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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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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교회나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목사를 후원하는 교회를 '모교회'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기도의 지원과 물질적 뒷바라지를 전적으로 담당해주는, 문자 그대로 '어머니 같은 교회'인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 이 '모교회'라는 말은 그 교회의 지원을 받는 개척교회 목사나 선교사에게 개인적으로 해당됩니다.
  하지만 우리 경향교회의 경우에는 그처럼 각 개인 전도자들에게도 모교회가 되지만, 고려신학교라는 이 선지학교 공동체에 대해서도 모교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경향교회는 고려신학교를 약간 지원해주는 정도의 관계가 아니라,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고려신학교 복교운동의 산실 그 자체가 되었고 평소에나 가장 어려울 때나 변함없이 이 신학교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왔던, 참으로 '어머니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모교회라 불릴만한 교회를 꼽는다면 역시 빌립보교회가 될 것입니다.
  본문 1절과 2절에 "1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정식으로 따지자면 사도 바울은 제일 처음에는 안디옥교회로부터 파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복음전파 사역을 위하여 빌립보교회가 보여 준 영적 물질적 후원은 실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모교회라 여겨질 만큼 정성 깊고도 꾸준한 것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옥중생활하는 가운데서도 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계속 보여주고 전해준 따뜻하고도 정성된 후원에 큰 힘을 얻어 기쁨과 감사 중에 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전도자들의 사역에 있어서 교회를 통한 성도들의 후원이란 필수적입니다.
  병사가 후방의 지원과 보급 없이는 도무지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전도자들 역시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물질의 후원 없이는 혼자 그 복음전선을 지킬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고려신학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고려신학교는 우리 교단, 즉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 고려측의 직영 신학교로서 교단 산하 각 교회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양육하고 배출해내는 학교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왜 우리가 특별히 한 주일을 이 고려신학교의 이름으로 지정까지 해놓고서 지키며 후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주신 말씀을 통하여 나누면서, 이 선지학교를 위한 모교회로서의 사명을 다시 한 번 함께 새기고자 합니다.

  1. 고려신학교 후원운동은 '전도자와 교인이 복음의 동역자로서 교제하는' 은혜로운 사명입니다.

  3절부터 6절의 말씀에 "3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4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5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6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마다" 절로 "감사"와 "기쁨"이 넘쳐흐르게 만들어 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 우리나라 말에 "교제"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영어로 번역할 때 '펠로우쉽(fellowship)'보다는 '파트너쉽(partnership)'에 더 가까운 말입니다.
  즉 단순한 '사교적인 사귐'이 아니라 '어떤 일을 위하여 함께 협력하고 참여하는 관계'라는 뜻인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의 복음사역에 처음부터 제1의 파트너가 되어 왔었습니다.
  19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들은 항상 사도 바울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했으며, 2장 25-30절에 드러나듯이 항상 사도 바울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고 직접 사람을 파송하여 돕기도 했을 뿐 아니라, 또 4장 10-2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위하여 물질적인 후원 역시 끊임없이 계속해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로 그처럼 사도 바울과 '복음전파 사역을 위하여 교제'하는 것을 "첫날부터 이제까지" 계속해왔었습니다.
