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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사랑 (요 1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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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사랑(요한복음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들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상징 십자가가 된 것은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장 잘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대사회에서 원래 악한 죄인을 사형시키는 형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그 형틀에서 터무니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한 다음에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3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로운 분이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되심이 확실해 짐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서 사랑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5: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친히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눅 6:35절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 우시니라."라 하신 말씀도 십자가에서 가장 잘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의 가장 중심구절이 되는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신 말씀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 부터서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주님의 사랑에 대하여 롬 5:7~8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수직선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을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교훈하며, 십자가의 수평선은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요일 4:10~11절에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오.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요일 4:20~21절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이라고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의 참뜻이 무엇이며,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시고 허락해 주시고 부탁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희생하여 가르쳐 주신 이 사랑을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실천해야 합니다.

1. 사랑은 문제의 해결의 힘이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을 언급할 '모든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고, 모든 문제는 사랑으로 다 해결될 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전 13:1~3절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라고 하시고, 고전 13:13절에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사람의 영혼을 죄와 마귀와 지옥에서 구원해 내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구정에 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해 내는 참 사람의 실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처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만큼 큰 축복도 세상에는 없습니다. 사랑만큼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 가족의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이고,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있어야 천국처럼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세상은 지옥이요. 사랑이 없는 세상은 미움과 다툼과 원망과 시기가 가득한 사단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선별이 있어서는 안 되며, 상대적일 수 없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시력이 좋지 않았던 터라 콘택트렌즈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어느 순간에 콘택트렌즈가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렌즈를 찾기 위하여 자기가 놀던 운동장 주변을 몇 시간이나 헤매면서 샅샅이 뒤졌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울먹이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콘택트렌즈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요."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그가 놀던 곳으로 가더니 금방 조그마한 플라스틱 물체를 찾아서는 "이것이 그 콘택트렌즈가 아니냐" 하며 찾은 렌즈를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소년이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여기 떨어져 있는 것을 저는 왜 못 찾았을까요?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렌즈를 껴야 하는 어두운 눈으로 아무리 찾으면 무엇하느냐?"고 말해주었답니다. 중요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새 세상, 새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각,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세속화하고 오염되었습니다. 본래 가졌던 밝은 눈도 깨끗한 마음씨도 없어지고, 그 처음 마음도 그 처음 사랑도 어느 사이에 시들고 병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새해를 맞이하고, 이대로 새 이야기를 해보았댔자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옛날로 돌아갈 뿐입니다. 새 시간, 새 환경이 새로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인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일종의 변화입니다. 죽은 생명에 있어서는, 변화란 죽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서 썩는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진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썩을 뿐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변화란 시간과 더불어 자라고 더 높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란 살아 있는 존재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생명을 논할 필요도, 새 것을 운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피조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꾸는 존재입니다. 만물을 개혁하고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만물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보십시오. 가정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웃이 잘못되었습니까? 물질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곤두박질쳐도 상관이 없고, 수없이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심령이 문제인 것입니다. 오히려 내 심령이 건강하고, 내 심령이 온전함으로 세상을 개혁하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죽고 사는 문제가 결정됩니다. 죄에 지배를 받는 마음은 세상을 이길 수 없지만 죄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심령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로, 환경의 산물로 이루어지는 마음씨나 성품은 옛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옛사람입니다. 환경을 향하여 도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를 가리켜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콜럼버스 광장에서 한 공산주의 옹호자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직장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집을 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독실한 기독교인 청년 하나가 듣다못해 정면으로 나서서 응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옷 입을 사람을 만드실 것입니다."라고 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구조가 되고, 새로운 사회가 되고,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도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새로운 인간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야말로 한낱 물거품 같은 꿈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환경 문제도 아니요. 세상 문제도 아니요. 사회구조 문제도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제쳐두고 먼저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그 사람이 중생해야 한다."고 조용하게 외칩니다. 기독교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변화해야 환경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십니까? 기대하지 마십시오. 변화하여봤자 별것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 밤에 제자들을 앞에 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곧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끌려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빌라도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요, 가룟 유다가 나를 배반할 것이요,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시다. 이런 절박한 환경에, 이 절박한 시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것은 세상이 준 것과 다르니라. 너희는 다 나를 떠날 것이나 나는 혼자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고 하셨습니다. 몇 시간 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 절박한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듯 평안하고 고요하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사실 새 계명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흔해빠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유행가의 노랫말도 보십시오. 온통 사랑타령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병들었기에 문제입니다. 성경말씀 보십시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4)." 그 주제가 모두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앉혀놓으시고 새삼스럽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모든 문제 해결의 힘이요. 능력입니다. 오늘 구정 설날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귀한 참된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사랑'이 왜 새 계명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사랑이 새 계명이란 말입니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은 같으나 그 의미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동기가 다릅니다. 사랑의 자세가 다릅니다. 사랑의 운명이 다릅니다. 사랑의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는 내적 사랑의 체험이 있어야 하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 외적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 안에 신비한 사랑의 감격 속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사 이래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한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새 계명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사랑의 목적, 사랑의 방법, 사랑의 목표, 사랑의 근본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이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철학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사랑인 새계명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란 말입니까?


