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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처음사랑의 회복-에베소(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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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랑의 회복
계 2:2-5

처음 사랑의 회복이란 제목으로 증거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우선 칭찬받습니다. 많은 수고를 통해 이루어 놓은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이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전도했고, 3차 여행 시 세례를 주고 안수할 때 성령의 임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술객들이 술서 5만 어치를 소각하는 일이 있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이라고 경고합니다. 즉 그렇지 못하면 그 교회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우선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도시입니다. 이곳은 로마제국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은 현재 터어키에 속합니다. 로마 황제가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후 오랜 기간 소아시아는 세계의 문화, 경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이곳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곳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가 만나는 곳입니다. 3대륙의 중간지점입니다. 그렇기에 문화, 물자교류가 빈번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수천년가 문화, 학문, 물자가 넘쳐났습니다. 로마제국 당시 특히 에베소는 제국 모든 아낙네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로마의 강남이요, 압구정이었습니다. 일례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는 이곳에 자주 들러 소위 말하는 당시 최고의 명품들을 쇼팽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 곳이 에베소입니다.
더욱이 로마제국을 먹여 살릴만한 풍족한 식량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도 터키는 유럽에 값싸고 질좋은 그리고 풍족한 식량을 공급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아시아의 중국과 같은 위치입니다. 그러니 로마제국으로서는 당연히 소아시아에 관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아시아 내에는 매우 중요한 군사전략지역이 꽤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에는 아데미 신전이라는 매우 유명한 신전이 있었습니다. 이 아데미는 다산을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이 신전은 기둥이 120개나 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4배에 달하는 규모를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의 다른 이름은 신전도시였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에베소는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도시였습니다. 이로 인해 이곳은 우상숭배와 황제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복음전하기 어려운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찍이 이곳에 복음 전도의 역사를 예비하셨습니다. 이 에베소에 교회를 세운 이는 바울이다. 그는 이곳에서 3년간이나 체류하며 전도하였고, 그 결과 에베소 근방 여러 교회를 세울 수가 있었다. 아볼로도 이곳의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서 이 교회를 사역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에베소장로들을 청하여 3년동안 눈물로 돌본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돌볼 것을 부탁한다. 이러한 바울의 눈물겨운 목회여정 이후 디모데가 이 교회를 돌봅니다. 그리고 그는 최초의 감독이 되었고 이후 사도 요한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요한은 어머니 마리아와 동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기거했다는 전설이 서린 자리가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한이 마지막에 귀향 간 다소섬도 사실은 이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지역입니다. 이런 모든 점을 살펴 볼 때 에베소 교회는 굉장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교회요, 소아시아  7교회 중 첫번째 언급되기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교회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불과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 적어도 요한이 살아있는 시점에 어떤 교회로 기억되느냐는 것입니다.


1.  우선 에베소교회의 장점들이다.

1) 우선 에베소 교회는 이름값하는 교회였습니다. 에베소의 말뜻은 인내라고 합니다. 즉 지역도 인내지만, 이곳에 세워진 교회의 이름도 인내라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교회를 통해서 칭찬하신 제목이 인내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이와같이 자신들의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번듯한 이름을 지어놓고선도 그에 걸맞는 역할을 하지 못해서 망신당하는 오늘날의 ‘거룩한’ 성도들과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에 대해 눈치를 보며 살고 있지는 않는지 곰곰이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이 교회는 수고와 인내가 있었던 교회이다. 에베소교회는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인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존재할 수 없는 곳에 위치한 교회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문화적인, 그리고 외압에 대해 참고 인내해야 했고, 소망을 잃지 말아야 했다. 바로 에베소 교회가 그러한 교회였다.

2)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2절에 소개된 것처럼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에베소 교회는 무엇보다도 신앙적으로 잘 참고 견디었는데 단순히 견디고 참는 것이 그들의 덕목이 아니라, 마땅한 바를 분별하여 그것을 붙들고 참고 견디며 소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교회가 용납하지 않은 이들은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회를 위협하고,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단사상을 품은 자들입니다. 에베소교회는 그들, 특히 니골라당이라 하는 이들을 배척했습니다. 니골라당은 잘못되고 부도덕한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가르친 자들이다. 혹자는 니크(다스리다) 라오스(평신도)이라 해서 평신도가 아닌 특별한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하며 그것이 교회직제를 암시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철저한 왜곡입니다. 오히려 니골라당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라고 생각했던 영지주의적인 성격을 지닌 우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경건, 거룩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삶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방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교회를 경건과 거룩이 아닌 무절제와 방탕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3) 마지막으로 어떠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절에 보면 주님을 위하여 환난 중에서 인내했다고 한다. 우리는 굴하지 않는다. 불굴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안다. 자고로 현인들은 강한 것이 부러진다고 말들해 왔다. 더욱이 우리는 사람은 상선약수라 하여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는 순리를 즐겨하지 참고, 견디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지역도 아닌 에베소 지역에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끝까지 참고 견딘 것은 그 어느 지역에서 참고 견딘 것 이상의 놀라운 인내와 각고의 노력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어느 누군가의 초인적인 노력을 통했다고 보기 싫다. 대신 더욱 자신을 쳐 주를 붙잡을 수 밖에 없었던 교회의 눈물겨운 신앙의 열정과 순수성이 이러한 어렵고 힘든 일을 감당하게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마디로 에베소 교회는 대단한 교회였다.


