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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거절과 선택의 기로 (창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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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NPW(New Product Works) 박물관은 아주 희한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무연 담배, 무색 콜라, 스프레이식 치약 등 그동안 연구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결국에는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한 수 만여 점의 제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 곳이 지금은 코카콜라, 미쓰비시, P & G 등 거대 다국적 기업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신제품 출시 전에 관계자들이 꼭 이 곳을 거쳐갈 정도의 중요한 현장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제품들이 진열되어있는 것은 실패 그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실패를 통해 교훈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실패가 위대한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뭐, 우리 인생 역시 예외는 아니지 않습니까? 누구나 우리의 가는 길이 평탄하길 원하고 또 내가 선택한 일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원하지만, 때로 우리가 기대한 결과가 속히 얻어지지 않고 우리 인생이 후퇴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 사면초가에 부딪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볼 본문의 말씀은 서둘러서 결과를 얻고자 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잉태할 수 있는 기간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아브라함은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얻은 아들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이 때문에 아브라함 가문에 끊임없는 갈등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할 진리가 있습니다.

1. 무엇보다 서두르지 말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사래가 가나안 땅에 온지 10년이 될 때까지도 자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10년은 아브람과 사래가 정한 데드라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10년 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나겠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설마 10년 안에 어떤 일이 없을라구" 하면서 기다려 왔는데 그 10년이 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에 있어서 신실하신 주님이 자식을 이렇게 까지 안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최악의 상태의 것도 최상의 것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입으로 하늘의 별처럼 자손을 많이 주시겠다고 약속해 놓으시곤, 왜 10년이 지나도록 10년은 고사하고 한 명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아내엔 사래가 더 심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십년 후이었더라" 사라는 그 남편에게 자신의 몸종으로 있던 여인인 하갈을 첩으로 내 줍니다. 그래서 계집종 하갈을 통해서 아들을 얻었습니다. 어쨌든 자식을 얻었다는 면에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자녀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여주인에게 늘 눌러 산다고 생각했던 이 계집종이 자녀를 잉태한 순간부터 사라에 대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사라는 자신의 여종에게 괄시를 받습니다.

그리고 여기 5절을 보세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당신과 나 사이에'

사래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이런 말을 할 수 있어도 사래는 이런 말을 할 여자가 아닙니다. 너무나도 흥분해 있고 너무나도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어서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채 그냥 마구 퍼부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라는 순종의 여인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도, 애굽의 왕에게 자신이 보내질때도, 남편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았던 여인입니다. 평소에 사래는 남편을 부를 때도 '당신', '자기'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사래는 남편을 부를 때 '주님'이라고 불렀던 여자입니다. 사래는 정절과 절제로 자신을 단정했던 아주 존귀한 부인이었어요. 그러나 한번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영적으로 고갈되니까 속에 분노가 차서 자기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무서운 말이 막 튀어나왔습니다. 이제 '주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입니다. 조급함이 빚어낸 하나의 아픔이 아닙니까?

아브라함과 사라 또한 이 일 때문에 얼마나 큰 정신적 부담과 심리적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을까요? 모두가 서두른 결과입니다. 서두름이 항상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속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속도는 중요합니다. 속도가 강조되는 경쟁문화 속에서 나 혼자만 뒤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급할수록 좀더 긴장을 풀고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삶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현대인들은 결과주의의 함정에 빠져 진정한 결과도 얻지 못한 채 인생의 길을 방황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축복은 서두름이 아니라 기다림에서 옵니다. 서두름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프랑스 폴발레리대 교수를 지낸 피에르 상소르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바쁘게 사는 삶만이 최선일까라는 물음을 제시합니다. 피에르 상소가 주장하는 것은 '차라리 느리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느림이란 게으름이 아닙니다. 느림이란 '부드럽고 우아하고 배려 깊은 삶의 방식'입니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리지 않으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나 자신을 성찰해 가면서 세상을 향한 확고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삶의 장에 실패가 있다면 그것이 너무 조급함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닌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남보다 더 빨리 성장하고 성공해야만 되는 환경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를 외치며 달려왔습니다. 밥도 빨리 먹고 더 많이 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일도 더 빨리 많은 분량을 해 치워야만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실공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건강도 빨리 상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빠른 성공을 추구하다보니 대박 열풍에 휘말려 사기도 잘 당합니다. 차근차근 기초를 다지며 제대로 올라가는 사람을 보면 답답하게 여겨지고 바보처럼 생각됩니다. 정상적인 비정상적으로 취급되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조급하여 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이렇게 조급하여 손해를 많이 보는구나! 깨닫고 조급증을 고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겠다 생각을 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조급증을 고쳐 주십시오.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지금 당장"

