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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잠할 수 없는 소식 (왕하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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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잠할 수 없는 소식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왕하 7:9)

I. 본문 배경

때는 북 왕국 이스라엘 아합의 시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됩니다. 북 왕국은 이스라엘이 되고 남 왕국은 유다가 되는데 여호와 신앙의 정통성은 남 왕국에 의해서 계승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북 왕국이 훨씬 더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거기에 아합이라고 하는 인물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이 사람은 신앙이 별로 없는 인물로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또 그의 아내 되는 이세벨은 멀리 페니키아 지방에서 바알 신을 섬기던 여인이었는데, 여호와의 종교가 받들어지고 있는 이스라엘에 선교사적인 헌신된 마음을 가지고 시집온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커다란 죄악과 고통을 가져다 준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으로 말미암아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 점점 잊혀져가게 됩니다.

그러나 가장 패역하고 불순종하던 이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던 두 종을 보내어서 어두움의 시대와 맞서게 하십니다. 능력의 선지자로 알려진 엘리야와 갑절의 영광을 더해 달라고 매달리던 엘리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두 선지자 중 엘리사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엘리사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선지자가 도단에 있을 때 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 성주위에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싼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 선지자가 탄식하며 낙심하는 종을 위해 하나님 앞에 빌자 종의 눈이 열려지게 되었고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군대보다 더 많은 하늘 군대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때 그 도단 성을 에워쌌던 군대가 바로 아람군대입니다. 이 아람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위쪽에 위치한 신흥국가였는데 다메섹으로도 불리는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위로 북진하려는 이스라엘과 남하해서 비옥한 팔레스타인의 땅들을 차지하고자 하는 다메섹의 충돌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도단성을 포위했던 아람군대들은 엘리사의 한 번의 기도로 모두 장님이 됩니다. 앞을 볼 수 없게 된 그들은 다른 성으로 이끌려져 갇히게 되었고, 모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으나, 엘리사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아람군대가 또 다시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침공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일을 지켜보고 있던 아합 왕은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왕하 6:31)라고 하는 그에 대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을 내뱉으며 그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엘리사에게 떠넘깁니다.

사마리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대 수도였습니다. 아람 군대의 침략은 변경(邊境)에서 일어난 공격이 아니라 이미 전선에서 밀려서 사마리아까지 포위할 정도가 되었으니 국운이 위태롭게 된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는 모든 물자의 보급로가 끊어지게 되자 그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물가는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치솟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곡식은 바닥이 났으며, 오늘은 내 아이를, 내일은 네 아이를 잡아먹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선지자가 이제 날이 밝으면 곡식 값이 다시 떨어지고 사람들이 풍족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와 같은 고통스러운 전쟁의 상황에서 일어난 한 토막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 할 시급성과 의무에 대한 태만함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성문 어귀에 기거하던 문둥이 네 사람이 여기에 등장하게 됩니다. 문둥병은 당시 율법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질병으로 분류가 되었고 전염성이 매우 강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곳에 거할 수 없었습니다. 성전에 갈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엄격한 격리가 요구되었기에 이처럼 네 명의 문둥병자가 사마리아 성 밖에 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전선이 서로 대치된 가운데 그 중간 지대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안에 있는 사람들도 식량 보급로가 끊겨 굶주렸으니 성 밖에서의 문둥병자의 삶은 그들의 문둥병만큼이나 심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몹시 굶주려 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자니 굶어죽을 것이고, 성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니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생각하고 아람군대에 투항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람군대로 걸어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항복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저들을 붙잡을 아람군사들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먹고 마실 음식들, 기거하던 장막과 말과 나귀, 그리고 은금과 의복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그 진지는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황혼 해 질 무렵에 하나님께서 아람군대에 이적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성을 함락시킬 날을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그들의 귀에 어마어마한 말발굽 소리와 대군의 함성소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필시 애굽에서 돈을 주고 산 용병들의 소리일 것이라고 여긴 아람군대는 큰 두려움에 떨며 그곳을 황급히 떠나갔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이 네 명의 문둥이는 그들이 남기고 간 먹을 것과 보물들을 챙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II. 잠잠할 수 없는 소식

오늘 이들이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은 이 기쁜 소식은 잠잠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소식을 전해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기에 자신들은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이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던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전쟁이 끝이 났다는 소식입니다. 적군은 모두 사라졌고, 이제는 평화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A. 주린 자가 배부름

