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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설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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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1. 지금부터 2420년 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높이가 약 28m나 되는 우상(偶像)을 금으로 만들고 전 백성들로 하여금 절하며 섬기도록 어명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그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면 누구를 막론하고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용광로)에 던져 넣으리라고 선포했습니다.(단3:1-7) 왕의 명령에 따라 만조백관들과 모든 백성들이 일제히 악기 소리에 맞춰 금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포로 출신인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 중 두 번째인 “(출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한 사실을 발견한 바벨론 사람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고소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다니엘이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몽한 일로 총리에 오르면서 도지사 급의 지위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왕은 노발대발하여 이들을 체포해왔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이들이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워낙 뛰어난 인물들이어서 그냥 풀무 불속에 넣어 죽이기는 너무나 아까운지라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자 이렇게 회유합니다. “(단3:14-30)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들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이냐? 그렇다면 이제라도 너희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그 밖의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라. 만일 이번에도 너희가 절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뜨겁게 타는 용광로에 던져 넣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내겠느냐?” 그러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시여,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 입장을 변호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진다고 해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 용광로에서 구해 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왕의 손에서 건져내실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내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또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을 것이니 왕이시여, 그런 줄 아십시오.”

이들이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해 내지 않으실지라도 결코 우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비록 용광로 속에 던져져 타 죽는다 해도 더 좋은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기 때문에 어떠한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하므로 잠시 높은 지위와 권세, 그리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는 있을지라도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권세와 부귀영화에 미련두지 않고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용광로를 택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더 나은 본향” 곧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들 세 사람의 말에 느부갓네살 왕은 잔뜩 화가 났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대하는 그의 얼굴 표정도 달라졌습니다. 결국 그는 평소 때보다 용광로의 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지시하고 또 건장한 군인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단단히 묶어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세 사람을 정장한 그대로 묶어서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용광로의 불길은 너무 뜨거웠기 때문에 이들 세 사람을 붙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불길에 타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꽁꽁 묶인 채 뜨겁게 타는 용광로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느부갓네살 왕은 깜짝 놀라 일어서면서 자기 보좌관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묶어서 불에 던진 자는 세 명이 아니었느냐?” “그렇습니다. 폐하.” “그런데 어째서 네 사람이 불 가운데 걸어 다니고 있느냐? 저 사람들은 묶여 있지도 않고 상한 흔적도 없으며 더구나 네 번째 사람은 그 모습이 신들의 아들과 같구나.” 그리고서 느부갓네살 왕은 무섭게 타오르는 용광로 앞으로 다가가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이리로 나오너라.”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용광로 불 가운데서 걸어 나왔습니다.

총독들과 지방 장관들과 군사령관들과 왕의 고문들이 모여 이 세 사람을 보니 화상을 입지도 않았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않았으며 그들의 옷도 상하지 않았고 불탄 냄새도 없었습니다. 그때 느부갓네살 왕이 말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 자기를 신뢰하는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경배하지 않으려고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기꺼이 자기들의 목숨까지 내놓았도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명령하노라.

어떤 민족이나 백성을 막론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에 대하여 좋지 않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몸을 갈기갈기 찢고 그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려라.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신은 천하에 없도다.” 그리고 왕은 바벨론 도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이전 보다 더 높은 직책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같은 지도자들, 우상숭배가 헛된 것을 깨닫는 지도자들, 어떠한 환경에서도 우상 앞에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무수히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2. 사람이 죽으면 그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든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형벌을 받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영원히 형벌을 받는 지옥에 떨어지고, 죄 사함을 받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인간이 죄 사함을 받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이 죽었을 때, 막연하게 ‘착하게 살았으니까, 너무나 억울하게 살았으니까, 너무나 힘들게 살았으니까, 너무나 불쌍하게 살았으니까, 좋은 데 가서 좋은 세상 살아라.’라고 덕담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하게 살았고, 억울한 삶을 살았고, 고생하며 불쌍하게 살았다 해도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죽으면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 영원히 행복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또한 세상에서 제아무리 똑똑하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해도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1:15)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여기 “복음”은 예수께서 모든 인간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께서 내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모든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Good News”, 기쁜 소식,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께서 내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을 무척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요3:16-18)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아무리 좋은 세상을 살았고, 살고 있다 해도 죽으면 적신(赤身), 벌거벗은 알몸입니다. 아무리 나그네 인생을 부정해도 나그네 인생일 뿐입니다.(왕상2:2)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욥은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욥1:21)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아 거부(巨富)가 되어 살았지만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부를 축적하고 산 것이 아니라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거부가 되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린다 해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은 것입니다.

