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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 문을 여는 비결(3) (벧전 3: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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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늘 문을 여는 비결 (no 3)
본문 / 벧전 3:8-11

  지난 11일 우리는 강 선교사를 태국 선교사로 파송하고 강선교사는 20일 출국했습니다. 담임목사와 선교위원회 위원 세사람이 동행하여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치앙마이 선교 센타 임대기간이 종료되어 재계약을 체결하였고 김선진 선교사와 이응윤 선교사의 사역현장을 돌아보고 안식년을 맞는 이응윤 선교사와 11월에 사역을 마쳐야 하는 김선진 선교사의 진로에 관련된 사상들을 살피고 돌아왔습니다.
  태국은 우리교회의 중요한 선교지입니다.
  태국, 중국 운남성과 라오스 미얀마 등을 연결하는 동남아미션벨트의 중요한 구심점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태국에 갈 때 마다 그곳의 영적 분위기 때문에 가끔씩은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180년의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리스도인 1%도 안되는 나라 태국, 우리 교단 선교사님들 108명이 선전하고 있지만 아직도 태국이라는 나라는 섣불리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불교가 생활이고 생활이 불교인 그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는 소리는 자신들이 섬기는 수 많은 신들 가운데 또하나의 신을 모시라는 소리정도로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이든 될 수 있으면 많은 신을 섬기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교회에 나와서 자신들이 믿는 신중에 하나님 내지는 예수님 신을 하나 추가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에 섰을 때 마음이 두려워 심이 떨었다고 한 것처럼 과연 이곳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저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능력감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왕을  신처럼 받드는 그들에게 영원한 왕 예수를 믿으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120년 전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의 땅 조선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태국인들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웃어주는 그 미소 뒤에 숨어있는 그들만의 고민과 삶의 애환들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러한 태국땅에 4명의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이 땅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 질 날은 거의 불가능한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셔야 합니다. 그 옛날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같은 선교사님들이 우리 나라 조선 땅에 와서 느꼈을 그 마음을 우리가 느끼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김선진 선교사가 선교 보고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글성이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 이 젊은 날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장 열매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열매를 바라보지만 지금 당장 열매가 없음을 인해서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매는 주님이 거두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열매는 맺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하게하셔야 하고 주님이 열매를 거두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 4:3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열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선교도 전도도 하늘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면 땅에서 사람의 마음도 열립니다. 전도의 문 선교의 문을 여는 열쇠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의 보고를 여는 비결 즉 하늘의 보고를 여는 열쇠에 관련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늘의 보고가 있다는 것은 이미 신명기 28:12절에 언급하였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의 보고를 여는 비결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음을 상고했습니다.
  첫째로 말씀 순종입니다.
  둘째는 십일조입니다.
  셋째는 베푸는 삶입니다.
  넷째는 말씀 사역자와의 관계입니다.
  다섯째는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하는 것으로 “언어” 즉 말입니다.

  사람이 입으로 무슨 말을 하느냐 따라 하늘 문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롬 10: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언어입니다. 마음의 믿음이 입으로 표현되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입의 말에 따라 구원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입으로 부인하면 구원의 문이 닫히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의 문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보고의 열쇠는 말에 있습니다.

  본문 벧전 3:10절에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궤휼(詭譎)을 말하지 말라” 고 했습니다. 좋은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혀에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요소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감정을 표현합니다. 지식을 전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신뢰와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 사회를 가리켜 언어 사회 또는 언어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든 이 언어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서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언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 의해 하늘 문이 열고 닫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3:6절에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혀는 불이기 때문에 생의 바퀴를 불사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의 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옛 사람의 본성에 다시 불을 붙여서...”입니다.
  옛사람의 본성은 죄입니다. 결국 옛사람의 본성인 죄에 불을 붙여서 망하게 하는 것이 잘 못 사용된 혀 즉 언어입니다.  그러기에 무심코 쓰는 말(혀)에 하늘 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편 45:2절에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와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 12:13절에서는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인하여 그물에 걸려도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 라고 했고 잠 18:7절에서는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하늘의 보물창고가 닫힐 수도 있고 열릴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 문을 닫는 언어는 무엇일까요?