①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뜻이 달라질 때에 참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 계명은 사랑이란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것,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 것,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사람의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물질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나를 중심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옛 생활이요,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것은 새 생활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오염되고 변질되고 외식을 하고 가면을 뒤집어썼습니다. 사회의 제반 문제가 이 사랑의 문제입니다. 노사 간의 갈등, 시부모와 며느리의 갈등, 민생 치안의 문제, 인간의 분쟁 분쟁들이 모두 '잘못된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억울해하고 한에 맺혀 사는 것이 옛 생활이요, 사랑하고 감사하고 환희에 넘쳐 사는 것이 새 생활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실의와 절망, 이것이 옛것이요, 감사와 기쁨과 환희, 이것이 새것입니다.

특별히 노예생활과 같이 억지로 하는 것, 죽지 못해서 하는 것, 짜증스러워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옛것'입니다. 하나남의 자녀 된 긍지와 자랑과 기쁨과 벅찬 감격, 이것이 바로 '새것'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은 '옛것'이요,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생활은 '새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천신지(新天新地), 하나님의 세계요. 신령한 세계요. 영원한 세계요. 거룩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인 만물을 새롭게 한 구속의 대 사역, 재창조를??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렇듯 새 계명은 창조적이요. 소망적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개념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 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받고 싶어 하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사랑을 주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사람이 됩니다. 받기 위하여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줌으로써 끝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완전히 상대방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온전히 바뀌는 순간에, 사랑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에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날을 새 날로 믿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랑의 개념을 바꾸어보십시오. 지금까지 못 받아온 사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주기만 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그토록 안달하고 질투하고 별짓을 다해봤댔자 아직까지 못 받아온 사랑을 새삼스레 받겠습니까? 잊어버리세요. 이제는 깨끗하게 사랑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의??뜻으로, 깨끗한 사랑의 개념으로 온전히 바꾸어보십시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중생(重生)한 자의 계명, 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보세요. 살인하지 말라. 이것도 사랑이요, 간음하지 말라. 이것도 사랑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주시는 그 모든 말씀이 다 나를 향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새 계명은 어느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 한 것입니다. 계명은 억지가 아니요 구속이 아니요 속박이 아닙니다.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정도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있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깃든 거룩한 사랑을 내가 받았습니다. 주님께로 부터 받은 사랑의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건 상관없습니다. 주님께로 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여러분, 예수님께??발 씻김을 받았다는 감격이 아니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예수님께로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을, 그 벅찬 감격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새 계명이요, 바로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② 나아가 새 계명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생명력 있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할 때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날 죽이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작용을 합니다. 무릇 사랑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맹랑하고 감성적이어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생명력이 바로 이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사랑의 뿌리를 두고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그것이 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적인 사랑이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성격을 의미합니다.??그러니 대상을 논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이제는 이 환희 안에서 절대적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만날 대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대뜸 "우리 가족은 특별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책을 쓴 것이 있는데, 한 권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자랑합니다. 어떤 분은 봉투를 받았는데 궁금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잡지가 한 권이 있더랍니다. 얼핏 한 페이지를 펴보니 그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는데 먼저 큰 활자로 뽑아진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데 '우리 부부 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라고 젖혀 있었답니다.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본즉, 그 내용은