  즉 사도행전 16장에 기록된 대로 루디아라 하는 한 자주 장사 여인이 사도 바울에게서 전도 받고 빌립보교회가 설립된 이후로부터 이제 바울이 투옥되어 있던 현시점에 이르기까지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교제를 꾸준히 해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두고 사도 바울은 그것이야말로 "너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지금까지 행하고 계시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그와 같은 특별한 파트너십을 자기와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역사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교인들의 지원의 교제가 사도 바울에게, 특히 그가 옥중생활하게 되었을 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7절과 8절에 기록하기를 "7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8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자기 "마음에 있는"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복음사명을 위하여 동역하는 교제는 단순히 수인사나 나누는 교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다 함께 참예하는, 실로 깊고도 진실한, 차원 높은 교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이 빌립보교회가 제일 먼저, 가장 열심히, 그리고 끝까지 함께 고난에 참예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에바브로디도라는 대표자를 파송해서 바울을 위한 후원 헌금을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아예 그를 로마에 상주시켜서 사도 바울의 옥중생활을 직접 뒷바라지까지 하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러니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매임" 즉 투옥을 함께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 즉 옥중생활 중에서도 사도 바울이 복음전파 활동을 계속할 때 바로 곁에서 도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모습은 이제는 '후원'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이며 그야말로 "함께 은혜에 참예하는" 최상의 영적 교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 그들을 "얼마나 사모"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사랑하고 계실 마음과 꼭 같은 마음으로 그들을 사모한다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삼으면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그런 동역의 교제는 비단 사도 바울에게만 덕을 끼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네들 자신 역시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바로 9절 이하 11절에 "9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런 교제 가운데 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은 "사랑과 지식과 총명"이 더욱 풍성하게 자라게 되었습니다.
  "선한 것"을 찾아 행하며 "진실하고 허물없이" 신앙을 지키는 이 '성화생활'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는" 축복으로 연결되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전 생애가 "의의 열매가 가득"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되는, 실로 이상적인 성도의 생애가 바로 사도 바울을 돕는 '파트너십의 교제'를 통하여 시작되었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성을 모으는 일은 이처럼 고귀한 복음사역에 동역하는 '특별한 교제'입니다.
  주일날 예배시간에 만나 인사를 나누고 가끔 식사를 같이 하거나 친목회를 가지는 것이 성도 교제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오산입니다.
  그것은 'fellowship'이라고 불릴 수는 있어도 'partnership'은 결코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정도의 교제라면 꼭 교회 나오지 않아도 이 세상 사회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무슨 파티에 간다든지 동호인 모임에 나가든지 하면 사실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보다도 훨씬 더 재미있는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교제란 그런 수준의 사귐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복음을 위하여 함께 매이게' 됨으로써 시작되는 교제이며, 핍박 중에도 '복음을 위하여 변명하고 확정하는 일에 끝까지 같이 참예하는 자'가 됨으로써 계속 유지되는 관계입니다.
  복음사역의 최전선에 나설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배출하는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이 바로 그런 차원 높고 은혜로운 동역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로부터 그런 믿음직한 파트너십의 지원을 기도를 통하여 영적으로 느끼고 또한 후원헌금을 통하여 실제적으로 받게 될 때 전도자들이 얻게 되는 감사와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교단 산하의 여러 기관들이 마련해준 장학금을 받아서 신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될 때 그 얼마나 큰 격려가 되겠습니까?
  학교운영이 어려워졌던 시기에 경향의 많은 성도들께서 작정해서 보내어주신 특별후원헌금을 받아서 학교의 부족한 재정을 다 충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장 목사님에게 그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처럼 진실한 마음과 뜨거운 눈물이 오가는 동역의 교제가 없는 교인과 목사의 사이라는 것은, 그저 한쪽은 어떤 종교적 서비스를 제공받기를 원하는 '고객'이며 다른 한쪽은 그에 대한 당연한 보수만을 바라는 '삯군'의 관계로 전락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처럼 복음 전도자들을 후원하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자각하고 기꺼이 섬기게 될 때 교인들 자신 속에서도 구체적인 영적 성장이 일어나게 됩니다.
  간단히 말해서, 주님께서 파송하시는 일군들을 대접하는 이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할 줄 모르는 교인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다른 '선한 것'을 분별하여 '의의 열매'를 가득 맺을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실천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려신학교 후원을 통하여 이처럼 복음사역에 동참하는 은혜로운 교제를 나누심으로써, 전도자들에게는 큰 격려와 지원을 제공해주고 자신의 성화생활에서도 더욱 진보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고려신학교 후원운동은 '교회가 전도를 위한 선한 경쟁에 앞장서는' 충성스러운 사명입니다.

