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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솰라(2) (살전 5: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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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어떤 청년이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망한 나머지 힘든 세상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좌절하여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더랍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성경이나 한줄 읽고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성경에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 지가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성경을 편다는 것이 마태복음 27:5절이었습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라.” 아무리 죽으려고 작정한 몸이지 좀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곳을 한 번 펴 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눅 10:37절이었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거참 이상하다. 이번에는 신약이 아니라 구약으로 가서 살펴보자 해서 성경을 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인 구절이 왕상18:21절이었습니다. 그 구절에는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였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보통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해서 성경을 열었는데 놀랍게도 요한복음 13:27절이었다고 합니다. 그 구절에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럴 경우 옇러분들도 하나님 뜻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청년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하면서도 비 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이며, 비 생산적인 방법으로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과 인도해 주시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혼란스러워 하고,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소위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 본 후 이런 결정을 했다.'는 등 미신적인 방법에 의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중동지방에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인솰라'입니다. 이 말은 ‘만일 신이 원한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간혹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라고 말하는 것을 쉽게 이야기하고 듣지만 '진정 하나님의 뜻인 인솰라'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인 '인솰라'를을 확인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1) 일반적인 계시의 방법이 있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상식과 냉철한 이성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성적이 아주 나쁜 고등학생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하필이면 원서를 내는 아침에 읽은 성경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읽었답니다. 그래서 '아하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라고 판단해서 무조건 '서울대학교'에 원서를 냈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인솰라'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과 상식을 통해서, 또는 냉철한 이성의 판단과 경헙이나 양심을 통해서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을 창적 질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상식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시험하지 못하도록 안전 장치를 해 놓으신 것입니다.

② 그런가 하면, 성경 말씀과 기도를 할 때 성령님의 조명으로 하나님 자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씀을 읽고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규칙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깊이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부분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내 생각이나 판단에 의하여 내 생각과 뜻대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 반대의 길을 걷게 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니느웨이로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정 반대의 길인 다시스를 택한 요나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또한 기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깊은 대화가 없는 것은 먼저 회개함으로 자신의 죄를 해결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가 없고,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꾸준히 하지 않아서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도 성령님께서 기도할 때 진리가운데 이끄시는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것은??간절한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만나던 사람도 한동안 안 보면 서먹서먹한 관계가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③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역사와 환경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를 통해서 말씀하시며, 당신의 뜻을 보여 주십니다. 그야말로 눈이 열려있는 자나 귀가 열려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2)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 더 말씀의 폭을 좁혀 본다면, 성경말씀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Determi- ned Will)이 있는가 하면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Desired Will)뜻이 있습니다.

①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뜻대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나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의 탄생, 고난, 죽으심, 부활, 승천과 앞으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과 같은 말씀이나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아니하면 지옥 간다는 말씀 등입니다. 심지어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 일들이 그러합니다. 이에 대해서 미국의 쟌 윔버는‘하나님의 유우머’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그는 ‘치유의 신학’내지는 ‘치유목회’을 조명하고 실천한 선구자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일으키는데 쓰임을 받은 장본인이었습니다. 소위 '비성서적이 아니냐?'라는 비난도 있는 '빈야드 운동'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이 오랜 세월동안 환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해 오셨는데, 그는 치유사역을 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너무 사연이 안타까워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만은 하나님이 꼭 고쳐 주셔야겠다.'고 생각해서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런데'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은 고쳐 주시지 않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사람은 고쳐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표현하기를 '하나님의 유우머’라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소원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게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그 신학적 범주를 보면 '하나님의 예정'이라든지, '섭리'라든지, '하나님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계획'이 다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② 그런가 하면 성경을 통해 약속을 하셨기에 동시에 ‘소원적인 의지’를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인간의 소원이나 선택에 간섭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선물을 활용하여 그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이름’을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자식을 낳아 이름을 지 을 때에는 부모의 소원을 담아서 이름을 짖게 됩니다. ‘너는 장차 커서 이러 이러한 사람이 되어다오.’하는 부모의 소원이 아이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이름은 '영원히 복 받고 살아라.' 그래서 '영복'으로 지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을 향해서 이런 소원을 가지고 계신답니다. 즉 '자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런 삶을 살아 주었으면 하는 소원적인 의지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소원적인 의지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시고, 간섭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응답들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소개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속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정적인 의지보다는 소원적인 의지가 강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 이러하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뜻인 인솰라’의 의미를 상고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단어는 부사입니다. 여러분이 특별히 본문에 나와 있는 부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항상', 그리고 '쉬지 말고', '범사'에 라는 단어입니다. 이에 따라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항상 기뻐하는 삶이요,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들과 모든 성도 여러분에게 이런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본문을 통하여 나머지 한 가지 하나님의 뜻인 인솰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따라합시다.