"그 부부는 어렸을 때부터 한 고향에 살면서 꽤 오랫동안 연애한 뒤에 결혼해서 30년을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다른 부부들과는 달리 이들은 특별히 1년에 한 번씩 결혼식을 다시??올렸다고 합니다.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다시 한 것입니다. 사진도 찍고, 신혼여행도 가고…… 이렇게 30년 동안이나 꾸준히 해왔답니다." 30년 동안 매년 결혼식 올린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앨범에 담아놓았습니다. 바로 그 앨범이 자신들의 재산목록 1호임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답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늘 새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부부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말할만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이??있습니까? 이 가정만 이런 새로움을 누려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합니까? 왜 그 소중한 날들을 그렇듯 허비하고 살아야 합니까?

어떤 집사님 가운데 밤낮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는 분이 있습니다. 심방 갈 때면 담임목사님이 "남편은 좀 나아졌습니까?"하고 묻습니다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져만 간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같이 사나 싶어서 물어보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어떻게 그런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 집사님 대답이 걸작입니다.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서야 무슨 사랑의 응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저가 누구인지, 저가 내게 어떻게 하는지, 세상이 어떠한지, 그런 것을 묻지 맙시다.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서로를 사랑할 것입니다.


③ 철이 든 사랑을 해야 합니다.

철없는 사랑, 책임감이 없는 사랑, 무분별한 사랑을 '불장난'이라고 합니다. 불장난은 큰 화를 입게 됩니다. 참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바울을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고전 13: ).

참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철이 덜 난 사람입니다. 참된 사랑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사람에게 인격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받아야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위장된 이기심을 상대방에게 심는 것에 불과합니다.

거짓된 사랑이 남을 고통스럽게 하고 진실하지 못한 사랑이 문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더욱 나쁜 현상은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도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나 베풀지 아니하는 사랑은 세상을 온통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랑을 받았으나 베풀지 아니하는 사랑 중독자나, 거짓된 사랑을 일삼은 사랑의 외식 자들 때문에 세상이 살기 힘들어지고 더욱 악해집니다.

미국의 정신 분석 학자인 에릭히 프롬(Erich Fromm)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사랑을 다섯 가지 특징이 있는 것으로 분석을 했습니다. 따라합시다!! "사랑은 ① 관심을 가지는 것, ② 책임을 지는 것, ③ 존중하는 것, ④ 이해하는 것, ⑤ 주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철이난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시기 부탁합니다.

미국의 산디에이고는 경관 좋고 기후가 좋아 주거지역으로 가장 좋은 곳입니다. 이곳 외곽에는 어마어마한 주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어느 집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 집의 안주인이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 전화는 한국 전쟁에 나간 아들에게 온 전화였습니다. 그 아들은 말하기를 "어머니 제가 제대를 하고 집에 돌아 갈 것입니다. "어머니는 너무 기뻐서 "애야 전화는 무슨 전화야 빨리 오너라.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서 오너라."