예루살렘 성에는 수많은 백성들이 극심한 굶주림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떨며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성을 나와 아람군대에 투항하려 했던 문둥이들도 텅빈 진지에서 제일 먼저 뒤졌던 것은 먹을 것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먹을 것들을 찾아내어서 허겁지겁 자신의 배를 채우는 동안에는 아마도 두고 온 사마리아 성과 그 안에 갇혀 있던 동포도 생각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을 어느 정도 먹고 배가 부르게 되자 그들은 두고 온 동포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모든 아람군대가 철수하고 먹을 것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이렇게 기쁜 일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적군이 모두 사라진 벌판을 응시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에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네 명의 문둥병자가 잠잠할 수 없었던 소식의 대의는 전쟁이 끝난 것이지만 지금까지 받아온 고통과 대비하여 생각할 때에 속히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될 기쁜 소식이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렸던 자신들이 배부르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남아 있는 많은 음식들은 그 네 사람을 배부르게 하기에도 충분할 뿐 아니라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마리아 성의 모든 백성들을 기아로부터 구출하기에도 충분한 양식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이 굶주림 속에서 배부르게 되었다는 이 희망의 소식을 그들에게 전해야했습니다.

우리는 굶주렸던 이 네 명의 문둥병자의 모습 속에서 우리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십자가의 은혜로 그분의 생명의 양식을 먹고 배부르기 전까지 우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문둥병자와 같은 상태였고, 그 위에 또한 견딜 수 없는 허기짐을 가진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육신으로만 창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육신은 그릇이고 그 그릇 안에 우리의 속사람, 곧 영혼을 창조하셨으니 우리의 육신이야 이 세상에 있는 양식으로 배부르고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영위해 나가면 되지만, 우리의 속사람인 영혼은 하늘의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스스로 이런 이치를 망각하고 이 땅에 있는 자원으로 인해서 스스로 부요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이 세상에 나타나셨을 때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뵙고 합당한 구원의 은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부요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불의하고 악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과 놀라운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내시는 변함없는 방법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처럼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핍절한 영혼의 허기짐을 안고 우리가 맨 처음 주님을 찾았을 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양식, 그것으로는 도저히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깊은 곤궁함과 굶주림은 마치 아람군대를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하며 걸어가던 문둥병자와 같은 절대 절명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 인생의 막다른 길에서 우리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고, 그 복음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말미암아 그 누구도 쉽게 돌려놓을 수 없었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마음에 확신시켜주셨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너무나 오랜 세월동안 하나님을 떠나 내 마음대로 살았던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복음의 밝은 빛을 통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로 말미암아 상하고 뭉개어진 문둥병자와 같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치료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갈망하게 하셨으니, 주님은 그런 우리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성령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그 충만한 양식을 먹으면서 영혼의 만족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그 말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우리들의 영혼의 만족과 배부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십니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져 생의 기나긴 허기짐을 면하게 되었을 때, 우리의 눈에는 끊임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아직까지도 핍절한 채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내 가족과 내 형제, 내 동포, 그리고 얼굴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전도 종족들에 대한 생각으로 또한 눈물을 흘렸습니다.

육체의 굶주림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영적 목마름이 인간에게 훨씬 더 큰 고통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의 충만한 공급을 받게 되었던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 듯 아팠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언젠가 저희 교회 새가족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체계적으로 목자와 양을 공부하던 어느 지체가 교역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옛날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는 이런 지식의 빛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는 것일까요?”라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어버렸던 일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 메마르고 핍절한 시대에 우리 주님이 아직도 여기에 계셨더라면 그러한 사람들 때문에 그분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멸시와 욕을 당하신 그분의 모든 발자취는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졌고, 거기서 주님은 굶주린 우리를 먹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쪼개어 바치셨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자신에 대한 슬픔 때문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잃은 양들을 위한 흐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배부름을 깊이 경험했을 때 이 네 명의 하찮은 문둥이들은 오늘 밤 안에 이 소식을 성 안에 전파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천벌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는 화급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처음 회심할 때 가졌던 그 착한 마음, 우리 부모님, 우리 형제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면 제 생명을 지금 거두어 가셔도 괜찮다는 그 고백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물론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우리는 쉬지 않고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어떤 분들은 탁월하도록 예수의 손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원기를 공급해 주시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 예수 안에서 이미 획득되어진 놀라운 유업들을 누리며 우리가 배부르게 되었다는 이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가 더 많이 눈물을 흘렸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땅에 주님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리며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사람들이 더 많이 손에 손을 잡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불충함을 용서해주시기를 빌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졌던 처음 정신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복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 했던 그 착한 정신과 마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초심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잠잠할 수 없는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B. 가난한 자가 부유하게 됨

