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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요구사항 (사 1:11~17, 롬 2:6-13,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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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 2000년 역사를 보면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도 신앙을 어떻게 가져야 구원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믿는 자는 반드시 믿음이 선행을 행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천주교 전통에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믿음이 주시는 선한 일을 행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루터란 사람이 와서 종교개혁을 할 때 사람이 하는 선행을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하면 선행이 너무 자유의지가 되고 하나님 없는 선행이 되고 돈을 사고파는 선행도 돼서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구원받습니다. 하는 슬로건을 내세웠습니다. 그래서 루터라는 사람은 선행을 강조한 야고보서 같은 서신을 쓰레기 같은 서신이라고 욕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동안 중세기 기독교까지 이어오면서 믿음만이 아니라 믿는 자는 반드시 선한 일을 해야 구원받습니다 하는 말이 틀림은 아니었으나 선한 일을 한다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과 믿음을 고백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닳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만이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근데 최근에 와서 우리 자신의 분위기 속에 자가 비판이 생겨납니다.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믿음을 고백하고 믿는 찬송을 부르고 믿는 기도를 드림에도 불구하고 왜 믿는 자들이 모인 곳에서 그렇게도 악행이 많이 생겨납니까? 믿으면 구원받는다 해놓고 나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오히려 부정과 불의에 앞장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다른 종교개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측에서는 우리가 너무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지하는 우리 믿음을 등한시 한 것을 사과드립니다.

개신교 쪽에서는 당신들의 선행이 인간의 의지중심으로 구원 쪽에 가까운 것으로 했다가 우리가 믿음을 강조해 왔는데 실행이 없는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 때문에 우리가 믿음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우리 구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 우리의 잘못을 사과드립니다. 양쪽에서 사과하면서 우리 가까워집시다. 이런 운동이 생겼는데 1999년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가 모여서 이런 선언을 했습니다. 제가 잠깐 읽어드리겠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이는 인간의 선행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은 인간에게 선을 행할 힘도 주시고 선을 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서 선을 행할 수 있는 힘을 믿음이 우리한테 부여해 주십니다. 동시에 믿는 자는 반드시 믿음에 따른 선행을 행하여 구원을 받습니다. 천주교의 잘못은 믿음보다 선행을 강조한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역사는 아시는 데로 면죄부를 돈으로 사서 구원을 살수도 있다는 부패까지 생겼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선행이 아니라 믿음만이 오직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믿음을 그렇게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에 따른 행실이 없어서 교회는 다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믿는 구원은 우리에게 반드시 구원에 따른 선한 행실 의로운 행실로 나아가야만 진정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적인 구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때가 왔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된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모세 때로부터 율법을 주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르쳐 주었는데 여러분은 그 믿음을 숫양에 번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고 분양도하고 집회도 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며 절기행사를 다 드리고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악이 성행 합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었을 때는 그 믿음을 통해서 선한일 하라고 의를 행하라고 주었는데 나는 당신들 의가 없는 행함이 없는 기도소리 듣기도 싫다. 절기 행사도 싫다. 분향도 싫다. 여러분이 해야 할일은 단 한 가지 이제는 내가 말한 하나님의 의를 찾아라. 그대들 주변에 그렇게 억압받는 자들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도와주지 않고 기도만 드리느냐. 가서 억압받는 자를 도와주어라. 과부들이 불쌍하게 짓밟히고 있다. 과부들을 도와줘라. 그리고 와서 나한테 예배하여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은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언어화 했고 말로 했고 실현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분노하셨습니다. 결과는 이스라엘 나라가 망했습니다. 바빌론 포로가 됩니다. 그것도 70년 동안 포로가 됩니다. 그 가운데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자.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삶속에 행하지 않으면 우리 예배는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사도바울이 또 로마서로 왔습니다. 로마서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을 듣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율법을 듣고 실천해야 구원 받습니다. 말을 좀 바꿔보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복음을 듣는 것만으로 의인이 되는 게 아닙니다. 복음을 들으면 들은 대로 실천해야 여러분이 의인이 됩니다. 믿음은 강하면 강할수록 믿음에 따른 봉사와 선행이 강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여러분 스스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일입니다. 저는 이번에 몇 군데 여행을 하면서 이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유럽에 들렸더니 이제 유럽교회는 기독교 역사가 오래돼서 인지 열기도 식고 교회예배도 저조하고 찬양소리도 약한 것 같고요 기도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다시 신앙의 열기를 회복합시다, 하는 운동이 여러 군데서 번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제가 경험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번졌느냐 했더니 너무 잘살게 되고 또 복지가 늘어나고 하다 보니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 같아서 잠시 멀리했는데 그 틈에 소외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터키나 동구권이나 중동권에 있는 소위 이슬람 국가에 사는 사람들이 외국인 노동자가 되가지고 기독교 중심의 서 구라파로 집단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서 구라파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인구는 점차 줍니다. 반면 이슬람 외국인들의 자손은 늘어납니다. 노동력도 많아지고 그리고 baby 보너스도 노동자에게 주어야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다보니까 이제 유럽 전체에 삶의 기조가 우린 기독교 국가로 살아왔는데 가면 갈수록 사람도 줄고 이슬람은 잘 모이는데 기독교는 못 모이고 열성적으로 기도하는 이슬람과 달리 하루에 한 번도 기도안하는 기독교인은 열성만 없는 게 아니라 실제로 생활 속에서 복음의 진수가 자꾸 흩어져 가고 있고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마저도 없어져 가고 있고 자살율도 늘고 부정부패도 늘고 기독교 국가라고 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나라가 부패하고 타락하고 있으니 어디서 이리 왔을까. 이슬람과 기독교 전쟁입니까? 그것은 표피적인 얘기이고 지금 새로운 각성은 이슬람을 통해서 오는 도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하고 더 열성으로 믿고 더 선행을 행하고 더 전쟁을 안 하고 더 많은 평화를 위하고 더 많은 진실 된 복지를 위하려고 하면 우리가 다시 믿자.

