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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 : 에덴을 다시 찾기 (창 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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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 에덴을 다시 찾기
(창세기 2장 8절~17절)

우리는 지금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인가 잘못된 비극을 느끼며 살고 있다. 인기 탤런트가 연이어 자살을 하여 자살이 삶의 시위처럼 느껴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아니 하루에 30명씩 자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사는 것이 괴로워서 죽는 것을 사는 것보다 쉽게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자살을 못하고 타살로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는 가인의 후예는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나라의 범죄 시계 수치는 이렇다.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에 해당하는 범죄 시계는 98년도에는 1분 30초마다 1건이 일어났고 99년도에는 1분 22초마다 1건이 일어났다. 21세기인 2000년도에는 1분 1초당 1건이 일어났다. 얼마나 이 시대가 뒤죽박죽, 죽이고 속이고 빼앗기고 피 흘리는 시대인지를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의도였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그 중의 에덴은 낙원이었다. 70인역에서는 에덴 동산을「파라데이소스 엔 에덴」이라 하였다.

에덴은 왜 낙원인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움직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많은 것을 다스리며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지으며 만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에덴은 왜 낙원인가? 바로 에덴은 조화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 조화의 세계가 보여준 낙원의 가치는 엄청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처럼 적대감, 수치감, 열등감이 없었다. 정말 낙원이었다. 이 시대는 잃어버린 에덴의 가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에덴에는 아름다운 나무, 먹기에 좋은 나무와 함께 강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강은 에덴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적시는 근원이 되었다. 그 강의 이름은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강으로 불리우는데 네 강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온 땅을 적셨다.

창2:11 “온 땅에 둘렀으며”란 말은 온 땅을 돌아서 흘렀다는 말이니 모든 땅을 적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모든 생명이 살아가는 근원이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한다는 것은 에덴없이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는 뜻과도 같다. 네 개의 강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1. 비숀 강이다.

「비숀」이란 말의 뜻은 ‘넘쳐 흐른다’는 것이다. 즉 금과 같은 축복이 넘침을 말한다. 에덴은 가난이나 의식주 문제의 고통이 없다. 넘쳐 흐르는 비숀이 금이 있는 하윌라 온땅을 적신다. 그래서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진주)도 있고 호마노 보석도 있다. 에덴의 토지는 가장 값진 부요가 넘쳐 흐르는 곳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정금과 진주의 보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2. 기혼 강이다.

이 강은 비옥을 뜻하고「유출」이란 뜻이다. 강의 물이 유출되어 흐를 때 땅 속으로 물이 공급되어 먼지가 날리는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이는 은혜 중의 은혜다. 그러니까 에덴에는 은혜가 넘치고 넘쳤다. 부어주시는 은혜의 강이 사람이 살아야 할 동산에 흐르고 있었다.

3. 힛데겔 강이다.

앗수르 동편에 흐르는 이 강의 이름은「결실」이란 뜻이다.「신속」이란 뜻이다. 무엇인가를 소망하면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것, 이것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 농부가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결실을 거두는 삶은 사는 것! 이는 축복의 삶이다.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황충의 떼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힛데겔의 축복! 이것이 에덴 동산의 삶이다.

4. 유브라데 강이다.

에덴의 네 번째 강인 유브라데는「강」이라는 뜻이다. 인생은 부드러워야 한다. 쓰디쓴 육모초같은 인생이 아니라 아름답고 달고 부드러운 맛이 있어야 한다. 감미로운 강이 흘러넘치는 에덴은 따사로운 햇볕같고 잔잔하게 불어오는 가을 바람같은 낙원이었다.

감미로운 그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정원이었다. 잘 가꾸고 다스리면서 살면 되는 우주의 대저택이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대로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되 단 하나의 나무, 선악의 나무만 건드리지 않으면 낙원에 거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만드신 이가 동산을 내어주면서 “다 마음대로 해라. 단 내가 정녕 죽으리라는 표시를 해 둔 것은 먹지 말라.” 이것만 순종하면 에덴의 나의 것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을 해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대한 순종 생활만 유지하면 낙원은 계속 유지되었다. 하나님과의 조화, 사람과의 조화, 사람과 자연과의 조화, 나와 나 자신과의 조화가 유지되는 행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 희미하지만 이것이 에덴의 그림이다. 에덴 동산의 청사진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다. 그 에덴에서 누리는 넘쳐 흐르는 네 가지의 강의 물질 축복, 은혜의 축복, 응답의 축복, 감미로운 축복을 잃어버렸다. 온갖 쓰디 쓴 것뿐이다.