그들이 잠잠할 수 없는 두 번째 소식은 그들이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음식으로 배불렀을 뿐만 아니라 지천으로 흩어져있는 수많은 보물들을 발견했습니다. 그 보물들 중 일부를 감추었지만 거기에 있었던 보물들은 사마리아성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가져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악 된 세상이라는 성에 갇혀서 두려움과 영혼의 주림 속에서 떨다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은혜의 벌판으로 나왔을 때 거기에는 무엇이든지 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법적으로 하늘나라의 유업을 소유할 수 있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유업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고통을 받으면 괴로웠고 시련이 오면 이를 악물고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를 열고 성령의 신령한 위로와 하늘에 속한 유업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 찬송할 수 있게 되었고 두려움과 한숨 대신에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그 놀라운 유업들을 누리면서, 주님을 멀리 떠나 살 때에는 전혀 맛볼 수 없었던 하늘의 희락을 맛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영생의 열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를 이처럼 이 땅에 살려두신 사명을 깨닫고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어 하는 여러분들에게 빈손 들려 이 세상을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령한 하늘자원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자원, 곧 건강과 물질과 높은 지위를 주셔서 인간다운 품위를 유지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III. 침묵: 옳지 않은 소위(所爲)

이제 아람군대는 멀리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나 온갖 보화를 함께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없어서 성안에서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떨며 밤을 지새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배가 부른 후에야 진지하게 자신들의 태도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옳지 않도다”라고 말입니다. 이제 돌이켜서 우리 소위를 생각해 봅시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영혼의 곤핍함에 허덕이고 있는 가족, 친지, 이웃들이 수두룩합니다. 우리들도 한때는 그들의 가난함을 인해서 많이 울었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는 점점 그런 기도 소리가 희미해지고 각기 저마다의 즐거움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제임스 패커(J. I. Packer)가 언급했듯이, “즐거움을 찾다가 천박해버린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진지한 슬픔대신 값싼 기쁨들이 환영을 받고, 심각한 복음과 진리 대신 경쾌하고 가볍고 즐거운 여흥(餘興)이 사람의 마음을 끄는 주님의 교회답지 못한 교회,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즐거워하지만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얻지만 진정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환희(歡喜)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교제가 가져다주는 일락(逸樂)에 그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이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임마누엘의 샘에서 택함 받은 허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보혈의 물에 씻고 그것을 마시며 즐거워하기를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음성을 청종하고 이 시대의 선각자(先覺者)들로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예전에 제가 어느 집회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집회에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했던 다른 두 자매가 동일한 고백을 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난 다음에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이 있는데,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하면, 수십만 명의 울부짖는 신음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기 기도를 하려고 시작했다가 결국은 그 울부짖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깊은 기도를 시키시는지, 성령님이 자기 육체를 사용해서 당신 기도를 실컷 하시고 빠져 나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이 도시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헐벗은 사람들의 영혼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은 기갈을 면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채, 영혼으로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는 것을 주면서 그 영혼에게 잠시 즐거움을 누려보라고 말하니, 영혼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문둥병자들은 주림을 면했을 뿐 아니라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침묵(沈黙)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침묵, 그것은 옳지 못한 소위(所爲)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기쁜 소식을 제일 먼저 맛보고도 여전히 전쟁의 두려움과 굶주림 속에서 자기 아이를 잡아먹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 동포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옳지 못한 일이고 천벌을 받을 죄다.’라는 자각(自覺)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진정어린 마음으로 이 기쁜 소식을 동포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람군대가 남기고 간 세상의 보물은 유한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여된 하늘의 기업은 무한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 예수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먹고 마시고 누린다고 할지라도 다함이 없는 그 풍성한 공급을 베풀어 주시려고, 우리 주님께서 저 모진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회심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이토록 놀라운 하늘의 은혜(恩惠)와 이 땅의 지복(至福)들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우리와는 달리 이 기쁜 소식을 모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죽음의 결핍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울고 또 울었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일평생 동안 간직하며 살라 하신 착한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도 비슷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예수님이 언제 사도 바울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복음 안에 있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자 쓰레기 같았던 옛 삶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 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라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도리어 자기 자랑을 일삼고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던 그 생명 없는 어두운 나날들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사랑하는 동포들이 주님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으며 이제 믿음으로 이것을 누리면 된다는 기쁜 소식을 몰라서, 예전에 자기처럼 무지 가운데 신음하며 살아가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 애끓는 사랑이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네 명의 문둥병자가 깊이 반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이와 같은 반성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셨던 것은 그런 회심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 뿐인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사 이 땅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식을 아직 알지 못해서 어두운 가운데 떨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향해 슬퍼하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엄마 하나님의 마음’이며, ‘아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진실한 신자로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도 주님과 같이 영혼들을 향한 ‘모성적 부성애’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실한 신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침묵하는 죄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했기 때문이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부패하게 된 이유는 이 기쁜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소명을 받은 우리가 모든 개별적인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이 소명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였기에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는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고 우리 안에 스스로 갇히게 되었으며, 우리의 마음에서도 결국 그러한 사랑과 열정이 점차적으로 식어지고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주님을 만나고 그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했는지 기억나십니까? ‘나 같은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내가 어디에 살든지, 또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입술에 혀가 굳어질 때까지, 우리의 혈관의 피가 식을 때까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은혜를 유리하며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다가 죽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먹고 마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그런 순례자의 삶이 있습니까? 이 세상은 나그네길 나는 다만 나그네라는 고백, 주님 한분으로만 만족하며 살겠다는 가난한 마음, 불 속에라도 물속에라도 들어가서 이 복음을 나누어주며 살아야겠다고 하는 그런 진지한 몸부림과 외침이 정말 우리에게 남아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출애굽을 해서 광야 길을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모든 양식들이 바닥이 나고, 이제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주님이 내려주신 양식은 선조들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이었고 후손들도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양식, ‘만나’였습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면 이슬과 같이 하얀 것들이 온 땅에 내려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지면에 가득했고 저마다 그릇을 가지고 와서 일용할 양식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꿀 섞은 과자와 같은 맛있는 그 음식을 먹으면서 그들은 좋으신 하나님을 얼마나 마음깊이 찬송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소명(召命)을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지 않았을 때, 그 감격하던 만나는 점차 별 볼 일 없는 음식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부요해진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실까요? 주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최고로 값진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셨고 우리의 의무는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신 십자가의 보혈을 기억하며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숙고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물질과 시간과 재능, 심지어는 우리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목숨까지도 사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들에게 한시적으로 위탁한 것들임을 유념하십시오.