2.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 속에서도, 어떤 처지에서도’라는 뜻입니다. 범사'의 헬라어 '엔 판티'는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라는 의미입니다(in all circumstances, NIV). 성도는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순경과 순탄 중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환난의 위기 가운데서도 감사하는 것이 '인솰라'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 그렇습니다. 빌 4: 6에는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할 때 행복이 들어오지만, 원망하는 순간에 행복이 구멍난 주머니처럼 빠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종은 누가 뭐래도 때려서 소리가 나야 종의 가치가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이라도 그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행복한 법입니다.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이미 그는 행복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만큼 행복을 느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원망하는 한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셈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연구해 보니 '자유주의 세계와 공산주의 세계를 두루 여행하는 가운데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유주의 세계에서는 흔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산주의 세계를 여행하는 가운데 좀처럼 이 말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입니다. 혁명으로 세워진 나라에 감사라는 말이 존재할리가 없습니다. '혁명이라는 말속에는 모든 것의 원인이 나 아닌 다른 사람, 다른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가난한 것은 저 부유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공산주의 사회가 못사는 이유는 저 자본주의 세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소위 혁명과업을 완수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혁명하고 투쟁하여 얻었는데 누가 누구에게 감사한다는 것입니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 저들 세계에는 감사라는 말이 어색할 수 밖에 없고요, 낮선 말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1) 그렇다고 한다면 누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① 깨닫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영어의 감사(Thank)와 깨닫다(think)의 어원이 같다고 합니다. 영국의 '몬테피오레'는 “감사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만이, 깨닫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신질환자나, 식물인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둘 다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를 모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전에는 은혜인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은혜요, 전에는 이것이 축복인줄 몰랐는데 깨닫고 보니 축복도 이런 축복이 없습니다. 전에는 내가 제일 불행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원망이요. 불평 뿐이었는데 어느 날 깨닫고 알고 보니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감사가 생겨납니다.

보십시오. 행복과 불행은 이렇게 깨달음의 차이 인색에 대한 간만의 차이입니다. 즉, 종이 한 장의 차이입니다. 때로는 동일한 환경이나 여건이지만 생각에 따라서 행복할 수 도 있고, 불행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의사의 경우에 그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손가락부터 세어 보았다.'고 합니다. 세어보니 열 손가락 그대로였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고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사는 알았습니다. 나 환경오명 물질이 너무 심해서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로서 이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진짜 감사를 했던 것입니다. 태어난 아이가 남자냐 여자냐 보다는 그저 손가락 열개 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냐고, 당연한 문제 아니냐?'고 얼마든지 치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무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역시 생각이 있는 사람, 참된 이치를 깨닫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선경의 진리를 깨닫고, 작은 일에도 감사할 일들을 찾아내어 감사함으로 인솰라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②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거 2:7절에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습니까? 역시 믿음에 굳게 서있는 사람만이 할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남들이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견고해 지면 인솰라로 받아들여 어떤 형편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잃으면 잃은 대로, 얻으면 얻은 대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대로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을 때 행복을 잃어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은 없습니다. 왜냐고요? 그 마음속에 참 좋으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③ 그런가 하면 성숙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린아이들은 진정한 감사를 잘 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커서 결혼을 해서 자녀들을 낳으면서 부모님의 희샌과 양육의 수고를 발견하고 나도 저렇게 보살핌과 사랑을 받았겠구나 라고 진정한 감사를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아이를 낳으면서부터 부모님의 고마움도 알게 되고, 눈물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젖이 왜 둘이냐?'고 물으면 '하나는 나 먹으라고 있고, 하나는 가지고 놀라고 둘이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저 무엇인가 주어야만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철이나면 이제는 주는 것이 없어도 감사하게 됩니다. 그만큼 그가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는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사의 사람이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각 기관에서 일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며 헌신하고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④ 은혜중심의 신앙관을 가진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로 생각합니까? '나는 부족하다. 모든 것은하나님께게로 부터 거저 주어진 것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 산다.'는 자세를 가지면서부터 놀랍게도 범사에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비록 '내가 수고했다.'고는 하나, 그 수고한 것에 비해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것은 분에 넘친 것임을 아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범사에 은혜로 받아들이게 되면 욥처럼 감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이 몇 달 만에 병원에서 퇴원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든지 병원에서 퇴원할 때의 그 마음으로만 살아간다면 평생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마음으로만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건강 회복시켜주신 것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 되어 원망하고, 불평하고, 소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늘 은혜의 만족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만이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면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간단합니다. 빈손, 빈 몸으로 태어났음을 잊니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잃었어도 최소한 본전입니다.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즉, 원점에서 시작하면 감사가 가능합니다. 원점에서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욥을 보십시오. 그는 그 많던 재산 다 빼앗기고, 불태워지고, 10남매의 자식들이 한 날 한시에 몰살당하고, 자신의 몸에 악창이 나고 부인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가운데서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욥기 1:21절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알몸에서 시작했기에 잃은 것이 아니라 최소한 본전이다라는 믿음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알몸가지고 왔다가 알몸가지고 돌아가는 것,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원점에다 놓고 생각하니 그런 형편 속에서도 찬양이 나오고 감사할 수 있었고 결국 년에 하나님께서 갑절의 축복을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헌신의 가장 귀한 방법이 있다면 바로 이런 자세의 감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헌신하고자 한다면 범사에 감사합시다. 할렐루야!

