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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의 증거를 보이십시오! (빌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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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화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갈취하여 일부는 민족의 압제자인 로마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이 착복했던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믿은 후, 나누고 베푸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을 핍박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이방인 선교의 제1인자가 되어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바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16세에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갔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주색(主色)에다가 노름에 빠지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으나, 그 후 예수님을 믿어 변화된 죠지 뮬러는 가난한 고아들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뜻과 여러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헌신했으며, 그리고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초창기, 평양의 유명한 조폭 두목인 김익두가 변화되어 목사가 된 것은 당시 평양 사람들이 알고 역사가 증거하는 유명한 변화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은 후, 그 인격과 삶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기독교가 이렇게 변화의 종교라면, 예수님을 바르게, 그리고 인격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 인격과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을 믿은 후로 여러분의 인격과 생활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변화로 인하여 놀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지요?

2007년도를 시작하면서 모든 모임과 집회의 화두는 “변화”였습니다. 개인의 변화, 가정의 변화, 교회의 변화, 그리고 이 땅의 변화 ….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올해를 내다보면서 가졌던 소망이자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람이나 소망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즉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의 삶에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본문에 나오는 ‘변화를 경험한 두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여러분에게도 주님과 복음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기대가 생겨나고, 또 그것을 경험하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변화의 두 가지 모습

빌레몬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와 함께 사도 바울이 주후 60년에서 63년 사이에 죄수로 지내던 로마에서 기록한 서신입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상태였는데요, 9절과 10절을 보면,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옥중에서 쓰여진 이 서신은 바울이 개인에게 쓴 유일한 편지로써 지금의 터키 중서부쪽 브루기아 지방에 사는 빌레몬에게 보내졌습니다.

1) 오네시모

이러한 배경을 가진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첫번째 변화는 ‘오네시모’의 변화입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 ‘유익하다’라는 뜻으로, 그는 골로새 지방의 유지인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이거나 노예 상인들이 팔아 넘겨 노예가 된 사람들이었는데 그 수는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으로 재산의 피해를 입고서도 4천여 명의 노예를 소유했었다는 기록이 있고, ‘트리말키오’란 사람의 가정에서 하루에 새롭게 태어나는 노예만도 남자 아이가 30명, 여자 아이가 40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한 사람이 소유한 노예만도 수 백 수 천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노예들은 인간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물건과 같은 하나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시장에서 거래되어 사고 팔렸습니다. 팔고자 하는 사람들은 노예를 진열해 놓았고, 사려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노예를 찔러 보기도 하고, 입을 벌려 보기도 하고, 주변을 걸어 보게 한 후에 값을 흥정해서 구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팔려간 노예들은 사소한 잘못에도 아주 잔인한 벌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애완용 메추라기를 실수로 죽게 한 노예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했습니다. 90년 경, 사도 요한의 때에 기독교를 박해했던 도미티안 황제는 목욕물을 너무 뜨겁게 데웠다는 이유로 노예를 화로에 태워 죽였습니다. 베디우스 폴리오는 수정으로 만든 잔을 떨어뜨려 깨뜨린 노예를 연못에 집어던져 칠성장어에게 산채로 뜯겨 죽게 했습니다. 먼지 한 점 묻은 것, 은 조각 하나 잘못 닦은 일, 파리를 쫓지 못한 일, 식탁이나 의자를 바로 놓지 못한 일, 주인이 식사하는 중 옆에서 시중을 들면서 재채기나 기침을 하거나 옆의 노예와 속삭이면서 말을 하거나, 술시중을 잘못 들면 채찍이나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여주인들도 하녀들이 다듬어준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손톱으로 할퀴거나 채찍질을 했습니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자신이 노예로 태어나,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그리고 노예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철이 들면서부터는 자신의 처지와 환경을 더 견딜 수 없어 고통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네시모는 더욱더 반항적인 사람이 되었고, 언제 어떻게 그 속에 있는 증오와 미움이 폭발할지 모를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네시모는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쳤는데요. 당시 노예들이 도망할 때는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하거나 주인의 가족들을 살해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도둑질하여 도망을 갔습니다. 이 일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용서받기 어려운 큰 죄였습니다. 도망친 노예들이 붙잡히면 “도망자(fugitivus)”란 뜻의 ‘F자’를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찍힌 후에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습니다. 주인은 범죄하고 도망친 노예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었습니다.

주인의 돈을 훔친 오네시모는 수많은 인종들과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로마로 갔습니다. 로마는 당시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로 간 까닭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누구를 통하여 그가 바울을 알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고,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가 사도 바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을 대하는 바울의 태도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예수님을 소개했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참 자유와 해방은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굳이 노예라는 신분의 변화가 없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반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모르면 노예처럼, 혹은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오네시모는 변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아무 쓸모없던’ 오네시모였지만,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은 후 ‘진정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부모가 ‘유익한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제 이름 값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새 사람이 된 오네시모를 사랑했고, 그가 복음의 일군이 되어 자신과 동역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이제부터는 노예로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써 영접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자신이 갚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즉 어떤 추궁이나 처벌을 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노예로 계속 지내게 하지 말고 자기와 함께 일 할 수 있도록, 즉 복음의 일군으로 살도록 다시 자신에게로 보내 줄 것도 부탁했습니다.