토마스 선교사(Robert J. Thomas)가 배를 타고 대동강에 와서 순교(殉敎)했을 때, 그는 복음 한번 외치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받으며 그가 남기고 간 한자 성경 한 권이 이 땅의 복음이 심겨지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고전1:27) 하십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작정한 수많은 사람들의 순교의 핏길 위에 우리 조국의 교회가 섰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리라”(마 13:37) 선교의 역사를 읽어 보면 얼마 되지도 않는 북극의 에스키모인들을 위한 사명을 받고 복음을 전파했던 많은 이름 모를 선교사들의 일화가 적혀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로 인해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 죽기도 하고, 얼음벌판을 누비며 영혼을 찾아 헤매다가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이 복음의 떡을 나누어 주고자 눈물과 피를 흘린 희생(犧牲)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는 앞당겨졌습니다.

우리 지체들이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무교회 전도 때에도 똑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전하러 온 우리 지체들에게 빗자루를 들고 나와 불호령을 치던 어르신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모두 도회지로 떠나보내고, 외로이 그 시골벽촌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분들에게 우리 지체들은 마치 손자 손녀가 된 것처럼 따뜻하게 다가가 간곡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을 타고 스며든 복음의 그 능력은 저들의 가슴을 울렸고,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 그분들의 말은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예수를 왜 이제야 알려줘, 왜 이제야……” 이 말은 두고두고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절절한 메아리가 됩니다. 이제껏 주님을 몰라 방황하며 살다가 백발이 성성한 지금에서야 주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제 얼마나 더 주님을 섬기다가 가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분들도 주님이 보시기에는 천하보다도 더 귀한 영혼입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복음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찾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외치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떨어질 지옥으로 가고 말았을 영혼들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전도의 일은 차일피일 미룰 일도 아니며, 기회가 닿을 때 하는 일도 아닙니다. 지금 속히 행해야할 시급하고도 절박한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합니다. 때로는 배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먼 나라로 가서 선교나 아웃리치를 할 때도 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소식을 유창한 언어로 전달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영혼들이 있는 곳에 직접 가서 눈물과 기도로 저들을 섬기며, 손짓, 발짓이라도 해 가면서 우리 안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려 줄 때에 비로소 기적은 일어납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IV. 결론: 시급히 이 복된 소식을 전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문둥병자 네 사람이 사마리아성에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전쟁의 두려움으로부터, 굶주림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은혜의 벌판으로 달려나오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가장 하찮은 이 문둥병자를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둥병자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은혜를 깨달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더 귀하게 사용하시겠습니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 4:2)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아직 데려가지 않고 남겨두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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