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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상상력에 붙잡힌 사람(다윗의 영성 시리즈1) (삼상 17: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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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통해서 교훈을 받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이다. 직접적인 방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주시거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려주시는 경우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또 한 가지는 보다 간접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을 통해서 교훈을 받는 것이다. 성경에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거나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다는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신 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감추어져 있을 뿐인데 어쨌든 성경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에도 그 사람의 일생과 모습을 통해서 큰 교훈을 받는다. 예를 들면 성경 에스더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는 에스더와 유다 민족 가운데서 일하시는 생생한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 생생한 교훈을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이 두 가지가 모두 있다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말씀만 있다면 우리는 주눅이 들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했는지,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지, 또 왜 그는 실패했는지, 슬픔이 몰려올 때 그는 어떻게 했는지, 고난이 닥쳐올 때 그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보여주는 사람은 우리들에게 좋은 멘토와 소망의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성경 속에서 살다간 그 사람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유한한 삶 속에서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절망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거울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은, 시대는 달라졌고, 인생의 무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달라졌지만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믿는 사람은 수 천 년 전 다윗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나에게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는 오늘부터 시작해서 몇 번에 걸쳐 다윗의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일명 다윗 시리즈이다. 다윗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와 동일한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과 지혜를 줄 것이다.

1.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비그리스도인들도 잘 아는 내용이고, 비록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도 알고 있는 다윗 이야기의 고전에 속한다.

  엘라 골짜기에는 개미떼처럼 새까만 군사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수십만 명이 모여 있었지만 그 사람들을 구분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한쪽은 그들의 얼굴에 환호와 용기가, 다른 쪽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다윗이 그 엘라 골짜기에 도착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조롱과 거만함이 묻어났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얼굴은 두려움에 찌들어 있었다. 다윗은 보았다. 그 거만과 두려움을 갈라놓은 것은 거인 골리앗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그 거인은 2미터가 넘는 키에 11킬로가 넘는 창을 마치 치어 리더용 지휘봉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엘라 골짜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하나님을 조롱하며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골리앗에게 압도당한 채 움츠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도, 지난 역사 동안 행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은 사자 앞의 어린 들쥐 한 마리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울과 이스라엘 군사들, 그리고 다윗의 형들은 골리앗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유진 피터슨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들은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타락한 상상력”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지고 그 엘라 골짜기에 섰다. 다윗의 눈에는 이교도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들이 이상하게 보였다. ‘이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가 아니던가?’ 다윗이 보기에 그가 관계를 맺어야 할 실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다윗이 알고 있는 세계, 그 진짜 세계(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에서는 거인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다.

※ 우리는 무엇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지금 나는 무엇에 의해서, 어떤 상상력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있는가? 골리앗인가? 골리앗과 같은 내 삶의 큰 장애물인가? 이 큰 문제를 바라보는 순간 내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걱정되는가? 절망해버렸는가? ‘이것을 어떻게 할까? 이제 나는 죽었구나!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인가봐!’ 그렇게 포기해 버렸는가? 그 문제가 여러분을 삼켜버렸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진 것이다. 실재하는 골리앗보다 그 골리앗이 나에게 주는 상상력에 의해서 지배당한 것이다. 사람은 상상력의 동물이다. 사람은 상상하는 만큼 변한다. 사람은 상상하는 대로 된다. 내가 골리앗에게 지배당한 상상력을 가지면 나도 그렇게 된다. ‘저 무서운 주먹에 맞으면 한 번에 가겠구나!’ 상상하면 나는 한 번에 나가떨어진다. ‘지금 내 앞에 드리워져 있는 이 문제, 이 문제로 인해서 나는 이렇게 될 것이고, 이렇게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이렇게 내 인생의 길이 결정될 것이고, 나는 아마 이렇게 될 거야!’ 라고 상상하면 정말 그렇게 된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에게 사로잡힌 상상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윗은 베들레헴 언덕과 풀밭에서 아버지의 양들을 볼보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까이 계신 분인지를 체험하며 살았다. 그는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우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철저히 연습해 온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사자의 포효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었다. 평상시 늘 하나님의 장엄하심을 경배해 온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는 곰의 사나움보다 더 실제적이었다. 기도하고 노래하며, 묵상하고 찬미하는 가운데 형성된 그의 상상력 속에는 양, 곰, 사자를 모두 압도하는 크고 거대하며 강한 무언가가 자리 잡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었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그가 서 있는 거친 광야도, 한 마리 양에게 물을 먹이는 우물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연습장이었다. 마침내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지고 그 거대한 골리앗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었다.