믿음을 다시 회복하자 저는 그래서 이슬람의 노동자를 통한 진군이 오히려 유럽을 다시 한 번 깨닳게 되었다고 하는 고백을 많이 들었습니다. 위기가 닥쳐오면서 우리도 다시 살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이슬람과 갈등 일으키자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가졌으면 언어로만 고백하고 전통으로만 고백하는데 아니라 우리 삶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실천해서 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보십시다. 이제 교회마다요 청년도 오기 시작하고 찬송소리가 더 기뻐졌다고 해요. 과거에는 그냥 전통적으로 찬송 부르다가 이제는 기쁜 맘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속에 그냥 전통적인 기도소리가 아니라 조금 더 진지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십니까?

저는 한국교회가 앞으로 지금 방식대로 외형적인 성장으로 가다가 혹시 우리가 매를 맞으면 우리가 받았던 우리의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실까 이런 염려가 되는 상황도 우리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까 장로님도 기도하셨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믿음의 형제들이 많아지면 나라가 더 좋아질 것 아닙니까? 사회가 더 부유해질 것 아닙니까? 도덕이 더 늘어나야 될 거 아닙니까? 딴 얘기 할 것 없이 신앙인으로서는 우리가 믿는 믿음이 언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행실로 연결 되어져야 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삶속에 실천되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속에 주인이 되도록 다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제가 오면서 이런 신앙고백 하나 읽었습니다. 개구리 얘기입니다.

불란서에 가시면 음식점 메뉴판에 그레누이야라는 개구리 요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데로 개구리 요리는 물에 담가가지고  서서히 불 담기기 시작하면 개구리가 차츰차츰 뜨거워지기 때문에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자꾸 돌아가는 온도에 익숙해져가지고 마지막에 완전히 익어서 죽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처음부터 뜨거우면 반항을 할 텐데 서서히 익다보니까 개구리가 죽습니다. 그 얘기를 우리가 아는데 그렇게 해서 만든 개구리 요리가 그레누이아 입니다.

