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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50번째의 날 (행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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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한국교회에 ‘건강한 교회’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건강하다는 것은 외적으로 병들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사람이란 근육이 우람하고 체격이 좋은 사람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이 누구인가를 말할 때 마음이 맑은 사람, 삶이 진실한 사람, 정신이 뚜렷한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한 교회란 건물이 튼튼하든지 잘 지어졌다는 것보다는 그 교회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사역이 바르며 교회 안의 성도들의 모습이 온전할 때 건강한 교회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교회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가? 그것은 예배 사역입니다. 그 중에서 특히 교회의 절기 회복이 가장 시급한 사역입니다. 세계적인 예배학자 제임스 화이트(James F. White)교수는 말하길 ‘교회력이란 곧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다시 기억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과 같은 절기를 지키는 것은 단순히 교회행사나 의식을 치르는 날이나 특별 헌금하는 날이 아니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절기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만드신 의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기를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는 원리이며 축복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부터 한 달 동안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성경적 절기인 오순절의 절기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예배 연구나 예배 발전을 위한 노력에 게을렀고 더 살아 있고 풍성한 예배의 축복들을 놓치며 전통적인 절기 때에도 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결과 오늘 교회력의 오순절 즉 성령강림절에 대해 알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제 왜 이날이 중요하며 우리가 절기를 다시 찾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 불고 있는 예배 개혁이나 변화가 어떤 특별한 예배들을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예배를 다시 찾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배 개혁이며 갱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내용은 오순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성경강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사람을 붙잡고 있는 주인을 바꾸는 작업과 사람을 얽어 놓은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의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 목적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의 시작에 불과한 일입니다. 이렇게 했다고 해서 신앙생활이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외적조건이 충분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좋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기도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도의 장소가 있고, 성경을 배우고 싶고 은혜를 받고 싶으면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는 예배나 모임들이 교회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는 환경이 우리 교회에는 충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이런 환경 때문에 좋은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환경이란 외적인 조건에 불과합니다.
  이런 외적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조건입니다. 얼마든지 좋은 환경이 내 앞에 펼쳐져 있을 지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림에 떡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좋은 신앙이란 마음의 문제 즉 영혼의 문제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이것 때문에 등장하는 것이 성령강림입니다.

  예레미야 31:31-33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 메추라기와 만나, 이른 비와 늦은 비였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외적 조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증거들을 주었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딴 짓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용은 같지만 내적 조건으로 바꾸셔서 당신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말은 외적 조건으로 아무리 공부방에 녹음기와 비디오, 미국인까지 붙여서 공부해줘도 효과가 없으니 속을 고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바로 속을 고치는 방법으로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의 식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고린도후서 5:5-7절을 보십시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 이로라.”
  다시 로마서 7:5-6을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옛날에 우리는 죄인 되었을 때 죄와 사망이 우리의 주인이어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주장하십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살아가도록 만드십니까?
  다시 로마서 8:1-7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아니하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신자는 어떤 의미에서 이중인격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성령의 존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뭘 하십니까? 성령은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만 하십니다. 때문에 성령을 좇으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만 하게 됩니다. 의로운 것만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1-16을 보십시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성령이 오셨기 때문에 그 마음을 우리가 가진 것입니다. 그러니 신령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참된 신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좋은 신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십니다. 건강한 교회나 신자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강림의 목적이며 오순절 절기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막연하게 성령강림, 성령내주란 신령한 일이나 하고 의로운 일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성령의 강림에 대해서 가장 잘 가르치고 있는 곳이 사도행전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과 목적과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라는 사도가 썼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약속에 대해서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성에 유하라(누가복음24:49).”
  성령강림에 대한 약속이 사도 누가에 의하면 능력을 입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은 성령이 오시면 능력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령이 임하면 예언을 한다던가, 병을 고친다던가, 감동이 있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것이 성령이 오신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에 관한 약속은 구약 요엘서에 예언되었던 일의 성취라고 말한 베드로의 말씀 인용을 보십시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요엘 2:28-29).”

  또 신약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16:13-14).”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같이 성령을 보내시는 큰 목적은 진리에 관한 깨우침, 진리에로의 인도, 진리가운데서의 보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면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임하는 성령의 능력이란 진리라는 말씀으로 압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일입니다. 말씀 속에서 살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합니다. 무엇이 참이며 거짓인가를 구별하고 잘못된 것과 바른 것을 분별하게 하는 것이 진리의 영이신 성령 강림의 첫 번째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50번째의 날인 성령강림절은 진리의 영으로 참된 것이 무엇이며 기독교는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영혼을 움직이고 바르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가장 중대한 사역임을 선포한 진리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를 바르게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이 오신 목적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복음17:17).”

