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보다 앞서야 한다 (창 39:1-6)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보다 앞서야 한다.
창세기 39:1-6

오늘 주님의 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무엇을 사랑할 것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벌어 놓은 재물들, 내가 입던 아름다운 옷들 ….  저는 무언가 시간이 갈수록, 날이 갈수록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밖에 없다는 고백을 해 봅니다.  진정 우리는 주님밖에 사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에 앞서야 됩니다.

사실, 나를 제일 잘 아는 분만이 나를 제일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아직 희망도 없고 장래도 없는 어린 생명을 끝까지 붙들 수 있는 것은 그 어머니야말로 그 아이를 제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보다도 나를 더 깊이 알 수 있는 분!  그 어머니는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만 알고 있지만, 내일의 나는 모릅니다.  내일의 나까지 알 수 있는 분은 누구일까?  내 생명을 이 땅에 내신 생명의 주인 되시는 주님, 바로 주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나를 사랑한 자가 나의 사랑을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다.  아닙니다.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 생명의 주인 되신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온 오늘 이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했습니다.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초청하셨다, 나를 부르셨다는 이 말씀을 확실히 붙잡고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내가 땅 끝에서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두려워 말라 내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망이라는 어리석은 결론을 내리지 마십시오.  절망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결론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자는 나를 초월하는 지혜가 오는 겁니다.  내 지식과 내 생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를 감싸게 되는 겁니다.

모든 생명의 희망되신 예수님을 붙들고 오늘 주님 전에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내 삶의 모든 부조리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나태와 향락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탐욕적인 인생관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모든 빈곤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모든 부정적인 사고의 틀에서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모든 영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하십시오.

성경에서는 예수를 알지니 예수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땅의 진리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로 알면 틀림없이 진리가 옵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보며 오늘 이 시간 주님을 부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얻으리로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얻습니다.  믿으십니까?

  ♬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오 주 예수 오 주 예수 구원을 얻으리로다
오 주 예수 오 주 예수 구원을 얻으리로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대한 세계로 다시 뛰어넘을 수가 있습니다.  은혜가 있으면 내가 이제껏 알지 못하던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대한 바다로 헤엄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 누워있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사고의 틀에 갇혀 있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누워있을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렇게 옹졸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어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우리 언양 영신교회, 내가 뿌리를 내리고, 내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이 재단에서 부흥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힘차게 고백하는 마음으로 따라 하십시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리라!"
"나 때문에 반드시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부흥한다!"

우리가 어떤 기도를 잘 한다, 아니면 금식을 잘 한다, 성경을 달달 외운다, 이런 것들은 물론 다 중요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나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되는 확신의 믿음이 제일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의 한 때가 반드시 오게 하리라!'
이 말씀을 깊이깊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기도하십시오.  적어도 한 사람이 일년에 두 명은 전도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성경을 못 읽어도 좋습니다.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도 큰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죽어 가는 한 생명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일마다 때마다 전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권합니다.  전도를 하십시오!!  내가 정말 생명의 줄기를 발견했고, 자유의 줄기를 발견했고, 내가 정말 인생의 줄기를 발견했다면 남에게 알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 소중한 삶의 가치를 남에게 알려야 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파수꾼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시대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밤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역사가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더욱 빛이 납니다.  믿음의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믿음의 사람입니까?  파수꾼입니다.  파수꾼이여, 이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파수꾼이여, 여러분의 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다 질그릇입니다.  질그릇은 깨어지기를 잘 합니다.  질그릇,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겁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그 질그릇 안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는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배가 담겨있으면 그 그릇의 가치는 보배 때문에 전혀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잘 것 없는 질그릇 같은 생명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담겨있으면 전혀 달라집니다.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  그 질그릇을 누가 쓰느냐?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받으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고백 "하나님! 나를 다시 써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사람을 주님은 다시 쓰십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써주면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헌신 할 것이 없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쓸 곳이 없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건강하다, 잘 생겼다, 이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과거 제가 전도사 시절에 무서운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성도님이 찬양하면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릴 때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한 은혜와 감동을 받았더랬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지금 저는 건강을 잃었습니다.  누구처럼 뛰고, 달리고, 축구도 하고…, 그럴 수 없는 제가 어떤 때는 굉장히 서글퍼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게 건강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헌신할 수 있는 내 자리를 알지 못하는 의미가 없는 생명이라면 그 건강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젊음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산다는 것은 생명을 연소하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어딘가 태워야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보람된 곳에 태워야 됩니다.  의미 있는 곳에 태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태워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태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주의 몸된 교회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거룩한 일에 내 한 몸 태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가 탈 때는 밝은 빛이 납니다.  타지 않는 초,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타지 않는 초, 무슨 빛이 있습니까?  주님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위대한 헌신의 불꽃을 태울 수 있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성령의 능력을 받아 결단하십시오.
'내 이 한 몸 주님의 교회의 부흥을 위해 위대한 헌신의 불꽃을 태우리라!'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기둥 같은 주인공들, 기둥 같은 일꾼들이 되기 위해서 헌신은 산소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헌신만 일어나면 그 생명 속에 최상의 것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헌신의 터를 찾은 사람은 죽음도 피해간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이 그 헌신을 이루기까지는 절대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쪼록 사명적인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명을 불태울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으십시오.