이와 같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쓸모 없고 죽어 마땅한 노예 오네시모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쓸모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오네시모는 설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위대한 감독이 되었으며, 로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오네시모가 보여주는 변화의 모습은 바로 기독교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의 변화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변화들 중의 아주 작은 경우에 불과합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후 변화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바로 여러분의 인격과 삶에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명’ 운운하며 자신의 처지를 탓하고 불행이나 가난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변화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 눈치나 보고, 때로는 은밀한 것을 즐기는 노예근성이 변화되어야 하며, 장소를 달리하고 주위를 바꾸면 자신도 달라지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변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오네시모처럼 자신의 신분, 처지, 환경의 변화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영혼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는 변화, 그러면서 예수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평안과 부유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변화의 모습입니다.

2) 빌레몬

변화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빌레몬입니다. 빌레몬과 바울의 첫 만남은 에베소에서였습니다. 당시 3차 전도 여행 중이던 바울은 에베소에 장기간 머물면서 그곳의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소아시아 지역 골로새의 부유한 유지인 빌레몬이 사업차 에베소를 방문했다가 바울로부터 주님의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고향 골로새로 돌아온 빌레몬의 변화는 모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습니다. 그는 아직 교회를 갖지 못한 그곳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제공하는 등 정말 헌신적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빌레몬의 삶에 대해 오늘 본문은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즉 빌레몬은 주님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과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남다른 사람이었으며, 다른 사람들과 성도들을 뜨거운 심장으로 섬기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바울 사도까지도 인정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를 충만한 믿음과 사랑으로 잘 섬겼으며, 그의 아내 압비아도 구제와 선행에 노력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돈 많은 부자, 골로새의 유지 정도였으나, 주님을 믿은 후에는 그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빌레몬 때문에 골로새 교회는 별 어려움을 겪지 않고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빌레몬의 물질적인 봉사, 그의 신앙과 인격과 영적인 지도력이 탁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로마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빌레몬서 1:7)”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만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바울에게까지도 기쁨과 위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이 빌레몬에 대해 바울은 1절에서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적어도 빌레몬은 대 사도 바울로부터 두 가지 호칭으로 불려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빌레몬은 “사랑을 받는 자”였습니다. 이 호칭은 빌레몬이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빌레몬은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고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연인이나 자녀에게 말하듯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바울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빌레몬은 바울 사도에게 “동역자”로 불렸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사용한 독특한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르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동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빌레몬은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걸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빌레몬이 바울에게는 마치 직업상의 동업자, 아니 사업 파트너처럼 주님의 일의 동역자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이 정말 그대로인지 검정이 될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네시모’ 문제였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믿음의 형제로 받아들일 것을 부탁해 온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라고 부탁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당시 사회 제도가 주인과 노예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었으며, 주인에게 죄를 짓고 도망한 노예를 용서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바울은 오네시모를 도망친 노예로 받지 말고, 바울 자신처럼 받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부탁에 대해 빌레몬이 보여주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신에게서 도망친 노예를 용서할 뿐 아니라, 그를 주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이는 위대한 변화를 그가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에게는 사람도 아닌 물건과도 같은 노예인데다가, 자기 재산을 훔치고 도망한 용서받을 수 없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그를 자신과 같은 형제로 여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오네시모가 자신을 죽일 지도 모르는 주인 빌레몬을 찾아가는 결단보다 수백 수 천배 더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노예 하나를 주 안에서 한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를 사역자로 대우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빌레몬은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복음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신앙은 인격과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해 줍니다. 복음으로 인해서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그들과 맺는 관계가 달라지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용서하지 못하는 관계, 풀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 인간관계가 있다면, 아직도 원수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복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빌레몬에게 복음은 불가능한 용서를 하게 했으며, 노예를 형제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주님 안에서 새로운 가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3. 삶의 변화, 관계의 변화

조선 말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있었습니다. 백정은 당시 사회의 가장 천한 신분으로서 온갖 서러움과 박해를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식들만큼은 백정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당에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들이 세브란스의 원장인 선교사를 불러와 치료를 하게 함으로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생명의 은인이 믿는 예수님을 자신도 믿겠다고 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구원의 기쁨을 감당하지 못하여 서울과 수원을 오가며 모든 백정들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가 전도한 백정만 해도 수백 명이 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서울 성동교회를 설립했고, 그 교회의 초대 장로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한국 최초의 외과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탄원으로 말미암아 천민들도 호적을 가지게 되었으며, 인구조사에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하찮게 취급받던 백정이었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변화되었고, 그 변화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오네시모를 통하여 한 사람이 주님을 믿으면 변화된다는 것이고, 신분이나 환경이 변하지 않아도 더 깊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빌레몬을 통하여 주님을 믿으면 사람 취급도 안하던 사람을 한 형제로 여기는 등 새로운 인간관계의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이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복음이 여러분에게 오네시모와 같은 인격의 변화를 일으키며, 빌레몬과 같이 인간관계의 변화를 일으키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놀라운 주님의 복음의 능력을 맛보고 그것을 널리 세상에 알리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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