  12절부터 14절의 말씀에 "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또 하나의 놀라운 기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한 일"이란 바로 바울 자신이 투옥된 사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복음사역에 "진보"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첫째 이유는 13절에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이 로마 보초병들에게 감시를 받는 몸이 됨으로써 그 자신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에게 직접 전도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소부터 어찌하든지 당대 세계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뚫고 들어갈 기회를 얻고 싶어 해왔는데, 이제 자신이 투옥된 것이야말로 자기 소원성취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절로 굴러 떨어지게 해주신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에 진보가 되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나의 매임을 인하여" 즉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옥중생활하게 되자, "형제 중 다수가" 즉 교인들과 전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더욱 "신뢰하므로" 즉 더욱 확신을 얻었으며 오히려 "겁 없고 담대하게" 자기네들도 전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도 계속 전도하는 것을 보고 이들 역시 신앙생활에 새로운 도전(challenge)을 받았던 것이었습니다.
  곧 이어지는 15절에 나오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자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옳지 못한 동기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15절부터 1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투기와 분쟁으로"라고 번역된 말은 '질투와 경쟁심으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며, "다툼으로"라고 번역된 말은 '이기심에서'라는 의미입니다.
  평소부터 사도 바울에게 질투심과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일부 전도자들은 그가 투옥되자 그것이야말로 자기네들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즉 사도 바울이 교인들로부터 받고 있던 지지와 신임과 존경을 자기네들에게로 돌리려 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이전보다 더 열심히 사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한" 즉 바울로 하여금 더 속이 타고 안달하게 만들겠다는 심보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은 실로 놀라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라고 했습니다.
  즉 '그렇다고 해서 무슨 상관이냐'라는 뜻입니다.
  "외모로 하나" 즉 지금 밖에서 자유롭게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들 중에 그저 이 기회에 교인들에게 더 잘 보이려고 열심히 전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동기는 불순했지만 결과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 분명하니, 그것만 두고도 사도 바울은 무조건 기뻐하고 기뻐할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동기가 어떻든지, 그 방식이 어떻든지,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단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많이 전해지는 그것만이 사도 바울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유일한 목표였던 것입니다.

  실로 사도 바울이야말로 복음사역에 있어서 '선한 경쟁의식'을 가진 전도자가 아니었겠습니까?
  그는 자기가 무슨 일을 당해도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이름만 더 크게 나타나고 더 멀리 전해지기만 할 수 있으면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옥 밖에서 자유롭게 사역하는 자들은 순전히 이기적인 욕심으로 전도하고 있었지만, 옥에 갇힌 몸이었던 바울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진보'가 나타나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것이 잘되기만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남김없이 쏟아 붓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지상(至上)의 목표, 기독신자로서 가져야 할 최고의 사명에 바로 사도 바울처럼 마음과 힘을 모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많은 기독교단들이 있고 많은 기독교회들이 있으며 각각 그 신앙생활에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교회들과 다양한 신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공통된 사명은 단 한 가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이 한 가지뿐인 것입니다.