2. 그런데 이런 에베소가 무슨 책망을 듣느냐는 것이다.

4절은 이렇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에베소는 교리가 살아있고 수고와 인내도 있었던 교회인데 문제는 첫사랑을 버린 교회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사랑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에의 순수한 사랑이다. 가령 이제 갓 결혼한 신혼부부라고 하자 이제 처음 결혼한 부부는 매사가 그냥 좋고 행복하다. 당장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이렇다 표현할 방법이 없다 싶을 정도로 감동을 느낀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로 생각하고, 글로 기록하는 그런 차원의 기쁨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이 첫사랑이요, 사랑의 기쁨인 것이다.
에베소 교회가 첫사랑을 잃었다. 무슨 말인가 그러한 감동과 기쁨 은혜를 잃었다는 것이다. 분명 교회가 어른역활을 하고, 소아시아에서, 이방인교회에서, 초대교회에서 예루살렘에 버금가는 중요한 위치, 영향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여도 처음 풋내기 적에 느꼈던 그러한 가슴설레는 영적 충만, 감동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의 신앙 속에서 예수님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의 교리와 지식처럼 외어지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냥 주체할 수 없는 감동으로 어쩔줄을 몰라하는가? 처음 은혜받고, 감동하였을 때 여러분은 눈물 흘리면서 주님만을 위하여 일평생 살겠노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 주님의 첫사랑이 감사해 내 삶을 주님께 드리고 싶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밥을 굶어도 배고픈 줄 몰랐고, 잠을 못자도 피곤한 줄 몰랐잖는가? 먼길을 걸어도 싫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서라면 내 생명을 내놓는다 해도 두렵지 않았잖는가? 지금은 어떤가? 바로 이런 것이 바로 첫사랑을 잃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 지금은 예수에 미치지 않느냐는 것이다. 왜 지금은 그리도 냉냉해지고, 철저히 이성적인 자리로 돌아왔느냐는 것이다. 바울이 이곳에 3차 전도여행을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물었던 너희가 불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도, 그들에게 놀라운 성령의 체험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지 못하냐는 것이다. 물론 할말이 있을 것이다. 그 사이 그들은 니골라당을 겪었다. 니골라당이라는 영지주의로 인해서 구대기 때문에 장못 담근다는 식으로 이제 교회는 열정적이고, 뜨거워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영적 알레르기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첫사랑이 떠난 사람들은 점점 예배의 감동이 식어지고 마련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나마 신앙도 무기력, 무의미해지게 된다. 그것이 감동없는 신앙의 종말이다. 일주일동안 세상에서 오직 돈과 관련하여 에너지를 다 집중하고 그 몸과 마음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도 소위 말하여 주님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그 마음 그 눈 그 귀 그 몸의 에너지가 세상에 이미 중독이 되어 있으므로 예배가 따분하고 예배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함과 진정함이 결여되면서 결국 형식적인 예배가 고루한 예배가 드려지게 됩니다.

기도가 어색하고 되지 않습니다. 그 마음 속에 세상이 가득한 가운데 드려지는 기도는 전혀 마음이 실리지 않고 믿음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주님께 기도가 자꾸 줄어들고 기도를 하여도 형식적인 잠깐의 기도로 끝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 속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게 되면 대화가 멀어지는 것처럼 자꾸 기도하는 시간이 줄고 기도하는 마음이 줄어들게 되는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까? 새로운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사랑이 식어지면 죄를 짓고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이전에는 작은 죄를 짓고도 두려워하고 떨면서 회개하였는데 차츰 차츰 죄를 짓고도 담대하게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너무 무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죄에 대하여 자기를 합리하하고 변명하면서 자꾸 궁색하게 자기를 지켜나가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하여 무감각한 그 사람의 중심은 구원의 감격이 식어지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자꾸 식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하여 죄를 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게 된다.


3. 첫사랑을 어떻게 회복해야 합니까?

첫째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5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여기서 먼저 우리 자신들의 실패한 지점을 잘 살펴보아 생각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 사랑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자신도 생각하지 못하는 가운데 속으면서 사랑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질될 때 보면 서서히 조금씩 잘못되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무너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마음에 생길 경우에 첫사랑을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세상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돈이 될 수 있고 그것이 쾌락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둘중에 하나입니다.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사랑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 마음에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열정들이 식고 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점점 주님에 대하여 나태하게 되고 결국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을 없애는 가장 무서운 요인은 외부의 박해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에 주님이 기대하는 사랑을 지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첫 사랑을 회복하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 회개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듯이 내가 서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역하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기 기억할 것은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큰 일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우리가 강조한 것은 영성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주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영성의 사람입니다. 영성이 있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첫사랑의 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교회는 무엇보다도 주님과의 처 사랑의 감격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과제입니다. 주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시는 사람 기뻐하시는 사람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회개하는 곳에 회복의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회개하는 곳에 주님의 사랑이 회복되고 회복하는 곳에 주님의 역사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 처음 행위가 무엇입니까? 처음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처음 그 간절한 마음으로 몸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경배하든 그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 열심과 그 중심의 아름다운 순수함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모습을 갖으라고 합니다. 사랑은 쇼가 아닙니다. 사랑은 행사도 아닙니다. 사랑은 말도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그 첫사랑의 회복은 나의 전부를 드리는 희생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면서 살아가는 삶이 있는 곳에 바로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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