어느 젊은 목사님이 목회를 계속해야 하는 가 때려 치워야 하는 가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인이라고는 다 떨어져 나가고 부인과 아들뿐이었으니까요. 그때에 그에게 희망을 준 분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예? 이 지경에 희망이라니요” “지금 세 명 밖에 없으니 여기서 더 줄어 들 수도 없고, 앞으로 늘어날 일만 남았으니 얼마나 소망적입니까?” 가만히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하면서 ' 웃고 나서 다시 힘을 얻고 목회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기독교계에 부흥사로 널리 알려진 이성봉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밑천을 영으로 놓고 사니까 늘 감사한 것 밖에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심지어 “당장 집에 들어가면서 막대기를 휘둘러보아도 하나 거칠 것이 없지마는 그러나 나는 12억환의 엄청난 자본가”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그 당시의 우리 몸을 물자를 드려서 기른다고 하면 독일기준으로 2억환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부인과 딸 넷을 합치면 모두 12억환이라는 자본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었습니다. 만일 오늘 하나님이 데려가신다고 해도 손해 날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성봉 목사님은 설명합니다. “밑져야 본전이니까.”그는 이런 인생관을 가지고 사니까 그저 늘 감사한 것뿐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의 작가였던 '아이작 월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딱 두 군데다. 하나는 천국이요, 다른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에 계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감사하는 자에게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누구를 위한 감사입니까?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오늘은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일년 에 정해진 주일에만 감사할 것이 아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솰라는 무엇입니까?


3. 범사에 좋은 것을 취해야 합니다.

본문 21절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라고 하였는데 즉, '범사에 좋은 것을 생각하고, 좋은 것을 취하라.'는 뜻입니다. '범사'(* ,판타)에 대하여

1) 신자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모 든 것(Lenski),

2) 19~20절의 '성령의 은사'라는 범위 안에서의 모든 것(Thomas),

3) '예언의 은사에 국한되는 것(Bruce)' 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두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합니다.

헤아려'의 헬라어 '도키마제테'(* )는 '시험하다.'(test), '검사하다.'(scrutinize)의 뜻으로 동전이나 금속을 시금(試金)하는뎨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성령의 은사'의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기준은 '예수를 주(Lord)로 인정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이며 또 다른 기준은 '교회의 덕을 세우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하는가?'의 여부입니다(Bruce, Thomas).