  1. 하늘 문을 닫는 언어
  1) 부정적인 언어 / 할 수 없다. 안 된다. 못한다. 없다. 잃었다. 한계가 있다. 틀렸다. 죽겠다. 끝났다
  2) 저돌적이고 공격적이며 책임 전가적 언어 /  너 때문이야 ..
  3) 세속적인 저속한 욕설
  저속한 욕설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욕설은 저주받은 인간의 타락한 인간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저쪽에 있을 때 사용하던 저속하고 더러운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5:22절에 의하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라고 했습니다. 

  4)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험담하는 언어
  마7:2-3절을 봅시다.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롬 14:10절에서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라고 했습니다.

  비난 / 남의 잘못이나 흠을 나무라는 것
  비판 / 남의 잘못이나 흠에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가미하여 결정적으로 판단하여 말하는 것
  험담 / 적극적으로 남의 흠을 찾아내어 하는 말로 남을 깍아 내리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중상모략 / 남의 좋지 못한 말을 부풀리거나 거짓으로 꾸며내어 그 명예를 손상시키는 꾀와 행위

  5) 불신앙적인 언어
  불신앙적인 언어란 불평 원망의 말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면 불평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니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설령 누군가가 자신을 험담하는 말을 했다고 전해줘도 설마하면서 그냥 그 사람을 믿어버리세요. 그러면 원망이 생길 수 없습니다. 

  이런 언어들을 멀리해야합니다.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열린 하늘 문을 닫아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문을 여는 언어는 무엇일까요?

  2. 하늘 문을 여는 언어

  1) 평안의 언어입니다.
  왕하4장에 보면 엘리사를 영접하고 대접하였던 여인이 아이가 없엇는데 엘리사의 축복기도를 받고 아이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서 그만 갑자기 죽었습니다. 죽은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여인은 엘리사를 만나러 길을 떠납니다. 그때 그의 남편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종의 만나러 가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아이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평안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왕하 4:22-2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갔습니다. 엘리사가 그녀에게 물었슶니다. 그때도 엘리사에게 “평안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왕하 4:26절을 보십시오.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놀랍게도 여인은 계속 평안의 선언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할 때 사람들은 얼마나 나쁜 소식들을 말하고 싶어 합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내 아들이 죽었어 내 소중한 아들이 죽었단 말이야” 하면서 울고불고 했을 것입니다.
  평안의 언어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엘리사는 그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여 죽은 아이를 살렸습니다. 수넴 여인은 사망의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아들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안의 언어가 하늘 문을 엽니다.
 
  2) 소망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대상자에게는 절망을 선포하였어도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소망을 말하셨습니다. 렘 29:11-13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절망적인 언어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소망성이 있습니다. 재앙 중에도 긍휼을 제시해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어였습니다.

  3) 믿음의 언어입니다.
  계3:15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하라는 말씀은 언어 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언어는 믿음과 확신에 찬 언어여야 합니다. 막11:23절에 예수님은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산을 향해 “바다로 옮겨가라” 라고 말하고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믿고 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언어가 바로 하늘문을 여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1:20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언어는 긍정적이여야 합니다. 부정적인 언어는 사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아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의 언어를 사용합시다.

  4) 사랑성의 언어
  허물을 덮어 주고 용서하는 언어, 상처받은 사람에게 따듯한 위로의 말 한 마디가 천금보다 더 귀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잘했다. 괜찮다. 미안해 등등...
  바울 사도는 빌2: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권면 합니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대한 칭찬의 말로 나타납니다. 비방하고 험담하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칭찬할 것이 없고 허물이나 약점이 보인다면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5) 축복성의 언어
  벧전 3:9절에서 하나님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복을 빌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축복이 담긴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마 10:12-13절에 보면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마 10:12-13)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느 집에 가든지 그 집을 위해서 축복성의 언어를 사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가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복이 그에게 임하고 합당치 않으면 그 빈복이 축복한 사람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축복을 비는 언어는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복을 빌었던 예수님을 따라서 축복성의 언어를 사용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문을 여는 언어를 사용합시다. 그래야 여러분 개인에게나 우리 교회에 하늘의 보고가 열립니다. 열린 보고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이 공급되어 세계선교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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