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증 (히 11:29-30)

  • 잡초 잡초
  • 369
  • 0

첨부 1



  사람은 믿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먹으면 배부를 줄 알기에, 음식을 먹는다. 운동하면 건강할 줄 알기에 운동한다. 공부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열심히 공부한다. 이처럼 믿음은 모든 것들의 기초가 되기에, 믿음을 진리, 또는 보증이라고 번역한다.

  기초가 되는 진리와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하기에, ‘신실함’으로도 번역한다. 그런데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신념이요, 또 하나는 신앙이다. 신념은 인간의 마음(지식, 철학, 경험…),에서 나온 것을 기초로 삼는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 약속, 계시)에 근거를 둔다.

  불교는 신심(信心)을 말한다. 인간의 마음을 믿는다. 유교는 신의(信義)를 말한다. 인간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믿는다. 그런데 사람은 유한하다. 시간에 따라 변한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다. 오른손을 70℃의 물에 넣으면,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반면 왼손을 0℃의 물에 넣으면 차가움을 느낀다.

  그런데 이렇게 하였던 두 손을, 다같이 35℃에 넣으면 따스함을 느낀 오른손은 차가움을 느끼고, 차가운데 넣었던 왼손은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느끼는 느낌과 견해는, 끊임없이 시간과 경험에 따라 바뀌어 가기에, 정확하게 진리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앙(信仰)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우러러 믿는다. 성경은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하였다. 성도들이 믿음에 대해 말할 때 “믿음이 있다, 없다, 믿음이 살았다. 죽었다. 믿음이 좋다, 나쁘다”고 한다. 성경이 믿음을 3가지로 말하기 때문이다.

(1) “믿음이 있다, 없다”(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처럼 신앙에는, 입술의 고백과 마음의 믿음이 있다. 신앙은 우리 입술로,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함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든지, 믿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2) “믿음이 살았다, 죽었다”(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어떻게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 수 있느냐, 행동이 있어야 되고, 실천이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입술로만 말하면 진짜라고 할 수 없다.

(3) “믿음이 크다, 적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크다 적다고 말씀하셨다. (마14:3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15:28)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간증이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다(29).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했다.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었다.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서 올라간다. 그들이 출애굽 했을 때, 가는 길에 난관이 없었는가? 아니다. 그들 앞에 홍해가 나타났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야만, 가나안땅으로 갈 수 있다.

  그곳에는 그들을 실어 나를 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바로의 군사들이, 추격해 왔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군사, 진퇴양난이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모세를 향해, 원망불평을 한다.

  (출14:11)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드느냐?”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에게 (출14:13)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15)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위로 내밀었다. 그러자 홍해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좌우에 물 벽이 높이 세워졌고, 그 사이로 마른 땅이 드러났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외쳤다. “앞으로 나아가라.” 언제 물 벽이 무너질지 모른다.

  만일 이 물 벽이 무너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 속에, 다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으로 앞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 결과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무사히 다 건널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너는 바다를, 우리인들 왜 건너지 못하겠는가?”하며 건너갔다. 그러나 한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에, 물 벽이 다 무너져 버려, 모두 다 빠져 죽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굽 사람들이, 똑같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갔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았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신앙)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은 인간의 생각(신념), 자기들의 오기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유무가, 저들의 생사를 갈라놓았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으로 살자.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순종하고 나가야 한다. 우리들이 홍해를 가르는 믿음이 없어도, 순종함으로 홍해를 건너가는 믿음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도 살다 보면, 홍해와 같이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바로의 군사가 추격해 오듯이 쫓기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이 있다. 얼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주신다.

  가만히 쳐다보지만 말고, 믿음을 키워서 전진하자. 얼마든지 우리는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 그때 우리를 뒤쫓는 바로의 군사들도, 홍해 속으로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홍해가 나타났고, 바로의 군사들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게 만드셨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만일 뒤에서 애굽 군사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홍해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군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뒤쫓도록 허용하셨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허락하지 않으신다.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또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홍해를 가르고 홍해를 건너갈 수 있다.

  약속을 붙들고 홍해를 건너가는 믿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 역사 하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날마다 이 믿음으로 모든 난관을 헤치고 승리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영원한 가나안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올라가는 믿음의 모습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2. 믿음으로 칠일 동안(히l1: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의 삶을 마감하고 요단강을 건넜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견고히 우뚝 서있는 여리고 성이 들어왔다. 그 성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따라서 여리고 성을 점령하지 아니하면, 더 이상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수6:2-5)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세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은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이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작전을 세우고, 적들과 싸우기 위해, 병기를 손질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한 일은 묵묵히, 여리고 성을 계속 돌았을 뿐이다. 이는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무모한 짓이다.