조급하면 불평하고 화를 잘 내게 됩니다. 작은 일에도 노를 발하곤 합니다. 여유가 조금만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을 불필요하게 화를 내고 손해를 많이 봅니다. 결국 우리 인격의 미성숙만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손해만 보게 될 뿐입니다. 조급하여 그렇게 불평하고 화를 내다보면 웃음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사단은 조급함을 심어 우리의 감정을 메마르게 만들고 황폐한 삶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지금 선택과 거절의 자리에서 아브람의 가장 큰 실수는 사람의 충고에는 민감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이 순간에 닫혀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 1-2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생산치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러분, 사라의 말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좀더 침묵하며 기도해야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이런 방법을 통해서 주시는 것일까? 침묵하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나님의 음성보다 아내의 말에 귀기울인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라가 자식을 얻었지만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로부터 면박을 당합니다. 종 하갈이 주인인 사라를 괴롭힙니다. 하갈이 집을 나갑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파괴가 들어왔습니다. 침묵하며 자기를 돌보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그 현실을 깊게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성숙치 못한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고통이 닥쳐왔습니다.

이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누구입니까? 15절에 보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방법에 따라 상속자를 얻으려고 했었던 결과로 태어난 존재였습니다. 12에 보면 이스마엘이 어떤 자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이스마엘의 출생 이후 13년 만에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서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와 하갈의 갈등도 고통이지만, 이들의 배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후손을 통해 일어나는 갈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배 다른 두 자식 사이의 갈등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길고 긴 민족적 갈등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아랍의 조상이 아닙니까? 지금도 지구 한 모퉁이 중동지방에서 계속되고 있는 민족적 분쟁과 역사적인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아브라함의 실패가 주는 교훈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 앞에'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잠3:6에 보면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학자 챨스 브릿지는 "잠언 3장 6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북극성과 같다"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많은 여행자들이 행로의 방향을 잡으려면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 북극성을 좌표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처럼 우리 역시 얼마든지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부딪혀오는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하다 때로 잘못된 결정으로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에게 북극성과도 같은 약속의 말씀에 생의 초점을 맞추어 그 분을 집중하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이 음성을 민감하게 들으며 삶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은 좌우로 탈선도 하지 않으며, 길을 일고 헤매거나 시행착오를 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폭풍우, 삶의 역경 속에서 때로 우리가 고통하고 울고 탄식하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허용하셨습니까? 자! 예를 들어보십시다. 여기 재벌 총수가 있습니다. 그에게 외아들이 있다고 하면 자기 재산을 주고 싶을까요? 주기 싫을까요? 우문이죠. 무척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직 어립니다.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당장은 줄 수 없죠. 왜냐하면 그 돈이, 그 재산이 소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잘못 다루면 독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돈을, 재산을 잘 관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공부도 시키고 훈련도 시키고 사람 노릇 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이 더 답답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되 보통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을 보면 아직 시원치 않습니다.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드러났잖아요? 10년을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때 믿음의 수준이 어땠습니까? 인간적인 가능성만 따져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가능성이 아직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있을 때 자기들 방식으로 해보자고 작정했던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한심스러운 수준이요 함량미달입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줄 수 없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려고 계획하시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쪽에서 그것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신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봄기운이 물씬거리는 계절에 산에라도 가보면 겨우내 얼었던 계곡사이에 얼음이 녹으면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는 대단히 아름답고 감미롭게 들립니다. 저는 이 개울물 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산에 가면 먼저 계곡을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뭐 개울물 소리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단조로운 것 같지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개울에서 돌멩이를 다 건져내고 날카로운 바위나 절벽을 다 깍아서 평평하게 만들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아름답던 개울물 소리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에서 그의 영광을 찬송하고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고귀한 자녀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십니다.