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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 홀로, 주님과 함께 (신 26:1-11, 롬 10:8-15, 눅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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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명한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글 가운데 최근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이 오늘 우리 설교 제목인 “나 홀로, 주님과 함께”라는 책입니다. 이 책 처음에 헨리 나우웬은 “외딴 곳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막1:35 말씀을 다룹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는 말씀입니다. 새 번역에서는 “아주 이른 새벽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여기 “외딴 곳”이라는 단어에 큰 비중을 두고 그 중요한 의미를 상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사역은 매우 막중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는 매우 바빴습니다. 일생이라야 33년, 공생애 기간은 불과 3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나는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완성하기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 즉 “다 완성하였다”라고 외치셨습니다. 33년의 일생, 아니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역을 다 완성하시자면 그 일이 얼마나 바쁘셨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가르치시랴, 전파하시랴, 고치시랴 그래서 심지어 식사하실 겨를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피곤하셨든지 풍랑 이는 바다에서 그렇게 배가 부대끼는데도 주님은 곤히 잠드실 정도였습니다. 

  굶주린 5천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곳곳마다 병든 사람들이 밀려왔습니다. 그들을 일일이 안수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어느 날은 집에 계셨는데 얼마나 많이 몰려왔든지 병든 사람을 데려온 이웃들이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서야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어떻게 이런 많고 중한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니 그 인기가 절정일 때 왜 예수님은 군중들의 간곡한 부탁을 다 뿌리치고 십자가를 향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까? 왜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헨리 나우웬은 이 모든 일들의 배후에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한 단서를 바로 막1:35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외딴 곳”입니다. 예수님 사역의 비밀은 다름 아니라 아침 일찍, 새벽 동이 트기 훨씬 전에 기도하러 갔던 저 외딴 곳에 숨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 외딴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실 용기를 발견하셨다고 했습니다.

  요5:30에서 예수님은 “나는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오직) 나를 보내신 분의 뜻대로 하려하기 때문이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 “외딴 곳”은 예수께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곳이요, 하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곳이요, 동시에 지혜와 능력을 부여받는 곳이었습니다. 이 “외딴 곳”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생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라고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셨어도 그 “외딴 곳”을 마련하셨고 또 찾으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 우리들의 신앙과 삶의 실패의 원인은 결국 우리 삶에 예수님과 달리 “외딴 곳”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성공적인 신앙, 성공적인 인생을 위하여 주님처럼 이른 아침 외딴 곳으로 주님을 찾아가는데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 첫 주일을 마지하면서 나에게는 과연 저토록 절실한 “외딴 곳”이 있는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니 내 삶에 저 “외딴 곳”을 마련해야 하겠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고, 그 뜻을 살피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지혜와 능력을 부여받아야 하겠습니다.

2.  오늘 누가복음 본문은 예수께서 그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광야에서 40일 40야를 금식하시고 난 다음 마귀에게 시험 당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에서 승리하신 이야기입니다. 이 광야도 따지면 주님의 “외딴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승리는 바로 우리 주님의 전 생애의 승리에 대한 전조요 또 그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시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시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옛날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지금 40일을 굶으신 우리 주님 앞에서 사탄은 우선 네 주린 배부터 채워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우리 옛 말에도 “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듯이 남을 구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합니다. 나중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네가 거기서 뛰어내려 네 목숨부터 구해봐라 그리하면 우리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의 이 제의에 대하여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당면과제는 경제문제가 아니라 그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먼저 자기 자신의 배부터 채우려고 무슨 기적을 행하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 뜻이 아닌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는 가장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게쎄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야 말로 우리 주님께서 “외딴 곳”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확신하게 된 생애와 사역의 목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서는 돌덩이 하나로도 떡을 만드시지도 않으셨으나 굶주린 5천명을 위해서는 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로 이적을 베푸셔서 그 수많은 군중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은 홀로 무엇인가를 소유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셔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나 홀로 그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나 홀로 소유할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사탄의 두 번째 시험은 순식간에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권위와 영광을 네게 주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시험입니다. 예수님 제자 가운데 가나나인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현 체제를 뒤집어엎자는 과격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원하는 것은 이런 세속의 권력을 잡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어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유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유대인인줄 알고는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때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 동네를 태워버립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잘랐을 때 “내가 이제라도 아버지께 원하면 12영이 더 되는 하늘 군대를 보내시지 않을 줄 아느냐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 말씀은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세상 권력을 장악하여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지배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막10:45에 “이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또 때로는 교회가 세속적인 방법으로 힘을 사용하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 힘이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면 교단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위해서도 세속적인 방법, 다시 말하면 마귀에게 무릎 꿇으면서까지 그것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한국 교회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힘이 많아서 악용하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삼손처럼 우리의 힘을 기생의 치맛자락에 맡기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영적인 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기 원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세의 변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그리스도인도 교회도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줄 믿습니다. 이 사순절에 끝없이 섬기기 위하여 영광의 보좌까지 다 버리신 주님과 함께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세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하나님이 그 천사들을 보내서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해주실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시험입니다. 말하자면 만천하에 자기 자신을 한번 과시해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 욕구 충족입니까?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도 어떤 종교, 아니 미신에서라도 부추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0:31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서 우리 요리문답 첫 번째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옛날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을 신적인 위치에 올려놨다가 짐승처럼 된 일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헤롯은 사람들이 자기 연설을 듣고 “이는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했을 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 같은 凡夫凡婦들에게도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고 싶은 유혹이 끝없이 손짓합니다. 특히 여러분이 교회를 섬길 때 절대로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앉으셔야 할 자리를 자기가 탈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이 거룩한 절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주님과 새롭게 만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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