믿음이란, 모든 미완성을 수용하는 능력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오늘의 미완성도 하나님의 복된 미래로 보게 되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일입니다.

가슴 아픈 일은 통성으로 기도할 때 들어보면, 대개는 다 "하나님! 나를 사랑해 주세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전부 자기만 사랑해 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누가 사랑합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는 겁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전부 앉아 가지고 '나만을 사랑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식들인데, 여러분, 자식 키우는데 자녀가 매일 엄마보고 "엄마, 나만을 사랑해 주세요"  "이것 좀 주세요"라고 한다면 징그럽고 귀찮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믿음의 사람의 심령의 지도에 펼쳐지는, 새로운 대륙과 새로운 도성과 새로운 땅이 있음을 확신하고 믿음의 닻을 저어서 가게 됩니다.  그 항해가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따라하십시다.
"아직도 내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게 인생의 성급한 판단한 내리지 마십시오.  종지부를 찍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생명의 능력을 붙들고 일어나십시오.

인생 길에 변화를 제외하면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서 하늘의 능력을 힘입으십시오.  하늘의 힘을 힘입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방망이와 같습니다.  말씀의 방망이에 한 대씩 얻어맞으면서 변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돌 같은 내 마음을 부수는 방망이입니다.  이날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먼저는, 눈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눈에 반하는 것입니다.  눈에 반하고 눈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안 따르거든 이 말씀을 깊이 새기십시오.  절대로 사람에게 실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눈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눈에 미치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식을 바라보는 그 어머니의 자애로운 눈빛, 그 눈에 반하는 것입니다.

처음 나온 성도님을 맞으려고, 문 밖에서 어디 오는가, 지금 오는가? 하면서 기다리는 교인들의 눈, 전도 왕들의 눈, 그런 눈이 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얻으려는 눈이 있습니다.

또, 목회자를 사모하며 다음 말씀이 무엇일까?  저 말씀 다음에는 내 심령의 양식이 되는 어떤 말씀이 나올까?

그것을 바라보는 순수한 눈빛들, 사모하는 눈빛들….  그러므로 눈은 마음의 그림입니다.  마태복음 6장 22절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몸을 밝히는 등불이 눈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워진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입니다.  눈이 어두워지면 온 몸이 어두워집니다.  눈이 밝아져야 됩니다.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영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눈빛이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아름다운 그 눈, 깊은 산 속의 바위틈에 솟구치는 샘물같이 깨끗한 그 밝은 눈, 그 눈 속에 미래가 있습니다.  그 눈 속에 건강이 있습니다.

여러분, 의사 선생님이 중환자를 볼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눈꺼풀을 까집어 봅니다.  "끝났는데…"  그러면 끝입니다.  눈에 생명이 있습니다.  눈에 자연도 있습니다.  눈에 우주가 있습니다.  눈에 앞날이 있습니다.  그 눈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간 옆 사람의 눈을 자세히 한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 눈에 생기가 있습니까?  그 눈에 따뜻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똑 쏘는 눈입니까?  흐리멍텅한 눈입니까?

사랑하는 생기가 있는 눈이 세상을 생기 있게 봅니다.  맑은 눈이라야 삶을 맑게 봅니다.  눈이 맑지 못하고는 절대로 세상을 맑게 볼 수 없습니다.  영안이 열리십시오.  영안만 열리면 주님께서 준비하신 크고 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여! 눈을 열어 주께서 준비하신 크고 기이한 하나님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지게 하옵소서."

이 고백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한결같은 안타까움이었습니다.  눈이 밝아지면 살 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눈부터 죽습니다.  생명체도 눈부터 죽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시장 가서 생선을 고를 때는 눈부터 봅니다.  제일 빨리 썩는 것이 창자보다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신경 근육이 제일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데가 입이 아니고 눈입니다.  신경근육의 4/1이 눈에 모여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눈이 비둘기처럼 온유하시기 바랍니다.  눈이 맑아지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하란 광야에서 하갈이라고 하는 여인이 집에서 쫓겨나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이를 데리고 광야 한 가운데서 물은 떨어지고 양식도 떨어지고, 동서남북을 헤아릴 수 없는 망망한 사막 한 가운데서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울부짖으며 물을 달라고, 양식을 달라고, 뙤약볕 밑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과 어머니는 발을 뻗고 그저 죽음의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죽을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는데 그때서야 하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 눈을 들어 뒤를 바라보아라"  그래서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해서 바라보니까 갑자기 눈이 맑아져 샘물이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눈에도 이와 같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그 얼굴에 화기가 있어야 됩니다.