2. 다윗은 사울이 입혀주는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어버리고, 시냇가에 가서 물맷돌 5개를 고른다. 상상해 보라. 시냇가에 무릎을 꿇고 돌을 고르고 있는 다윗을... 그의 얼굴이 시냇물에 살며시 비친다. 여러분은 보았는가? 시냇물에 비친 다윗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스며있는 것을…….

  다윗은 그 돌을 물매에 넣어서 몇 번 돌리다가 달려가면서 그 돌을 던졌다. 언젠가 KAIST교수가 이 상황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보았다. (무게, 속도, 회전하는 운동에너지, 원의 반지름, 직선에너지) 이런 말들을 써가면서 설명하는 데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는데 한 가지는 기억에 남는다. 물매가 날아가는 속도는 대략 시속 최소 130에서 최대160km 정도는 될 것이라고. 생각해 보라. 사람 주먹만 한 돌이 그 엄청난 속도로 가서 사람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렸을 것을……. 골리앗은 K-1에서 엄청난 하이 킥에 고목나무 쓰러지는 거인들처럼 땅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하나님을 미사일 콘트롤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다윗이 돌을 던졌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돌의 방향을 골리앗의 이마를 향하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것이다. 만약 다윗이 아무렇게나 돌을 던졌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돌의 방향을 조정해서 골리앗을 쓰러지게 만들어 주셨을 것이라고…….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이 마치 미사일 콘트롤러처럼 다윗이 아무렇게나 던진 돌의 방향을 조정해서 골리앗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 다윗이 무엇이라고 고백하는지를 보라.

(34-37절)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물매를 던지는 것이 오늘만이 아니다. 그는 들판에서 양을 지키면서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혔다. 사자와 곰도 그것을 가지고 물리칠 수 있도록 숙련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골리앗 앞에 서있다. 그의 고백과 같이 다윗의 눈에 그 골리앗은 거대한 골리앗으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 마리의 사자나 곰처럼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물매를 던질 때 ‘혹시 빗나가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들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했다. 그 곳에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계심을 온 몸으로 체험했다. 오늘 여기에서 물매를 던지지만, 상황만 달라졌을 뿐 하나님은 여전히 여기에 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처럼 했다. 연습하던 것처럼 던졌고, 실전하는 것처럼 단순히 던졌다. 그리고 그는 예전처럼 똑같이 상대를 쓰러뜨렸다.

우리는 다윗의 이 모습에서 중요한 진리를 얻게 된다.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가? 어떤 골리앗이 여러분 앞에 있는가? 그것은 재정적인 것일 수 있다. 집안이 쫄딱 망했을 수 있다. 단 돈 몇 푼의 생활비가 없어서 허덕일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골리앗이 나의 계획과 목표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자꾸만 꼬일 수도 있다. 시험을 보지만 자꾸만 슬라이딩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골리앗이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일 수 있다. 의학적으로, 상식적으로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일 수 있다.

  그러면 한 번 내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지금 이것을 골리앗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 만난 이런 문제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하신 일이 없는가? 나는 지금 물질의 가난이 골리앗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삶에 가난한 것이 지금뿐이었던가? 나는 지금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골리앗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삶에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지금 뿐이었던가? 나는 지금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일을 만나서 이것이 골리앗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지금 밖에 없었던가?

  지금 내가 만난 골리앗과 같은 경험을 하나님은 내 삶을 통해서 계속 시켜왔을 지 모른다. 내가 내 삶을 살면서 물질적인 빈곤을 만났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을 연습했는가? 내 인생이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그 문제 앞에 내가 굴복되지 않고 그 문제를 굴복시키는 것을 연습했는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그 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했는가? 만약 그 때 연습하지 않았다면 지금 현재 내 앞에 있는 골리앗 역시 우리는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더 잘 사용하신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내 인생에서 골리앗과 같이 이런 큰일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고통을 호소하는 분이 있다면 다윗의 심정으로 되돌아가라. 자기의 삶의 자리에서 그 문제와 씨름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했던 다윗의 마음을 품으라. 들판에서 목동으로 살면서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어도 그 곳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며 사랑하며, 기도하며 묵상하며, 싸우며 승리했던 다윗을 보라. 지금 여러분이 만난 문제에 지혜롭게,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여러분이 언젠가 정말 골리앗과 같은 문제를 만났을 때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문제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골리앗을 만나도 문제없고, 지금 문제가 골리앗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의 상상력,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가졌으면 좋겠다. 오직 기도에 흠뻑 젖을 수 있는 상상력,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상상력, 오직 하나님의 실재 안에 푹 잠길 수 있는 상상력에 우리도 잠기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상력을 연습하기에는 지금의 문제가 있는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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