  또 하나는 공통적으로 신구약에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이 오시면 장래 일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깨우침이 성령이 오시면 말씀 안에서 찾게 되고 인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가치관이, 인생관이, 내세관이 달라집니다. 성령께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말씀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기 때문에 보는 것이 달라지고 사는 의미가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설명하면 꿈을 꾸며 이상을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이렇게 됩니다. 늙은 사람이 꿈을 꾼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입니다. 꿈은 젊은이에게 있는 것이지 늙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자란 이 땅에서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이 땅의 삶은 잠시 지나가고 인생이고 영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늙으면 늙을수록 꿈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가서 주를 뵈오리라. 이제 다가온다. 그래서 더 꿈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늙은이는 꿈을 꾼다는 말입니다.

  왜 젊은이는 이상을 봅니까? 젊었을 때는 여러 가지 꿈이 다릅니다. 그림을 보면 미술가가 되고 싶고, 음악회가면 음악가가 되고 싶고, 설교를 들으면 목사가 되고 싶고 무엇이든지 다 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이상(꿈)은 세상 적인 욕심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젊은이에게 성령이 임하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알지 못했던 세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상, 신령한 이상을 가집니다. 이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신자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비전과 꿈을 갖게 만듭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성령 강림이라는 것은 단순히 눈에 띄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된 사건이 아닙니다. 흔히 단정 짓는 것들인 방언도 아니고, 예언도 아니고, 전도도 아니고, 병 낫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능력이란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먹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먹다보면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진리를 아는 힘, 내일이 있다고 아는 힘에 의해서 현실적인 준비와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남과 비교하여 펄펄 뛰는 것은 내가 얼마나 남과 다른가를 증명하기 위한 것뿐입니다. 정말 성령을 받았다면 이 생활을 합니다. 말씀이 전부입니다. 말씀 없이는 못삽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싸움을 더 잘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속이 ‘사이다’ 같이 튄다고 합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성령의 나타남을 허락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인입니다. 언제나 그분의 간섭에 의해서 살아야 합니다. 나의 계획과 뜻대로 욕심대로 모든 것이 되지 않도록 간섭함을 받는 것입니다.
  행 8:26-29에 보면 성령이 빌립을 좌우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기도하는데 성령이 오셔서 광야로 가라고 호통 쳐서 몰아냅니다. 광야는 좋은 곳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시키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 식대로 살 수 없습니다. 개성대로 살 수 없습니다. 성령 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행 16:6-7에 바울의 전도 여행에 간섭하는 것을 보십시오. 성령께서 아시아로 못 가게하고 결국 로마로 가서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게 합니다. 성령께서 바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선한 일이고,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막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성령이 하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의 삶과 존재와 생활이 다스려지고, 지배되고, 고쳐져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게 합니다. 그런 삶에 대한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더 엄밀하게 관찰하면 성령행전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나는 얼마나 형편없는 존재냐를 알게 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의시 될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겸손하십시오. 그리고 지십시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간섭하시며 내가 살아나고, 인간 냄새가 날 때 깨우치기 위하여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사람은 육체를 죽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쫓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앞에서 항복하여 그분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이요, 이것이 성령강림의 목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일에 대한 이상 속에서 오늘을 성실하게 충성스럽게 살아갑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기를 죽입니다. 철저하게 항복합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죽어있습니다. 이런 신자가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은 말씀이 인도하는 삶을 삽니다. 그 생활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2:46-47을 보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모이기를 힘씁니다. 기쁨과 순진한 마음으로 교제합니다. 하나님의 찬미합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 받습니다. 이런 내적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것은 성령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직접 간섭을 받으면 이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강림이 어디서 이뤄지느냐는 것입니다. 다락방입니다. 다락방이란 오늘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성령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짐을 알게 됩니다.
  또한 성령강림이 시험받는 것도 교회입니다. 성령의 임한 생활이 제일먼저 실천되는 곳도 교회입니다. 먼저 교회에서 성령이 임했음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아직도 성령의 강림을 경험하시지 못한 분들은 기다리십시오. 그 능력이 임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십시오.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며 전투입니다.

  그리고 성령강림을 체험하신 분은 말씀 앞으로 날마다 나오십시오. 진리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항복하십시오. 내 식대로 살던 모습이 깨어지고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십시오. 내가 변해야 교회가 변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사랑하고 밝히 진리를 알려 내일에 비전과 꿈을 갖고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는 교회를 그리고, 하나님이 갖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을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이란 가장 위대한 신자를 세우는 날이고 오순절 절기는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축복의 날입니다. 우리가 이 절기를 회복할 때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절기의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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