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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디옥 교회를 본받아 부흥하는 교회 (행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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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부흥 성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힘 입어 생명을 얻게 됨을 확신 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제는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요일 5: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1907년처럼 다시 부흥회는 교회가 되되 안디옥 교회를 본 받아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의 세계화는 안디옥 교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로마 교회와 더불어 세계 역사의 판도를 주도한 삼대 교회라고 봅니다.
안디옥 교회는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박해로 인해 흩어졌던 무명의 이방 성도들로 인하여 세워진 교회 입니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따라서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기독교 신앙의 참된 의미를 처음부터 알고 신앙생활을 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영광뿐만 아니라, 고난에도 함께 참여하는 것이 복음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사명자 적인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안디옥 교회는 여러 면에서 우리 기독교회가 영원히 계승해야 할 '이상적 교회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를 본받으며  함께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육하는 교회입니다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 교회는 받은바 영적 진리를 교육으로 체계화하는 교회였기에 항상 힘과 질서가 있었는데 '선지자들과 교사들'(1절)의 직분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었습니다.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피차 받은바 은사를 존중해 주고 남의 영역에 침범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교육자인 바울과 바나바 등이 있었습니다.
(행 15: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도 자신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벧전 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에게 교육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예수님도 가르치셨습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우리에게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45년 동안 뉴욕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쳐왔던 70세의 시드니 후크 교수는 마지막 강의시간에 특별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정한 관례를 어기고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성이나 지식과 바꿀 만한 것은 없지만, 그것만 가지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됩니다. 지식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은 있어도, 도덕적인 용기를 갖지 못하면 실천을 못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지성 없이 용기만 갖고 있다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한 환상 의 세계만을 추구하게 됩니다. 교육이란 이 지식과 도덕적인 용기 모두를 키워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안디옥 교회는 늘 '주를 섬겨 금식'(2절)하며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이 점이 바로 안디옥 교회의 힘의 근거입니다.
의학공부를 하는 한 미국의 여대생이 있었습니다. 대학 3학년 때 우연히 마약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곤할 때 마다 마약을 복용하곤 했는데 나중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턴 과정, 레지던트 과정을 거쳐서 의사로 일 하면서도 매일 마약을 복용했습니다. 그것을 복용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그 사실이 직장 동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마약을 살 수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버리자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의지로 마약을 끊어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오는 날 저녁에 자살을 결심하고 비를 잔뜩 맞으면서 뚝 옆의 저수지로 나아갔습니다. 뚝 위에 올라서서 여태껏 한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 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비를 맞으면서 아주 간절하게 뜨겁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위가 뜨거워지면서 전신에 그 뜨거움이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양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을 누군가가 양 손으로 거두어 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순간 그녀는 날듯이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살 하려든 마음을 돌이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후로 깨끗이 마약을 끊어버렸고 지금은 마약과 알콜 중독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옛것을 완전히 벗어 버리는 일은 내 의지로 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 도우심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실은 '겸손'하다는 증거요 신앙이 '순수'하다는 반증입니다. 교만하고 자만하여 세속화된 교회는 기도의 불길이 없습니다. 모든 예배가 '의식화'되고, 성령님의 뜻 대신 인간들의 모략과 사고가 난무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하여 하신 말씀에 나타납니다.