어느 분이 개구리 얘기를 하면서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지혜가 있습니다. 개구리 다섯 마리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높은 탑을 앞에 두고 서로 기어가서 탑 끝에 올라가기를 시도했습니다. 근데 주변에서 듣는 이야기는 개구리는 절대로 탑 위에 올라갈 수가 없다. 힘도 없고 능력도 없는 바보다. 이런 소리를 자꾸 들으면서 개구리가 올라갔는데 올라가면서 개구리 한 마리가 떨어지고 또 올라가면서 떨어지고 다 떨어졌는데 마지막 다섯 번째 개구리는 마지막까지 올라갔습니다. 이유가 뭔가 하고 탑 끝에까지 올라간 개구리를 가지고 조사해 봤더니 개구리가 귀가 먹었더랍니다. 세상에서 않된다 망한다 힘없다 희망도 없다 좌절뿐이라고 자꾸 소리를 들은 개구리들은 아무리 힘을 합쳐서 올라갔지만 떨어지고 말았는데 세상소리에 그런 귀를 기울이기 않고 올라간 개구리만 탑 끝에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상은 모두가 안 된다고만 합니다. 어렵다고만 합니다. 힘들다고만 합니다. 그런 얘기는 귀를 막으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안되는 게 어디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함께 하시면 나는 하나님과 함께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내 삶속에 함께 계시단 소리입니다. 그렇게 믿고 올라가면 될 텐데 그러지 못한 세상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분의 결론입니다. 개구리란 말은 무슨 뜻이냐. 영어로 frog입니다. 우리가 배운 frog 란 뜻은 마지막 귀먹은 개구리를 계기로 해서 f자는fully r자는 rely o자는 on g는 god  fully rely on god.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라. 이게 귀먹은 개구리가 우리한테 하는 얘기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약소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됩니다.

오늘 우리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말씀, 예배만 할 게 아니라 예배하는 마음으로 정의를 행하라. 로마서에 말씀 율법을 들었으면 복음을 들었으면 들은 대로 행하라. 오늘 누가복음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너희 땅에 이 세상에 무화과나무 하나를 심었더니 너희들은 줄기만 왕성하게 하고 잎사귀만 푸르게 만들고 내가 정작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라 이름하는 열매를 맺지 못했지 않느냐. 그럼 찍어 없애버려라. 나는 오늘 내가심은 무화과나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상에 심었다. 나는 그대들이 줄기가 큰 것도 기뻐했다. 융성하게 자라는 것도 기뻤다. 복 받는 것도 기뻤다. 그럼 나하고 오늘 셈하자. 열매를 내놓아라.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가 하나님께 한번 의지해 봅시다. 그래서 아까 개구리 얘기 사람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말을 바꾸면 나는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으면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루터가 얘기했던 것처럼 믿음이 없는 행함이 됩니다. 하나님과 할 수 있다. 내가 빠지면 오직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케 하셨습니다. 세상을 이제 바꿔보십시다. 하나님이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을 주셨습니다. 세상 속에 한 인간이긴 하지만 당신들에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너무나도 사랑을 베푸셔서 온 세상을 다 주셨습니다. 저를 너무 사랑하셔서 저한테 이 세상을 주셨습니다. 이 삶을 주셨습니다. 뭐 하러 주셨냐하면 하나님과 함께 믿음대로 열매 맺자고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여러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이 세상을 주셨습니다. 삶을 주셨습니다. 기업을 주셨습니다. 나라를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나님이 뜻하는 열매를 함께 맺읍시다. 그런 각오가 있으시면 우리 다음 주일부터 주님이 오심을 다시 한 번 기도해 보십시다.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는 만큼 열매를 맺읍시다. 하나님과 나는 이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대들 혼자 맺지 말고 나도 함께 맺고 싶다. 내가 있을 공간을 마련해다오. 나는 그대들의 하나님으로 함께 살고 싶다. 역사의 고비 고비 마다. 오늘 내일 모레 시간이 흐르는 곳 마다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이 열매를 맺고 싶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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