‘더 좋은,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가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에 세상을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의 본래 ‘본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지상의 고향, 이 세상의 본향이었습니다. 이들은 거부가 되어 이 땅의 고향(본향)에 돌아가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금의환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서 “(창12: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고 난 후부터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 땅을 자신들의 본향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세상에서의 삶을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 고향보다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해 그곳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들은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4. 나그네처럼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애착(愛着)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執着)을 버리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 삶을 뜻있게 살고자 애쓰는 어느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인생임을 잘 알면서도, 머리로는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삭여내지를 못해. 이리도 절절한 아픔으로 잠 못이루게 하는구나. 저 하늘의 뜬구름처럼 한낮 덧없는 인생인 것을 왜 이리도. 마음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소유에 대한 애착으로 마음아파 하는가? 아 아 나의 인생은 아침이슬 같으며.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을, 왜 이다지도 소유에 대한 애착과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해 괴로와 하는가?” 땅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조상처럼 나그네 인생을 살지 않고 땅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땅을 사고팔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레25:23)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재산 상속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어느 사람이 예수께 찾아와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이에 예수께서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말씀하시며 모인 무리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13-15) 그리고 이어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으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눅12:16-21)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0년 넘게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게이츠일지라도 그 역시 나그네 인생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가 본향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재산의 절반이라도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그네 삶을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나그네된 삶을 인정하고 나그네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최고의 삶인 것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119:54)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이 여러분의 노래가 되시기 바랍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안정된 통일 왕국을 건설한 다윗 왕도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상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나그네로 살며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며 그 말씀대로 사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벧전1:7)

5. 예수 믿고 세상을 나그네처럼 살다가 들어가게 될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이겠습니까?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는 죄인이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깨끗한 사람들만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습니다. 빛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계시기 때문에 어둠이 전혀 없습니다.(계21:25,22:5) 그래서 그 모습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계7:16-17)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전쟁과 저주가 없고 사랑이 지배하는 “더 나은 본향”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11:6-8)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의 새 예루살렘 성은 사도 요한이 본 바 “(계21:10-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기초석은 “(계21:19-20)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세째는 옥수요 네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 한째는 청옥이요 열 둘째는 자정이라.”고 했습니다. 또 성문은 어떻습니까? “(계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고 했습니다. 문마다 진주가 박혀있고 길마다 유리같은 정금으로 포장되었는데, 지천에 깔린 게 보석이고 정금인데, 참으로 에덴 동산을 능가하는 “더 나은 본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솔로몬처럼 세상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전무후무합니다. 그 솔로몬의 모든 영광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며 여러분의 삶에 대해 이렇게 권면하십니다.

(눅12:27-31)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계속해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눅17:28-32)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왜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아니하고 하늘로써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심판하시는 소돔 성을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과 멸망을 선고하신 소돔의 부귀영화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미련 때문에 끝내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다 결국 소금기둥이 된 것입니다. 멸망할 세상 나라에 미련 두지 말고, “더 나은 본향”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보 하인을 데리고 사는 어느 귀족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귀족이 바보 하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며 말했습니다. “자네가 이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가 자네보다 더 어리석은 바보를 만나거든 그에게 주게.” 그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아 귀족은 병들어 곧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보가 죽어가는 주인을 보러 왔습니다. 병든 주인은 바보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곧 자네 곁을 떠나야 하네.” “어디로 가십니까?” 바보가 물었습니다. “다른 세계로.” 그의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돌아오시죠? 한 달 내입니까?” “아니.” “1년 내 입니까?” “아니야.” “그러면 언제 돌아오십니까?” “영원히 돌아오지 않아.” “영원히라고요?” 바보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주인님은 그 곳에서 지내기 위해 무엇을 준비하셨습니까?” “전혀 아무것도.”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셨다고요?” 바보는 다시 한번 놀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으셨다니 자, 이 지팡이를 가져 가세요.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바보스러운 행동은 본 기억이 없거든요.” 실로 세상에서 죽음을 위한 준비만큼 귀중한 준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죽음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본향”을 준비하는 길은 오직 예수 믿고 사는 것뿐입니다.

“(히9:27-28)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아 “더 나은 본향”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멸망할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나그네된 삶으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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