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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고함 (마 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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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들이 성령 충만에 대해서 오해하는 생각이 하나 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보너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령 충만, 성령 충만한 삶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더 좋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예외로 하나 더 얹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만 있으면 좋은 어떤 것’이 아니다. 만약 성령 충만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라면 성경은 그렇게 많이 성령의 충만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에 성경은 성령의 충만으로 가득 차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 분의 전체 계획상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당신을 위한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 충만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 충만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전체 계획임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 충만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포함되어 있는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들의 영적 전쟁의 상대인 사탄이 기독교의 모든 진리에 대해서 대적한다면 성령 충만한 교리에도 대적할 것이 분명하다. 사탄은 성령 충만에 대한 교리에 혼선이 빚어지도록 만든다. 사탄은 성령 충만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키고 그것에 관한 잘못된 교리를 퍼뜨린다. 사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이 영적인 기업인 성령 충만한 삶을 성부 하나님께 받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성령님이라고 하면 왠지 섬뜩하고 기괴하여 나는 그런 것에 빠지고 싶지 않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님에게는 이상하고 기괴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그런 것이 없다. 성령님에 대해 이런 편견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탄의 전략이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삶이 이상하고 기괴한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사탄에게 속지 마라. 성령님에게는 사람 마음의 정상적인 작용에 역행하는 그 무엇도 없으시다. 그 분은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다. 그 분은 예수님과 똑같은 분이시다. 그 분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시다.
  사복음서를 읽어보라. 복음서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한가? 예수님은 차분하고 순수하고 온유하고 자연스럽고 사랑스럽고 친절하고 소박하신 분이시다. 성령님도 그런 분이시다.

자, 여기까지 정리가 되었는가? 성령님은 기괴한 어떤 경험이 아니며,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가까이 하고 다가 가야할 그런 분이시다. 성령 충만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데 있으면 더 좋은 금상첨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한 나를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선하신 그 분의 전체의 계획이다.

2. 그렇다면 이제 나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로 성령 충만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저를 한 번 꼴아 볼 것이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한다구요? 우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는 것을 목사님이 무엇보다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해서 그렇게 부흥회에도 참석했고, 새벽기도회도 나온 것을 모릅니까?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와 있는 것도 다 성령 충만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충만을 얼마나 우리가 갈망하는지 잘 보여주는데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고 물으십니까?”

  성령에 대해 성경적인 탁월한 이해와 실제를 경험하셨던 에이든 토저 목사님은 자신에게 찾아와 성령 충만의 방법들을 묻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여기에서 성령 충만한 다섯 가지 방법(전략)을 말하면 좋겠지만 나에게 그런 방법은 없고, 또 그런 방법은 옳은 것도 아닙니다. 대신 나는 정색을 하고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성령 충만을 원하십니까?” 왜였을까?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는 것은 이제 나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 성령에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의지대로 했던 나의 영 대신에 이제는 다른 영에 사로잡혀 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말이다.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진정 당신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는가?” 만약 성령 충만을 원하면서도 여기에는 동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동안 성령 충만을 오해해 온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함을 원하면서도 나의 영이 아닌 다른 영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온유하신 예수님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순수하고 자유롭고 건강한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지혜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고귀한 신유의 영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영에 사로잡히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럴까? 그 영이 당신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그 분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성령의 충만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가?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말고 그 분이 주실 수 있는 이런 저런 유익은 아닌가?’

  물론 이런 것들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분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의 열쇠를 성령님께 넘겨 드리면서 ‘주님! 지금부터 저는 제 집의 열쇠를 갖지 않겠습니다. 주님이 가라 하시면 가고, 오라 하시면 올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가? 내 회사의 사무실 열쇠까지 성령님께 넘겨 드리면서 ‘주여! 여기에 앉으셔서 전화도 사용하시고, 임원들도 주관하시고, 이 회사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이 세상의 쉬운 길을 반대하고 세상 사람들이 다 싫어하여 다니지 않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는 그 분에게 사로잡히기를 원하는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는다면 나는 예수님이 세상과 적대관계에 놓였듯이 세상과 적대관계에 놓일 것이다. 세상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 분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세상을 꾸짖었기 때문에 세상이 그 분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했던 만큼 성령님을 미워한다. 성령님이 예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 분도 예수님처럼 세상의 미움을 받으시는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괜찮은가? 그것과 상관없이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세상의 편한 길을 용납하시지 않는 그 분과 동행할 준비가 되었는가?