"그런데 어머니 집에 갈 때 한 친구를 데려 가겠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무 생각 없이 친구를 데려 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데 그 친구는 한국 전쟁에서 부상을 하여 한 눈을 실명하고 팔과 다리 하나씩이 없는 불구자입니다. 오갈 때가 없어 제가 데리고 살까 합니다." "아무튼 데려 오너라. 고생들 했으니 집에 와 한 일주일쯤 푹 쉬게 해 주어라." "어머니 일주일은 안 됩니다." "한 달 정도면 되겠냐!” 그런데 아들은 말합니다. “아니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설득합니다. "애야, 네가 그 친구를 평생 데리고 산다는 것은 정말 기특한 생각이다마는 생각과 현실을 엄연히 다르단다. 그런 불구자와 평생을 같이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 드는지 모른단다. 처음에는 불쌍한 생각이 들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귀찮아 질 수도 있어서 처음에 가졌던 좋은 감정까지 망치는 경우가 흔하단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단다."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덜꺽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어젯밤에 센디에이고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을 했으니 사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부모는 너무 놀라서 부랴부랴 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은 그 아들은 본 순간 그 부인은 땅을 치고 통곡을 하다 기절을 했습니다. 바로 한 눈이 없고 한 팔과 한 다리가 잘려 나간 가련한 그 친구는 자기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몸이 불구가 되어 집에 오면서 이런 아들을 받아 주고 평생 변함이 없이 사랑해 줄 부모를 찾았던 것인데 어머니는 그것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참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더욱 큰 불행이 준비되어 있음도 알지 못한다는 교훈입니다.


④ 진짜 사랑, 즉 참 사랑인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고 살리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 10:28~29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정에 가족들을 만나는데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건져내는 참 사람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짓 사랑은 몸도 죽이고 영혼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사랑의 방법인 전도를 통해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지옥불로 들어갈 우리의 부모현제들을 구원해 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온 천하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받을 이름을 주신일 이 없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참된 사람의 실천자가 될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참된 사랑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랑의 영을 주셔야 올바른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생 동안 주님의 사랑을 공급받는 것이고 배우는 것입니다. 이 사랑에 감동된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을 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이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어떤 경우에는 순교도 합니다.

부부도 그렇습니다. 결혼을 하면 "두 몸이 한 몸이 되니 헤어지면 안 된다."고 주례하는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는 즉시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 서로 사랑하면서 평생 두 몸이 한 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사랑에 미친 것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참된 사랑으로 무장 될 때 즉, 그리스도화 할 때에 비로소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새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귀로 듣고, 사랑의 마음으로 만물을 대합시다. 음력 새해에는 모든 것을 참된 사랑이 되시는 주님을 본받아 모든 한 해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합시다. 이렇게 출발할 때에 비로소 이 날이 우리에게 또 다른 새 해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영광된 사랑은 '희생으로 얻어지는 사랑'을 알려 주셨습니다. 칭찬이 아닙니다. '높은 대접이 아닙니다. 배신을 참고 사랑하고, 낙심된 속에서도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 가운데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는 증거는 '사랑의 질'에 있습니다. 요 13:34~35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 인줄 알리라."하신 말씀을 우리들의 생에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목사를 핍박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어지럽힌다고 말하는 사람들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영어로 '크레이지 러브' 즉 '미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신비한 동화력을 가집니다. 우리는 값도 치룰 수 없고 그 값을 헤아릴 수도 없는 엄청난 사랑을 주님에게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사랑을 몰라 할 수 없다던 가,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할 수가 없다.'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렇게 큰사랑을 받았음에도 더욱 더 큰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시기 질투하고 야망과 탐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정말 쓸모없는 하나님의 패륜아가 될 것입니다.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들답게 그리스도를 따라 행복하게 살고 드리며 살고 베풀며 삽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행복의 범위는 사랑의 범위와 같다."고 했습니다. 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한 사람이요.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생명 받쳐 사랑하신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요일 5: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하였습니다.

"마누라 예쁘니 처가 집 말뚝보고도 절한다." 하는 속담이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예뻐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도 사랑스럽고 성도들도 사랑스럽습니다. 사랑하고 사니 그 만큼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 죽을 지경으로 불안하고 괴롭다 하시는 분 어디서 처음 사랑을 잃은 건지 첫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계 2:4~5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기에 새로워지는 비결이 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여 구원하며, 처음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사랑의 실천자가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사명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 주님처럼 참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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