이것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이요. 소원이랍니다. 그렇다면 헌신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우리 주변에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좋지 않은 것이 있음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즉 선한 것이 있는가 하면, 악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악한 것보다는 선한 것을, 좋은 것을 먼저 보고 그것을 극대화 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긍정적인 인생,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실수한 사람의 대표가 '하와'였습니다. 에덴동산에는 각종 과실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란 말입니까? 생각지도 말라고 했으면 생각지도 말일이지, 먹지 말라고 했으면 먹지 말 것이지, 그것을 바라보면서 불평어린 마음을 가질 것은 무엇입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과를 볼 때마다 좀 원망어린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려면 다 주시지 왜 선악과는 금하셨나?”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그 생각이 사단에게 걸려들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생각은 마귀가 좋아하는 생각입니다.

서울 모 종합병원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에 기고한 전문의의 글 가운데 이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 제목이 “치료가 빠른 환자와 느린 환자의 비교”였습니다. 이것은 의사의 오랜 경험가운데서 나온 객관적인 생각을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치료가 빠른 환자의 공통점 다섯 가지입니다.

① 긍정적인 사람
② 의사를 신뢰하는 사람
③ 병원의 지시에 잘 따르는 사람
④ 신앙을 가진 사람
⑤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치료가 더딘 환자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① 부정적인 사람
② 원망과 불평이 많은 사람
③ 병원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사람
④ 신앙이 없는 사람
⑤ 의사를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치료라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 아닌 내부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선택이 문제입니다. 범사에 어느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는가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꼭 같은 사물을 놓고 보더라도 어떻게 보느냐? 아니면 무엇을 먼저 ?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여기에 '장미 한 송이가 있다.'고 합시다. '어느 것이 먼저 보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가시를 먼저 보는 사람은 불평할 것입니다. ‘장미에 무슨 가시가 있어서 상처를 주느냐?’ 불평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은 장미꽃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역시 꽃 중에 꽃은 장미로 구만. 가시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 더욱 아름 답구만!” 연실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미 이런 마음이라면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면 어느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누구하고 살아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세계관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의 '마크 길소아 교'수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구멍이 두개 나있는 상자를 갖다놓고, 그 가운데 칸을 막고 한쪽에는 웃는 얼굴, 다른 한쪽에는 우는 얼굴의 그림을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두 구멍으로 두 눈을 대고 그 안을 들여다보도록 했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웃는 얼굴과 우는 얼굴을 동시에 보일 것 같은데, 절대 동시에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웃는 얼굴이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우는 얼굴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그는‘인식차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사람에게는 인식의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분적으로만 본다는 말입니다. '동시에 둘 다 못 본다.'는 것입니다.' 부득불 둘 중에 하나만 본다.'는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으로 발달되어 있습니까? 우는 쪽입니까? 아니면 웃는 쪽입니까? 부정적인 쪽입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쪽입니까?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고 권면합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먼저 취할 줄 아는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사람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솰라를 통해 자신의 자녀들이 밝게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선택원을 주셨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진리를 택하고, 참된 것을 택하고, 하나님으르 기쁘시게 하는 일을 택하고, 영생과 면류관을 받을 헌신하며, 충성하는 일을 택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가불 항상 선과 악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아니 공존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가운데서 내가 어느 것을 취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의 권명처럼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적인 문제와 헌신의 자세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기도를 쉬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헌신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 혼자 만이라도 실천하고,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법사에 감사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고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은사문제에 대해서도 무조건 반대하고, 무조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 아닙니다. 예언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할 줄 아는 열린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도 마찬가지요, 본사하고, 헌신하며, 예배 참여하며, 전도하는 일들고 마찬가지 입니다.

범사에 좋은 일을 취하는 좀 더 적극적인 생각과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선한 도구로 헌신하는 일에 앞장서므로 충성된 이꾼으로 인정받고 승리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


<목양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저희들을 불러주셔서 마리아 여전도회 헌신예배로 지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인솰라의 방법을 깨닫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과 범사에 헤아랴 좋은 것을 취하길 원하시는 인솰라를 아려 주셨읜 실천자가 되게 하옵소서.

뜻있는 주일 헌신예배를 통해 결심하되 우리 삶 가운데 늘 기뻐하며, 기도하며, 감사하며, 그리고 범사에 좋은 것을 선택하며 사는 지혜와 능력을 주옵소서.??범사에 감사하는 마음, 구원받은 감격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믿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나의 헌신하는 선한 선택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되게 하기고, 그 소원 속에서 만족한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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