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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의 복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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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천국의 새 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천국의 대헌장은 그리스도를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신 영혼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팔복의 말씀에 가장 뿌리는 심령의 가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시민법에서 가장 으뜸은 심령의 가난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온유한 자의 복도 우선 심령이 가난함이 기초입니다. 팔복은 하나하나 말씀하신 것 같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함을 가지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심령의 가난은 천국의 계단을 올라가는 관문이 됩니다. 그리고 애통함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아픔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복을 받기 원하시면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전달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성경은 온유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온유하다는 이미지는 왠지 유약하고 힘이 없는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무기력한 것 같고 우유부단하고 굽신거리는 것 같은 인상을 던져 준다. 온유하다는 것은 심성이 좋은 사람이다. 법이 없어도 살아갈 사람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이기는 자가 살아남는과 약자는 사라집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짓밟고 일어섭니다. 사람들은 강한 사람에게/ 권력자에게 줄을 서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강한 사람에게 줄을 대고 있어야 내가 이익을 얻고 무엇인가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약 한자의 이미지는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온유한 사람은 때로는 미련하게 보이고 바보같이 보입니다. 무기력하게 보여서 힘이 없이 당하기만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잠시 뒤로 물러 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외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내면적으로는 여호와를 굳건히 신뢰하는 견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자유함과 평강을 유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절대적 신뢰가 있는 사람이 온유할 수 있다. 외유내강의 사람을 말한다. 내면의 훈련이 잘 된 상태이다. 이런 사람은 감정이나 충동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사려깊은 행동을 합니다. 진리에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을 쫓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온유한 사람은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파도와 폭풍 같은 현실에의해 요동하지 않습니다. 외부 환경에 의해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여전히 주님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에는 천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례는 베드로의 모습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베드로가 잡혀서 감옥 안에 있다. 그의 동역자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칼로 죽임을 당하였다. 유월절이 지나면 베드로도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군사 16명이 지키는 가운데서도 단잠을 자고 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깨울 만큼 곤하게 자고 있다. 상황에 의해 요동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적인 믿음에 의한 평강이 그를 붙들고 있기 가능한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들보다 온유함이 승하였다. 라고 한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 이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말한다. 성경이 그를 평가 할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보면 모세는 대단해 온유한 사람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민 12장에 보면 한 가지 사건이 나온다.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여자와(십보라) 결혼한 것 때문에 불평을 한 사건이다. 모세를 비방하고 어찌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하고 불만을 토한다. 모세에 대해서 불평이 많다. 몹시 못마땅한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미리암을 불러서 책망을 하고 진노 하셨다. 그리고 나병에 걸리게 하신다. 모세의 기도로 이 사건이 종결된다.

모세의 일생 속에 온유함을 최고로 보여준 것은 모세를 대적하는 사건이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모세를 대항하는 사건이 나온다. 이들이 회중 가운데 250명과 함께 당을 짓고 모세를 대적한다. 스스로 높이려고 한다. 모세의 지도자 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 반역 사건에서 모세는 반응하는가? 참 어구처니 없는 그런 일이었는데 모세는 온유함을 보인다. 외면적으로 보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도저히 참지 못할 그런 일이다.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판정을 기다리며 하나님께 중재를 요청한다. 자신을 대항하여 덤벼드는 불순한 무리를 향해서 분노와 울분을 터뜨리지 않는다. 배은망덕한 행위에 대해서 모세는 항거하지 않는다. 다만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심판을 원한다. 하나님만이 이 사건의 재판장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징계 하셨는가? 하나님은 땅바닥을 갈라서 이들을 삼켜 버리게 하신다. 지도자로서 분노가 솟구칠 법도 한데 모세는 온유함으로 하나님을 법을 따를 때 승리하였던 것이다.

온유함이 탁월한 모세 였지만 끝까지 온유함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신 광야를 행진할 때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에게 달려든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엎드린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 하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민20장10절에 보면 “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런데 방법이 잘못되었다. 온유함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약간은 분노가 섞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진노 하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하였는데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명하는 것과 내려치는 것은 다르다.

민수기 20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이스라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말씀한다. 탁월한 온유의 사람 모세가 딱 한번 온유함을 이루지 못하고 분노를 발하였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높은 산에 올라 눈으로 구경만 하게 되었다.

