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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궁극적 관심 (사 4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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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리교 300만 총력전도 제1차 대회 아침예배 설교문 입니다.(왕대일 목사, 감신대 교수, 구약학)

궁극적 관심(이사야 49:5~7)

앨리스 그레이(Alice Gray)가 편집한 『내 인생을 바꾼 100가지 이야기』(Stories for the Heart- The Original Collections)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ꡒ한번은 마더 테레사가 전 세계의 왕들과 대통령들과 정치가들이 모이는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왕관을 쓰고 비단옷을 입고 보석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옷핀으로 여민 소박한 사리를 입고 있었습니다. 한 귀족이 테레사에게 다가와 그가 캘커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 일들을 언급하며 성공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실망스럽지 않은지 물었습니다. 테레사가 대답하였습니다. ꡐ아니오. 전 실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절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사랑을 베풀게 하려고 절 부르셨습니다.ꡑꡓ
오늘 본문은 부르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49장 5~7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소개됩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냥 ꡒ고난받는 종ꡓ이라고만 불립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대신 고난받는 종이 그가 해야 할 역할입니다.
이 종은 보기에 따라서는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우리 곁에 오실 때 종으로 오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빌 2:6~7). 높은 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마 20:26~28)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다듬을 때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고난받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ꡒ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ꡓ(사 49:5).

이 구절은 번역상 원문의 앞 뒤 순서를 바꿔 놓았습니다. 개역 개정판에 보면 그 순서가 이렇게 수정되어 있습니다. ꡒ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ꡓ(사 49:5, 개역개정판).
이사야 49장 5절을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본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종으로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자기의 일을 하는 종으로 삼으셨기에 그는 주님이 부리는 귀한 종이 되었고, 주님은 그의 힘이 되셨습니다.
부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종으로 불러 세운 자의 일을 해야 합니다. 부름 받은 사람이 귀한 종이 되는 것은 그가 부르심에 합당한 일을 할 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부름 받은 자의 힘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중에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서 부름 받은 종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10:44; 요 13:44). 처음 교인들은 스스로를 ꡒ하나님의 종ꡓ으로, ꡒ그리스도의 종ꡓ으로 받아들였습니다(벧전 2:16; 고전 7:22). 교회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땀 흘리는 종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화려함과 권력이 아닙니다. 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수건과 대야입니다. 컴퓨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지금 전산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고난을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컴퓨터가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ꡐ섬김ꡑ이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목회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는 ꡐ섬김ꡑ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감리교회는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회의하는 교단이 아니라, 선거하는 교단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교단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가 지금 심혈을 쏟고 있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에서 우리 교회와 교단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종으로 부르셨다는 소명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섬기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 우리 교회라는 것을 새삼 각성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부름 받은 자기 종에게 걸고 계시는 기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하신 사명은 무엇입니까?

섬김은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첫 번째 관심사는 부름 받은 종을 통해서 ꡒ야곱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는ꡓ 일입니다. 이사야 49장 5절 후반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ꡒ…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ꡓ(사 49:5).

야곱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한 사람을 종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야곱의 후손이라면 마땅히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야곱의 후손이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멀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아닌, 엉뚱한 자기 욕심으로 하나님의 일에서 벗어나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고난받는 종을 부르셔서 야곱 앞에 세우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회복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의 아들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로 다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이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교회를 사교모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공회당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성당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땅 끝까지 퍼지는 증인공동체가 되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회복의 사명을 오늘 우리 감리교인들에게 다시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전개하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이 이런 회복을 우리에게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섬김은 전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종의 사역은 전도에서 그 구체적 뼈대를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종으로 부름 받은 사람에게 위탁하시는 두 번째 궁극적 관심사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사야 49장 6절 말씀입니다.

ꡒ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ꡓ(사 49:6).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람의 회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역사(役事)가 땅 끝까지 이르게 되기를 바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맨 마지막 구절에 주목하세요. ꡒ내가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ꡓ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울이시는 관심은 하나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게 되는 일입니다.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을 복음서의 구절로 다시 읽으면 ꡒ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ꡓ(마 28:19~20)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뭇 민족의 빛이 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방의 빛이 되라는 말씀에서 전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깊은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불신하는 나라에게, 성령이신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구원의 도리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 된 자가 이루어야 할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으로 삼은 자에게 걸고 계시는 기대가 다름 아닌 전도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교인 수가 크게 줄어들고 있을 때 쏟아져 나온 소리입니다. 연합감리교회의 쇠퇴를 관찰하고 분석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ꡒ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ꡐ사람 낚는 어부들ꡑ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ꡐ수족관을 지키는 사람들ꡑ이 되는 것에 만족해 있었다!ꡓ 어부가 되기보다는 수족관을 감상하는 일에만 빠져 있다가 수족관에 심각한 누출이 생겨 교인 수가 끊임없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자기 반성이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도 알게 모르게 사람 낚는 어부들이 되기보다는 수족관을 지키는 사람들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수족관을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땅의 우리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수족관을 바라보는 관람객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우리 교회는 더 이상 생동적인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라도 다시 나서서 이방의 빛이 되는 사역에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합니다.
사제에 해당되는 라틴어 폰티펙스(pontifex)는 ꡒ다리 놓는 사람ꡓ(bridge builder)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전도는 바로 이 일을 이루는 구체적인 수단입니다. 감리교회 300만 총력전도운동은 바로 이 시대, 이 사회, 이 환경 속에서 세상의 뭇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르게 하는 다리가 되는 운동입니다. 우리가 이 일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들어서 열방을 향한 빛이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섬김은 선교입니다. 이사야 49장 7절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ꡒ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ꡓ(사 49:7).