(계 3:15-1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성도가 있는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풍성한 환경과 자원을 소유했을지라도 '성령의 주권과 능력'을 외면한 교회는 '시기와 다툼… 요란'함이 있을 뿐입니다.
(약 3:14-16)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성령의 지시가 기도하는 무리들에게 임하였는데 성령의 지시는 바나바와 사울을 이방선교를 위한 사역자들로 구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한 중심지가 되며 성령의 지시로 인해 사울은 사도로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인류 최초의 힘은 인력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력이라고 하는 가축의 힘을 빌려서 노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력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전력이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온천 지대에 가면 온천수를 가지고 밥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합니다.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합니다. ‘중성자별’에 가면 찻숟갈만한 물질이 10억 톤의 무게와 농도를 가질 수 있고, 온도는 1억 도가 넘는 물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블랙홀’이 있습니다. 블랙홀은 별들의 무덤이라 불려질 정도로 주변의 별들은 물론 전파나 광선, 중력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무한 밀도의 물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세계 속에 이처럼 무한한 밀도가 있다고 한다면 정신계의 세계에는 더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활용을 못한 많은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힘은 인간이 가지는 신념, 양심, 정신, 지식, 돈, 몸의 힘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자기 힘에 의지해 태평양을 헤엄쳐 건너는 사람과 제트 여객기나 비행기를 타고 건너는 사람과의 차이가 엄청나듯이 자기 자신의 힘을 믿는 사람과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힘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에게 안수를 베풀고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성령의 지시로 두 사람을 안디옥 교회의 대표자로 혹은 사도로 인정하는 의식을 집행했습니다.
  안수는 사역자로 세우는 일입니다.
(행 6:5,6)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안수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 일듯 하게 합니다.
(딤후 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안수는 더욱 성령이 충만 하도록 합니다.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브라아만과 힌두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힌두교 신자가 선교사를 보고서 영국에도 카스트 제도가 있느냐고 질문해 왔습니다. 그 때 물론 선교사는 그런 제도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서 구별 없이 먹고 마시고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브라아만은 대단히 무질서하고 또 윤리가 없는 종교라도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교사는 여기에 또 응답했습니다. “그래요? 당신들도 축제일에는 이를테면 쥬거노트신(Juggernaut)의 대축제일 같은 때는 수드라들도 브라아만과 함께 식사를 하더군요?' “오. 그것은 그때는 우리가 우리의 천 신 앞에 모여 있기 때문이라오”라고 브라아만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 영국에서 카스트 제도 따위가 없는 까닭은 바로 우리들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 이오'(21세기 예화-힌두교 신자와 선교사)

    안디옥 교회는 봉사하는 교회입니다.

(행 11:27-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성령 안에서 한 믿음으로, 어려운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물질로 돕는 교회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마땅한 일입니다.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약 2:15-17)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봉사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약 1:22-25)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오늘날 기독교회가 개인주의, 상업주의의 세속 풍조에 오염되어 이와 같은 '공동체 의식'이 희박해져 감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안디옥 교회가 당시 개척 교회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사랑과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기적인 교회는 발전 할 수 없습니다. 고인 물처럼 스스로 부패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자원은 풍성한 반면 교회 내의 분위기가 냉랭하고, 불만, 불평, 분쟁 투성인 이유를 바로 공동체 의식을 외면하고 내 교회만 육성하려 하는 이기적인 정책 때문이라는 지적들에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한 왕이 그 날의 모든 학자들과 현인들을 불러 놓고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최선의 봉사란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베풀 최적의 때는 언제인가?' 그러나 왕은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는 왕이 자기의 대적 자들을 추적하다가 깊은 숲속에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부하들을 잃고 나서 길을 찾느라고 몹시 지쳤습니다. 장시간 말을 달려 기운을 잃었을 뿐 아니라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오두막집에 당도했습니다. 이 오두막에는 한 수도사가 살고 있었는데 그 늙은 수도사는 지친 왕을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시원한 물도 마시게 해 주었습니다. 수도사의 침대에서 얼마를 쉬고 난 왕은 그 수도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무엇이 최상의 봉사인가?' '목마른 자에게 한 잔의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베풀 최적의 시기는 언제인가?' '나그네가 먼 길을 홀로 와 어딘가 쉴 곳을 찾을 때 바로 그 때입니다.'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행 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이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사와 질 높은 신앙 교육을 받았다 해도 받고 배운 대로 살지 않으면 쓸모없습니다. 하나님의 교육을 잘 받은 성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영광'만을 증거합니다.

예수 믿고 생명을 얻은 사실을 확신하고 도의 초보에 머물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야 합니다.
(히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1907년처럼 다시 부흥하되 안디옥 교회를 본 받아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부흥하는 교회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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