  만약 이 모든 것에 “예스”라고 말하지 못한다면 성령 충만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 것을 붙잡으면서 살아왔다. 내 정욕대로, 내 쾌락대로, 내 욕심대로 다 살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내려놓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원한다고 입술로만 그렇게 말해 왔던 것은 아닐까? 내 삶의 주인은 여전히 내 자신인과 세상인 채로 남겨둔 채 우리는 이런 마음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닐까?

3. 오늘 본문은 이 모든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답을 주는 본문이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다. 그 분은 죄가 없으신데 왜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아들이셨는가? 예수님은 이 세례예식을 통하여 죄를 씻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분의 정체성을 그대로 들어내신다. 죄 없으신 그 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시고자 기꺼이 세례를 받으시고, 그 죄를 자신에게 전가시켰다.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소리가 있었다.

  나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무슨 생각을 하시면서 세례를 받으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고 그 몸이 물속에 잠길 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 

  “아버지! 이제 저는 이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저를 아버지께 드리려고 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라면 저는 어떤 일이라도 할 것입니다. 내가 이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요한보다 못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저는 이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 세례를 받음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저는 이 세례를 받겠습니다. 이제 저는 메시아로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기꺼이 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면 이제 저는 세례 속에 담겨있는 의미처럼 저는 죽기를 원합니다.”

  세례는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세례란 그리스도 밖에서 죄인처럼 살아가던 지난 삶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례는 “죄의 세계에서부터 의의 세계로, 속박에서 자유로, 율법 아래의 죽음으로부터 성령 안에서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중요한 과정”이다.

  또한 세례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창조된 사람이 그 분께 자신의 삶을 위탁하고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세례 받은 사람은 죄악된 세상에서 물들지 않기 위해서만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한 사람이다.

  신약 학자 제임스 던은 이렇게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이것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위탁하고 그 분의 소유와 제자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학자 에드문드 슈링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세례가 자신의 세례(스스로 세례받는 것)가 아니라 세례를 받게 되는 것처럼 세례받은 자는 그리스도 아래 자신을 놓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세례를 다 그런 의미를 두고 그렇게 받았다. 단순히 물 몇 방울 찌끄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제 내 삶의 주인입니다.“라는 결단이요 고백이다.

4. 따지고 보면 신앙생활이란 언제나 내 삶의 주인을 누구로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신앙생활의 맨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세례 때부터 우리는 그것을 배운다. 그리고 신앙생활 내내 우리는 그것과 씨름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마침내 내 삶과 생명의 모든 주인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 병과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신이 아닌 것들을 모두 벗어던져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을 보고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실수, 그의 잘못, 그의 업적, 그의 위치, 그의 질병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전에는 그런 것들을 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제는 오직 ‘그 사람’만 보일뿐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오면 사람들은 진실해지고, 정직해지고, 더 진정한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미켈란젤로에게 어떻게 피에타 상이나 다비드 상 같은 훌륭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이미 조각상이 대리석 안에 있다고 상상하고,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어 원래 존재하던 것을 꺼내 주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주님을 믿으면서 한 가지 일을 하는 것 같다. 필요 없는 부분을 깎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끊임없이 내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음으로 완성된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지만 세례를 받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또 지금의 우리들처럼 성령 충만을 갈구하지만 나의 신앙의 부족함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십자가에 나를 내려놓는 것은 계속된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몇 가지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은 몇 가지 능력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삶의 주인을 정말 그 분으로 인정하며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이다. 아직도 내 안에 내 것을 붙들고,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속에는 성령은 임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처럼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순종하겠다는 결단이 있을 때 성령은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오니 나를 십자가에 못박겠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용하여 주소서.”라고 결단할 수 있다면 성령은 오늘 지금이라도 당신을 채울 수 있다.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왜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는가를 묵상했으면 한다. 그리고 내가 받았던 세례를 생각하고, 내가 받을 성령의 세례도 생각했으면 한다. 그 때 우리도 하늘로부터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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