왜, 이런 세상이 되었는가? 그 이유는 죄 때문이다.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으로 택한 죄 때문이다. 죄가 가지고 온 결과이기에 인간은 에덴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죄는 사망의 독이다. 죄와 사망으로 인해 행복한 인생은 불행하게 되었다. 가슴 속에 조화가 깨지고 불안이 깃들여졌다. 에덴에서 쫓겨나고 아담과 하와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고 땅은 저주를 받았다. 사람에게 넣어준 영이 죽었으므로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영이 죽고 장차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믿고 사는 인간은 마음에 깃든 불안을 해소하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더 많이 가져야 불안하지 않은 것 같아서 더 큰 명예, 더 큰 물질, 더 큰 인기, 더 큰 힘을 구하게 되었다.

하나님 대신 우상을 구하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깃든 자아마저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지, 정, 의로 이루어진 자아는 오늘 우리들의 내면에 있는 온통 열등감, 적대감, 수치심, 우월감, 비난, 공격, 시기, 질투로 가득한 병든 자아가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인간의 마음을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볼 때 못마땅하고 너를 봐도 못마땅하고 순간 좋다가도 “I am not OK. You are not OK”가 되어 버린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해복하게 살 것을 의도하신 하나님, “I am OK, You are OK.”의 삶을 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뱀의 유혹에 순종해버린 사망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너무도 아파하신다.

하나님은 따뜻하게, 친절하게 에덴을 누리는 법을 말씀하셨다. 잘 될 것과 못 될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그것을 외면한 인생은 모든 것이 깨져버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키려고 하나님 편에서 해결책을 만드신다. 관계가 깨어진 아담을 향해 하나님 편에서 다가가셨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로 수치를 가리우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와 불의함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이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에덴을 다시 회복하는 길은 어린양이 되어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신 것을 믿으면 나는 가죽옷을 입히운 아담처럼 내 죄의 수치가 다 가리워지고 주님의 의로써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이것을 예언한 이사야는 사61:10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회복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복은 화목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회복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음을 알고 하나님과 원수된 나를 위해(롬5:10)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눅4:19) 여기서 은혜의 해란 처음 상태로 모든 것을 되돌리는 해를 말한다. 50년이 되면 토지를 빌려 쓰는 것, 토지를 남에게 빼앗겼던 것을 다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잃어버린 에덴의 동산을 다시 되찾아 주려고 오셨다. 우리가 죄 때문에 고통 받아서 에덴을 잃어버려 가난하고 우리가 포로가 되고 눈 멀고, 눌린 자가 되어 신음하며 사는 문제에서 부요케 되고 보게 되고 자유가 되게 하시려 회복의 주님으로 오셨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사람과의 관계 회복을 하고 나를 회복시키는 예수님, 나를 찾고 에덴을 찾아주시는 이는 예수님이다. 그분을 믿으면 개인적으로 사단의 종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고 에덴 동산을 회복하게 도니다. 내 죄로 저주받은 내가 이제 의로써 복을 받는 건강한 자아가 된다.

그러고 보면 신앙 생활이란 예수를 영접하느냐는 것을 시작한다. 영접이란 믿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믿고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회복의 방법을 믿고 따르는 순종하는 생활,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이다.

새 차를 사면 지침서가 나온다. “엔진 오일을 정기적으로 교환하세요.” 이것은 우리를 귀찮게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빼앗아 가는 일이 아니다. 자동차의 전부를 잘 누리게 하려고 한 것이다. 일전에 청년들이 교회 봉고차를 끌고 안양에 갔다오다가 자동차에 이상이 생겨 엔진 오일 넣는 곳에 물을 넣었다. 차는 굴러갔지만 지침을 어겼기에 엔진이 망가져서 수리하였다.

다 다스려라. 지켜라. 임의로 먹으라. 에덴의 복은 모두 아담의 것이었다. 단 그 축복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하는 지침서는 지켜야 했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 먹으면 죽으리라. 에덴의 모든 복을 계속 누리게 하려고 하나님은 죽게 되는 지침서도 공개하여 주셨다. 100가지는 맘대로 하고 단 하나 그것만 순종하면 되었다. 얼마나 자세하고 친절한가? 한 가지의 지침만 따르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순종만 하면 행복이 보장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 언약을 지키는 순종이 요구되듯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이란 약속의 언약을 순종하면 우리는 모두 에덴을 찾게 된다. 그리고 본래의 건강한 나로 회복하게 된다. 예수가 나의 죄와 불행한 죄과를 다 짊어지시고 죽으셨고 다시 부활하신 십자가 나무를 믿으면 살게 된다. 회복이 된다. 그 회복의 시작을 경험하라.

해답과 회복의 길이 여기에 있다. 언약에 대해 오직 순종하는 일이다. 십자가의 언약! 믿으면 구원을 받는 이 놀라운 일을 순종하라. 그러면 우리는 회복의 문으로 들어가 에덴의 강에 목욕하며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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