  무방비 상태로 여리고 성을 돌 때, 갑자기 적이 기습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성벽 위에서 적들이 쏘는 화살이나 돌멩이에 맞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칠일 동안 여리고 성을 계속해서, 묵묵히 돌고 또 돌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했다. 그들 앞 세대 사람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적인 삶을 살지를 못했다. 불신앙의 삶을 살았다. 입을 열어서 계속해서 불평하고 원망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가나안땅을 밟지를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인간적인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순종해서, 여리고 성을 계속해서 돌기만 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특한 두 가지의 명령을 내렸다. (1)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 세우라.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이제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면서,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미였다.

(2) 행진하는 동안은 침묵하라(수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지난 40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간적인 소리를 내다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하나님의 축복을 막았다. 이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만을 앞세우고, 침묵하면서 묵묵히 순종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다가, 누군가 입을 열어서 “야! 돌았냐? 여길 돌고 있게, 그런다고 이 성이 무너지겠냐? 이러다가 갑자기 적들이 기습해서 공격하면, 우리는 개죽음 당할 수밖에 없잖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주변에는, 항상 불평분자가 따르게 마련이다.

  “맞아. 괜한 짓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자. 가서 잘 준비한 후에, 우리 힘으로 싸워야지.” 그러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선동했더라면, 그들은 또다시 지나간 40년의 불행했던 역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만 바라보면서, 침묵하며, 여리고 성을 돌라고 명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명령대로 순종했다. 드디어 일곱째 날, 마지막 일곱 번째 여리고 성을 돌았다. 제사장들은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그 소리와 함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제히, 큰 함성을 질렀다. 이 함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 안에서 하나된 목소리였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견고한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적은 믿음으로 하나 될 때 나타난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고서, 인간적인 잡소리를 내지 말자. 침묵하면서 조용히 믿음으로 앞을 향해서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 앞에 우뚝 서 있는 여리고 성은,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순종을 요구하실까? 순종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인내의 훈련,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훈련,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온전하게 순종하는 훈련을 시키고 싶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할 때 나타난다. 아람의 장군 나아만이, 자기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다. 그때 선지자 엘리사는 이렇게 일렀다. (왕하5:10)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그래서 나아만은 요단강으로 갔다. 그는 자기 몸을 한 번 담그고, 두 번 담갔다. 여섯 번 담갔다. 그러나 그의 몸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때 포기했다면, 문둥병은 고침 받지 못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가 일러준 대로, 일곱 번까지 몸을 요단강에 담갔다. 그때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다.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여리고 성을 계속해서 돌았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열두 번을 돌 때까지는, 여리고 성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서, 마지막 열세 번째 돌았을 때, 그 견고한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온전하게 순종했을 때, 그 견고했던 여리고 성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는 믿음,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온전하게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할 때, 나타나게 마련이다. 영국의 유명한 윈스턴 처칠이, 상원 의원에 출마했을 때, 쉽게 당선이 되리라 믿었지만, 어이없게도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는 낙심했다.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서, 두문불출하고 지냈다.

  어느 날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길 건너편에서 벽돌공이, 담벼락을 쌓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벽돌공은 날렵한 손동작으로, 벽돌을 한 장 놓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발랐다. 벽돌공은 똑같은 동작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견고한 담벼락이 완성되었다.

  처칠은 그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인생은 벽돌을 한 장 한 장씩, 쌓아 올라가는 것과 같구나. 나도 내 인생을 한 장씩 쌓아 올라가야지,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는 다시금 용기를 얻었고, 그때부터 인생의 벽돌을 매일 한 장씩, 쌓아 올라간다는 심정으로 앞을 향해서 부단하게 전진했다.

  그 결과 그는, 영국수상이 되었다. 세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가 정계를 은퇴한 후, 어떤 학교에서 했던 연설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Never give up!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절대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말자. 절대로 포기하지 말자.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신앙이 없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여리고 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전진하자.

  그러면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우리가 반드시 차지하고야 만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보시고, 믿음의 상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다.

  이처럼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무너뜨려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여리고 성은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정주영씨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면, 30번은 실패함을 보면서 결심했다. “개구리도 성공하는데, 나는 사람의 자식이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면서, 다시 일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의 현대가 되었다. 노무자들과 같이 일하며 잘 때, 빈대들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침대 네 다리마다 물을 떠놓고 잤다. 그러나 역시 빈대가 물어서, 어떻게 침대에 오르는 가 보았더니, 천장으로 올라가 정주영에게 낙하하였다. 그 후 정주영씨는 문제 앞에 포기하는 자들을 향하여 “빈대보다 못 한 놈이다”라는 빈대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또 쥐가 달걀을 훔쳐가자,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았다. 쥐 두 마리가 와서, 한 마리는 달걀을 쥐고 발랑 누우면, 한 마리가 꼬리를 물고 쥐를 끌고 감을 알았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에 가나안 땅이라는 아름다운 상을 주셨다.

  우리가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 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없다. 인간의 선행으로, 천국 문을 열 수 없다. 종교적인 수행으로도 열 수 없다. 믿음을 키우자.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