혼에게 주어집니다. 감미로운 하나님의 음성과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도 오직 정결한 마음 위에 내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만이 더불어 누리시는 독점적인 사랑의 관계가 아니면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는 야비한 사람들에게 마구 짓밟히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천박한 여인처럼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크고 넓다는 생각 하나만을 붙들고 방종하게 마음을 방탕에 흐르도록 버려 둘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께만 바쳐진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바쳐졌기에 그분께서는 우리들도 이렇게 사랑과 순결로 하나님께만 바쳐진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순결한 삶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식대로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우리는 그분의 마음의 전부였습니다.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신 것도 우리를 향한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가 가까워졌을 때 하신 일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향한 그 사랑이 너무나 독점적이고 배타적이었기에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분의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교회의 신랑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완전한 사랑과 거룩한 은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더 풍성한 깨달음 없이는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되 더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 속으로 데려가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완전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정결하고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세상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그 세상을 사랑하는 관계를 잃어버리고 나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랑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온전히 소유하고 나면 거기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있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고 참된 기쁨은 거짓된 쾌락에 탐닉하고 싶은 마음을 몰아냅니다. 온전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대치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신 거룩한 뜻들을 성취하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 계획들을 드러내며 불꽃처럼 사는 것은 사랑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의 힘으로만 순결하게 살 수 있고, 부패한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절을 잃은 여인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하던 옛 조상들의 시대를 알고 있습니다. 죄악되고 불결한 세상 사람들이 한번 순결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쉽게 매장하고 다시 돌아보지 않는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서로의 순결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순결을 잃어버린 자들을 용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 순결을 잃었던 신자들을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언제나 주님을 사랑함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소문난 죄인도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황무지와 같이 짓밟힌 정원에도 꽃은 피고 불결과 죄악으로 유린당한 동산도 그분만을 위한 비원(秘苑)이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제시하는 마땅한 영적 회복의 과정을 거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고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 희망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순결하게 만드십니다. 당신을 저버린 인간들에 대한 가슴 아픈 사랑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 체험의 요체는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만지고 가신 하나님의 손길을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은 신자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은 희미하거나 불확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존재가 감지할 수 있는 확실하고 진실한 것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한 분께 드릴 사랑

신자에게 있어서 순결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그분의 신부 된 우리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법으로 강요된 의무가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깊이 경험함으로 우리 마음에 아로새겨진 우리가 즐거워하는 의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긴 세월 동안 당신만을 품에 품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주신 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완전히 끝까지 사랑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의 전부였던 것처럼 당신도 우리 마음의 전부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패역한 땅의 사면을 두루 살피시면서 이렇게 순결한 마음, 그리스도께 점령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에게 보다 더 완전한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열매 맺는 삶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외형은 매우 분주한데 내면의 세계는 왜 그리 공허한 상태를 면하기 어려운지를 아십니까? 이어지는 말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여러 가지 과실과 나무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13,14절).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당신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면서 열매 맺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 15:8). 예수님의 이 교훈을 생각하며 본 구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치 열매 맺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삶을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실제로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위해서는 신자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신령한 사랑의 관계가 실제로 있어야 합니다. “네게서 나는 것은···”, 즉 “그 동산에서 나는 것은···”이라고 솔로몬이 말할 때, 그 동산은 오직 한 사람 이외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정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잠근 동산과 아름다운 열매가 깊은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줍니다.

지금의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반쪽자리 복음을 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믿는 즉시 천당,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소위 “신앙주의(believism)”가 판을 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경은 즉각적인 구원과 함께 점진적인 구원, 곧 성화의 구원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성화의 구원을 무시한 영혼의 즉각적인 구원만을 생각하는 것은 성경으로서는 생소한 것입니다. 조국교회의 영적 삶이 이처럼 피폐해져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의 진보는 신령한 생활과 도덕적인 삶의 진보를 가져다줍니다. 또한 거기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신자들에게 이러한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 윤리 운동이 거룩의 추구를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나누는 거룩하고 생명적인 사랑의 교제를 통해 이러한 열매 맺는 일은 가능해집니다. 조국교회가 신자들의 영혼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들이 내면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와 얼마나 풍성한 영적 사귐을 누리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러한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는다면, 이 소망 없는 세상을 향해 훨씬 더 건강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사귐도 없이 교회당을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그럴 듯해 보이는 열매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삶 속에 맺는 사람들은 남이 알지 못하는 주님과의 비밀스러운 교제의 세계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열매와 진기한 수목들이 모두 잠근 동산에서 자라났듯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이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진실입니다. 그것이 인격의 열매든지 섬김의 열매든지 모두 주님과의 은밀한 교제의 세계 속에서 받는 거룩한 감화를 통해 맺힐 때, 그 열매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제의 상실에서 오는 공허한 마음을 쉴 새 없이 계속되는 프로그램과 행사로 대신하는 교회와 신자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체계적인 프로그램과 행사를 통한 교육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정직하고 풍성한 진리를 통하여 신자들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먼저 성찰하도록 만들어 주고, 삶의 문제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해답을 찾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에이든 토저(A. W. Tozer)의 지적과 같이 자기를 성찰하고 깨달음으로써 내면의 세계에서 더욱 주님과 하나 되도록 만들어 주기 위하여 충분한 시간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의 비밀은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의 비밀이며, 이러한 관계없이 단지 삶의 열매만을 맺고자 하는 것은 종교적인 성취를 위한 노예적인 삶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사람들이 열매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몰두할 때는 참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불러 주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즐기면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주시는 그분의 은혜로운 역사를 봅니다. 만일 우리에게 열매가 거의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매우 적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없이 많은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실패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열매를 맺어 가는 기쁨이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공허한 신앙생활을 주님 앞에서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정말 배타적으로 그분만을 사랑하는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골방의 문을 닫으라

우리가 이렇듯 마음을 드리는 삶을 살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시던 주님의 교훈이 생각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우리의 골방 문이 열려 있어 세상일에 대한 근심과 유혹과 쾌락,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제를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교회를 섬기든지 하나님 사랑만이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순결을 유지하며 사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희열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시련이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기쁨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당부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CS(Customer Satisfaction)교육에서 이야기 하는 그러한 웃음이 아닙니다. 기쁨의 원천을 회복하라는 말입니다.

신자들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인격과 삶의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게 하는 거룩한 감화의 원천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 기쁨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열매로 더욱 사랑 받는다

오늘 이 동산에 맺은 아름다운 과수의 수많은 열매들은 주인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되었지만, 그 열매들은 또한 동산에 대한 주인의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솔로몬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혼인 예복을 입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다가가고 있을 때 신부가 인격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점점 더 많이 맺어 가고 있다면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얼굴이나 몸매만 고울 뿐 아니라 삶의 열매, 좋은 인격의 열매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면 이 여인을 향한 솔로몬의 사랑은 단지 육체에만 매혹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도 곧 지나가고 고운 몸매도 이내 사라지지만 열매는 그치지 않습니다. 누가 그 생명의 하는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은 이 동산에서 나는 아름다운 과목으로 인해 더욱 더 이 동산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해 주셔서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우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도 너무나 소중하지만,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더 많은 열매들을 맺어 간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많은 기쁨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맺는 말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어서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통해 모든 아름다운 것은 비밀 속에서 자라 간다는 것을 배웁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기도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복음 전도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고통을 뛰어넘고 실패와 낙심으로 황폐하게 된 삶을 성공과 낙원으로 바꾼 놀라운 신앙의 경험을 가진 이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새롭게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삶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도록 애써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온 마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독점되도록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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