행복한 가족끼리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상에 둘러앉아서 정다운 대화를 다루는 정겨운 얼굴, 화평한 얼굴을 상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에 똑똑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참 은혜로우시군요!"  "집사님, 은혜로우시군요."  이런 인사를 받는 얼굴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그 얼굴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내 얼굴을 내가 책임 져야지 누가 책임을 집니까?  인간의 마지막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내 표정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내 표정에 대한 선택은 내가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때리든 욕을 하든 내 표정의 선택만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스데반 집사님이 그랬습니다.  그분은 벌떼같이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돌을 맞았습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 얼굴은 천사같이 빛이 났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가 들어야할 이야기입니다.  초대교회 성도 속에 있던 그 얼굴의 능력, 그것을 우리가 본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의 얼굴에 생기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옆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얼굴에 생기가 있습니까?  혹여 그 얼굴에 불평 불만이 가득한 꺼무죽죽하지는 않습니까?  아무쪼록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으로 얼굴에 생기를 찾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얼굴에 때깔이 좋아야 사랑을 받습니다.

세 번째, 그 몸에 예수의 향기가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향기를 갖고 있습니다.  이제 봄이 되면 들판에 진달래가 피고, 아카시아 꽃이 핍니다.  그 꽃이 발산하는 향기는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꽃이 발산하는 짙은 향기를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 냅니까?  못 만들어 냅니다.

저 푸른 초원, 잔디가 풍기는 그 신선한 초원, 깊은 산 속에서 퍼져 나오는 싱그런 나무의 냄새, 그 흐르는 물의 냄새, 그 바위에서 나는 바위 냄새 ….  그 모두가 대단한 겁니다.

사람은 술에 취하듯 향기에 취합니다.  맑은 향기는 기쁨과 감사와 존경을 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에서 아무쪼록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축복합니다.

네 번째, 그 생명의 삶에 윤기가 나야합니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윤기가 있습니다.  꽃들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반들반들 합니다.  그러나 잘려버렸다면 그 꽃은 조금씩 윤기를 잃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아있습니까?  정말 살아있습니까?  생명의 윤택이 흐르기를 축복합니다.  오염되지 않은 저 깊은 산 속의 나무들은 윤기가 납니다.  윤기는 건강체의 특징입니다.  바른 믿음이 윤기가 납니다.  아름다운 믿음이 윤기가 납니다.

윤택하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윤택 속에 멋이 있고, 윤택 속에 여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부유해야 됩니다.  윤택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가는 곳마다 윤택했습니다.  요셉 때문에 윤택했습니다.  삭막한 곳에도 그 사람이 가기만 하면 윤택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가는 곳마다 윤택한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요셉이 자네는 우리 집의 복일세'  이것이 요셉을 아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갈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윤택한 역사를 일으켰는지, 시위대장 보디발이 그를 붙들고 하는 이야기가 "자네, 요셉이 이 집의 축복일세" 였습니다.  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을 때, 간수장이 얼마 있다가 하는 이야기가 "요셉이, 자네 우리 감옥의 축복일세" 였습니다.  그가 얼마 후에 천신만고 끝에 바로왕 앞에 서게 되었을 때도 왕이 요셉의 손을 붙잡고 하는 말이 "요셉이 자네, 우리 나라의 축복일세" 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이 말씀을 붙잡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이 말씀을 굳게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디, 어느 곳에서든지 여러분들에게 "자네, 우리 집의 축복일세"  "아무개 씨 자네, 우리 회사의 축복일세" "당신은 우리 언양 영신교회의 큰 축복입니다"라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다시 한 번 축복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가리켜 "저가 형통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형통하는 자'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는 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가는 곳마다 성공하는 자가 되더라.  번성하는 자가 되더라.  이 말의 원 뜻은 '하는 일마다 눈에 띄게 나아지더라'라는 말입니다.  그가 손만 대면 나아집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그 삶의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서 하나님의 사람이로구나! 하나님이 같이하는 사람이로구나! 라고 고백하더란 말입니다.

또 다른 뜻은 하나님의 가호와, 하나님의 인도가, 하나님의 복이 지키고 있더라.  저들이 형통하는 자가 되었더라.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다른 모든 충성보다 앞서게 될 때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다른 모든 충성보다 더 앞서는 충성의 삶을 사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어진 환경 가운데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옳다!  내 눈빛을 내가 선택하리라.  내 얼굴을 내가 선택하리라.  내 몸가짐도 내가 선택하리라.  우리가 환경을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대처하는 나의 삶의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이 있다고 자신하십니까?  남보다 나은 재물이 있다고 기뻐하십니까?  남보다 높은 명예가 있다고 자랑하십니까?  그러나 헌신할 수 있는 내 자리를 알지 못하는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땅에서 헌신 할 것이 없는 생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쓸 곳이 없는 재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한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보다 앞서야 한다.

"주여, 내가 어떤 환경에서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사람인 것을 증거 하겠나이다.
내게도 파수꾼의 사명을 주옵소서.
주님 앞에 헌신하며 태워지는 이 생명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