온유함을 시종일관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내게 닥쳐오는 모든 일들 가운데 일관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벅찬 일이다. 한 두 번은 참을 수 있고 온유한 태도를 지닐 수 있지만/ 끝까지 / 변함없이 /
한결같이/ 온유함을 갖는 것은 사실 어려운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에게는 본래적으로 온유한 성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난폭하고 잔악한 것이 인간의 생래적 본성이다. 인간은 죄악 가운데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죄 된 모양은 많아도 성령의 열매인 온유함은 없습니다.
일반적인 모든 사람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나를 먼저 생각합니다. 나 우선이지 남 우선이 아닙니다. 내 욕심을 챙기고 내 것이 먼저 채워져야 안심하는 존재 입니다. 어떻게 거칠고 난폭한 성품이 변화되어 온유한 심성을 가진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천사표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온유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통제를 받을 때 가능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온유하게 붙들어 맬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날마다 교만을 향합니다. 분노와 짜증과 신경질이 앞서게 합니다. 늘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충만하기도 합니다.

이 본성이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통제 될 때 균형을 갖춘 온유의 영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겸손한 심령으로 주님을 바라 볼 때 십자가에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온유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수양으로 어느 정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자기 훈련을 통하여 조절이 가능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온유는 없습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 만드시는 작업입니다. 온유는 성령의 작품입니다. 성도는 자신의 부족과 불완전함을 철저히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온유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본래 내 안에 없던 성령의 성품이 내게 들어와 나를 변화 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신 자는 온유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온유해 질 수 있습니다. 거칠지 않습니다. 부드럽습니다. 부드럽기 때문에 강합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부드러운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성령에 의해 제련되고 다듬어져서 생겨나는 후천적인 성품이다.

온유한 자의 최상은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 전서 2장 21-24절에 보면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며 위협하였는데도 우리 주님은 그들을 향해 욕하지 않으셨다. 23절에 보면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라고 말씀한다.
빌라도 앞의 예수님의 모습,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심문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면 무력하기 짝이 없고 만왕의 왕 같은 모양이 전혀 없어 보인다.
십자가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치는 소리와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묵묵히 견뎌내는 모습을 보이신다.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어린양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실상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해 기도하신 만유의 주인이시다.

온유하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온유의 모델이 되십니다. 최고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자기를 미워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것이 참된 온유를 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며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해야 온유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온유가 내 것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온유한 자가 받는 복은 어떤 것입니까?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땅이라는 것은 인간 삶의 근거입니다. 사람은 땅 위에서 살아갑니다. 적자생존이니. 약육강식이의 이론에 의하면 강한 자가 살아남고 온유한 자는 죽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보면 강한 자가 죽고 부드러운 자가 생존하는 것을 많이 본다.

고대 동물 중에 맘모스나 공룡은 강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멸종당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이나 히틀러는 무력으로 땅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온유함으로 온 세계를 정복하였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120명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향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얻어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도 온유한 사람이다. 그 신앙의 됨됨이가 제대로 되어 있는 사람이다.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어버린 후 그가 어떻게 고백하는가?
“ 주신 자도 여호와 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로다 .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 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욥 1장 21-22절) 라고 말씀한다.
신앙 때문에/ 믿음 때문에/ 조금만 손해 보고 조금만 피해 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대조적이다. 조금만 헌신하고/ 조금만 봉사하면/ 대접 받기를 즐겨하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신앙생활 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다.
하나님은 이런 욥을 버리셨는가? 모른 척 하였는가? 그것이 아니었다. 욥기 42장에 보면 욥은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2배의 축복을 받았다. 꼭 두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의 딸들은 전국에서 가장 예쁜 딸들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던 그의 아내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시37편9-11절 “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 하리도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습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21-22장에 보면 참된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받게 된다. 이것은 미래 적으로 주님이 주시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입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자기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벌컥벌컥 화를 내는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 자기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거룩한 일에 수종들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주님도 내 성격을, 성품을/ 성질을 고치지 못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국은 가겠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은 아니다. 변화된 성품, 변화하고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장4절
성도의 심령 가운에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표준 새번역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 3장16절

시37편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나타내시리로다 “
이 말씀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가슴에 충만하시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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