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우리 입에서 아름다운 찬양이 끊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인생 길을 가로막는 바위를 치우지 아니하시고 높은 절벽을 낮추지 아니하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이 몹시 아플지라도 그렇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 하는 가운데 고난을 당해 보았기 때문에 드디어 감사할 줄 아는 귀한 형제자매를 봅니다. 너무나 돈이 궁색해서 나중에는 불과 단돈 몇천 원을 들고도 눈물로 감사하는 아름다운 사람이 된 모습을 저는 봅니다. 하늘처럼 보이던 남편이 졸지에 몰락하여 낭떠러지 아래로 처참하게 떨어진 모습을 보자마자 비로소 남편에 대한 진한 애정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는 부인을 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실패를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분이 난관이 부딪쳐 좌초했을 때 비로소 그의 시야에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겸손함을 보게됩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하늘나라에 속한 자이지만 동시에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둘 사이에 끼어 사는 고통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왜 고통과 아픔이 옵니까?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 하니까 세상이 우리를 놔두지를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오는 어려움이 있어요. 직장에서 술자리에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나중에는 근무평가에 직원들간에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그럴싸한 이유 때문에 진급마저 잘 안돼서 만년 계장 노릇 하는 가장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하는 투기성 재테크에 덤벼들기만 했더라면 그런 대로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다 이제는 자녀들이 크면서 더 빠듯해진 살림을 꾸려야 하는 부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나이는 차서 시집은 가야되겠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결혼할 수 없다는 고집, 그것 꺽지 못해서 혼기를 놓친 채 아직도 결혼하지 못하고있는 자매들, 그렇다고 믿는 것 따지고 말고 조건보고, 결혼하자니 신앙양심이 허락지 않아 남들로부터 이 눈치 저 눈치 받아가면서 지금까지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는 우리들의 청년들 모습 속에서 저들의 아픔을 봅니다. 그러나 거절과 선택의 자리에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열매를 맺을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3.1절을 다시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데 이 운동 역시 결코 놓칠 수 없는 진리를 위해 끝까지 붙잡을 수 없는 세상의 권력 앞에 무릎 꿇지 않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승리입니다. 1905년 11월 17일은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역사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의 국권이 사실상 일본에게 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비통에 젖은 민영환은 조국이 사라진 이상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졌다고 판단하여 몇 개의 유서를 쓰고 주머니에 있는 칼로 목숨을 끊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살아남아 조국의 수치를 보기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뜻 있는 애국지사들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제1대 총독으로 취임했고 국민들은 깊은 절망 속에 1906년을 맞이합니다. 당시 한국인의 삶 속에 깊게 잠재된 불교도, 조선왕조500년을 이어온 유교도 열강의 패권다툼 앞에 이 한반도에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일본의 합방이 시작되고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그런데 1906년 봄부터 이 땅에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이듬해 1907년 1월 2일부터 두 주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 약 1,000명이 모인 이 모임(중간에 1,500명 나중에 2,000명으로 증가)이 바로 대 부흥의 진원지가 된 것입니다. 백낙준 박사는 이 광경을 보고 "이것은 장차 한국 민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자 그리스도인이 직면해야 할 더 큰 시련의 때(일제 식민 통치시대)를 예비하려는 깊으신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때 복음을 받아들인 이 땅에 수많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악에 타협하는 길을 가는 대신 복음을 받아들인 자신들은 그 말씀을 붙잡고 그 절망의 현장에서 일어섭니다. 거절과 선택의 기준에서 이 땅이 포기한 미래를 그들은 다시 희망의 역사를 꿈꾸며 젊은이들의 가슴 가슴을 불 태웠던 것입니다. 독립 선언문을 작성 할 때도, 국채 보상 운동 때도 그들은 민족을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슴마다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어 목이 터져라 자유 조선을 외쳤습니다. 포기한 희망의 노래가 이 땅에 다시 울려 퍼지게 만들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주신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군을 부르네... 이 소망이 3.1운동이 되고, 이 소망이 기독교학교가 되어 미래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고, 이 소망이 우리민족의 패배적인 사고와 절망을 치유하게 되었습니다. 죽어 가는 이 땅에 다시 소망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에도 수 없이 결정해야하는 삶의 한 복판에서 서두르지 말고, 문제에 직면할 때 하나님의 음성에 더욱 더 귀를 귀 울이며, 내게 약속하신 그 말씀을 신뢰하며 나갈 수만 있다면, 지금은 이 고난이, 이 어려움이 왜 내게 다가와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내가, 나를 아는 것 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내가 있어야 할 것과 또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오늘도 내 인생에 잠깐의 고난을 허용하심으로 나를 더욱 가치 있게 사용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고 나간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장 아름다운 승리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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