본문에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는 다름 아닌 부름 받은 종입니다.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부름 받은 종입니다. 부름 받은 자는 정녕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멸시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우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름 받은 자는 누구나 ꡒ고난의 종ꡓ이 가는 길을 가야 한다고 타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사람이 처음에는 세상 가운데서 고난을 받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그 고난받음을 통해서 도리어 세상의 왕들과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존경받게 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난에서 부활로 가는 것이 신앙의 이치입니다. 낮아져야 높아진다는 것이 제자도의 원리입니다. 처음에는 멸시와 천대와 오해를 받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섬김의 방정식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이 그의 종 된 자에게 주시는 위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부름 받은 자가 무엇 때문에 미움을 받다가 어떻게 해서 높임을 받게 되는 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과 병행하는 이사야 42장 5~7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ꡒ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신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에서 나오게 하리라ꡓ(사 42:5~7).

고난받는 종이 이방의 빛이 되는 사역은 눈 먼 자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어두움에 빠진 자를 수렁에서 나오게 하는 사역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사회선교입니다. 사회복지선교입니다.
다른 교단의 교회를 예로 이야기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사지 「월간 중앙」의 2002년 5월 호에 기재된 순복음 노원교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교회는 설립 당시부터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머슴으로 섬김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1988년 여의도교회의 지성전으로 시작했지만, 1995년 자체 교회로 독립하게 되면서 현재 재적 교인 2만 명에 이르는 대교회가 되었습니다. 「월간중앙」지가 그 교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 교회가 대교회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교회가 설립 당시부터 장애인 교회를 같이 시작했다는 데에 그 기사의 포인트가 있었습니다. 창설 당시부터 그 교회는 노원구 관내 장애인을 목욕 시키는 일을 하였습니다. 1997년부터 기사가 게재된 2002년 5월 당시까지 연인원 1만 명을 목욕시켰습니다. 처음에는 교회 차량으로 관내의 장애인들을 모셔와 하루 임대한 목욕탕에서 무료로 목욕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목욕탕들이 더 이상 목욕탕을 그 교회에 임대하지 않으려 하자 (장애인들이 몸을 씻고 갔다는 소문이 나면 그 다음부터는 목욕탕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긴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교회를 새로 지으면서 아예 교회 건물 안에 장애인을 위한 무료 목욕탕을 설치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장애인을 위한 교회를 세우며 북돋아주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노원구 관내 장애인 9,200명 중 200명이 현재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교회를 개인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장애인들을 목욕시킨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의 여러 사람들에게 멸시와 오해를 받았지만, 이제는 그 일로 지역사회가 그 교회의 섬김과 희생을 높이 존경하는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 안에도 사회선교에 헌신하는 귀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런 교회들을 열거하지 않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우리 교단, 우리 교회의 노력에 그리 큰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웨슬리의 전도는 본래 사회복지적이었습니다. 한국 감리교회도 전덕기 목사의 경우에서 보듯이 본래는 사회선교하는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사회의 인정을 받자고 선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에서 주는 훈장을 받자고 사회복지에 눈을 돌리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사회복지를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의 중요한 사역으로 생각하자고 말씀드리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조지아주 아틀랜타에 있는 마르틴 루터 킹 센터에서 사람들에게 나눠 준 엽서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ꡒ모든 사람은 위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남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대학 학위를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당신이 하는 말의 주어와 동시를 일치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남을 섬기기 위해서 물리학의 열역학 제2법칙을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는 오직 은총으로 충만한 마음만이, 사랑에서 잉태된 영혼만이 필요하다ꡓ(도날드 E. 메서 지음, 이면주 옮김, 「새 시대 새 목회」, p.153).

인자가 다시 오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는 이가 누구입니까? 지극히 작은 형제자매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는 일을 한 자가 바로 주님의 인정을 받는 자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마 25:31~46). 주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세요. ꡒ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ꡓ(마 25:40).

감리교회 300만 총력전도운동은 두 바퀴 운동이어야 합니다. 두 바퀴가 리어카처럼 양편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바퀴가 앞과 뒤에 일직선으로 달려 있는 자전거식 운동이어야 합니다. 뒷바퀴는 세차게 밀고 나아가게 하는 구실을 합니다. 앞바퀴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조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뒷바퀴라면 교단은 앞바퀴여야 합니다. 신자들이 뒷바퀴라면 목회자는 앞바퀴여야 합니다. 전도가 뒷바퀴라면 선교는 앞바퀴여야 합니다. 교회의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원하여 온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초청하는 노력이 교회의 동력이 되고 힘이 되어 나아가게 해야, 교회는 지역사회의 구석구석을 돕고 구제하며 선교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의 사역을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부르심에 합당한 열매를 사회복지에서 맺어야 합니다. 전도를 통해서 교회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그래서 커진 역량과 은총을 사회의 그늘진 곳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듯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우리가 추진하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종 된 우리가 섬겨야 할 사역은 회복과 전도와 선교입니다.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궁극적 관심을 이루어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왕대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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