  그 신앙이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틀렸다 싶은 사람들도 자기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열심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아니 때로는 분명한 이단임에 틀림없는데도 오히려 전도하는 데에 있어서는 우리가 발밑에도 못 따라갈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 신앙이 참된 것이고 귀한 것인 줄 믿는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어지는 일에 대한 열심이 그들보다 못해서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길로든지, 어떤 기회를 통해서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제대로, 바로 전파하는 사명에 누구보다도 더 앞장서고자 하는 선한 경쟁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말 '확신'을 가진 자라면 '착한 뜻을 가지고 더욱 담대히'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적어도 '투기와 분쟁과 다툼'으로 전파하는 이들보다는 백배 더 열심을 내고 앞서가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한 경쟁'의 결과는 예수님 재림하실 때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어느 교단이, 어느 교회가 천당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바른 복음을 전파했는지, 그리고 그 바른 복음을 얼마나 열심히 전도했는지, 그 결과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고 그 열매에 따른 칭찬과 상급 역시 각각 다르게 주어질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은 바로 우리 교단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각자가 이런 진짜 구원의 복음을 이런 뜨거운 전도의 열정으로써 전파하는 길인 줄을 깨닫고,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이 사명 수행에 함께 선두주자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고려신학교를 후원한다는 것은 처음 듣는 교인에게는 아주 생소하기만 할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신학교를 후원하는 일을 이처럼 강조하고 독려하는 것은 다른 교회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신학교야 거기 가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신학생들 자신이 내는 학비로 운영하는 것이 당연하지.'하는 식의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풍조 가운데 신학교들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영적인 힘을 잃게 되며, 그런 분위기 속에 신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목사가 된 후에도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마치 무슨 면접시험을 거쳐 회사에 일자리를 얻는 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신학교와 교회, 목사와 교인들과의 관계 - 실로 세상 그 어떤 관계보다 각별하고 깊어야 할 이 사이에 그야말로 냉정한 계약의 관계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오늘날 다수의 미국 교계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며 한국 교계에도 점점 더 확장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선교사의 모교회'뿐 아니라 '신학교의 모교회'가 되어야 마땅함을 깨닫지 못할 때 바로 이런 병에 걸리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후원한다는 것은 어떤 교단의 의례적인 구호가 아니며 고려신학교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형식적인 연례행사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사실에 있어서 이것은 각 교회의 교인들로 하여금 성도로서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실로 은혜로운 의무를 일깨워주는 아주 중요하고 뜻 깊은 일입니다.
  이것은 복음 안에서 전도자들과 교인들이 동역하는 거룩한 교제이며 교단과 교계 전체를 통하여 복음의 진보가 있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업입니다.
  이런 '복음 안에서의 동역'과 '복음을 위한 선한 경쟁' 가운데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이 궁극적인 사명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밤에 고려신학교 후원회 헌신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참으로 놀라운 역사의 기록을 되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1979년에 250명의 후원회원과 52만 원의 연후원금으로 시작되었던 '경향교회 고려신학교 후원회'가, 지금은 일반회원 4,882명, 특별회원 57명으로 총 5,000명에 가까운 후원회원들을 모으게 되었으며, 작년 한 해 동안 일반후원회비 2억4천만 원, 특별후원회비 1억6천만 원, 여전도회연합회의 신학생장학금 5천4백5십만 원, 그리고 경상비 3퍼센트의 후원금까지 합치면 총 6억5천만 원이 넘는 후원헌금을 고려신학교에 지원하게 되었었습니다.
  28년 동안 회원 수자는 20배, 그리고 후원헌금은 100배 이상 증가된 것입니다.
  경향교회가 이처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모교회로서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고려신학교는 지금까지 많은 목사와 선교사들을 길러낼 수 있었으며, 또한 그로 인하여 경향교회 자체 역시 축복을 받아 이처럼 큰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고 경향교회 성도들 역시 '복음 안에서 서로 교제하며 함께 달려가는' 일등교인들로 자라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교인들끼리 함께 식사를 나누고 함께 운동 경기를 하고 함께 소풍을 다녀오는 정도에서 끝나는 '얕은 교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 은혜로운 교제를, 신학생들과 목사와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동역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체험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인 수자만 비교하고 예배당의 크기와 아름다움만을 가지고 자랑하는 '유치한 경쟁'이 아니라, 과연 어느 교회가 가장 많은 생명 구원의 열매를 재림하실 주님 앞에서 계수하게 될 것인가 하는 '선한 경쟁'에서 일등의 면류관을 받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우리는 끝까지 함께 달음질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 고려신학교의 모교회로서 섬기는 이 사명을 통하여 전도자들과 진실한 교제를 나누고 복음전파 대열에 열성으로 함께 앞장섬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은혜와 축복을 받고 교회를 통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땅끝까지 전파되는 구속사의 완성을 함께 더욱 앞당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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