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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과 사 (전 9: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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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과 死(전9:2-10)

죽음은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만든다. 매일 바쁘게 반복되는 생활로 인하여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산다. 그러다가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보거나 들었을 때, 한번 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다윗이 “나와 사망사이는 한 걸음”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죽음이 먼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가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생명이 있을 동안에, 건강할 동안에,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한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 때로는 병상에서 자신의 죽음이 더 가까이 왔을 때에,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정리한다면, 이미 늦는다. 아직도 죽음이 멀었다고 느낄 때에, 아직도 젊고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할 때에, 죽음과 더불어 삶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은 모든 생물들의 공통적인 자연현상이다.(vv2,3)인간은 모두가 다 죽는다. 의인도 죽고, 죄인도 죽는다, 노인도 죽고, 청년도 언젠가는 죽는다. 나도 죽고 여러분도 죽는다. 물론 죽음의 시기나 형태는 다르다. 하루에 684명이 죽고 한 시간당 73,7명이 죽는다고 한다. 그 숫자 속에는 질병으로 죽는 사람, 사고로 죽는 사람, 생명이 다해서 죽는 사람, 때때로 공익을 위해 의롭게 죽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죽든지 모두가 죽는다.

죽음이란 인간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벌이다. 롬6장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다’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9장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시기를 조금이나마 연기시켜 볼려고,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먹는다. 건강을 관리한다. 의학기술을 발달시킨다. 그러나 죽음은 면할 수 없다. 그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예수님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인간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죽음이 오는 것을 실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내 생애의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는 그 순간, 나를 쳐다보며 울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내 눈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순간, 내 눈이 감기고, 내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내 몸의 모든 장기들이 기능을 정지하는 그 순간, “나는 어디에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을 달라질 수 있다. 스카펫은 “죽음을 어깨에 짊어지고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야 바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제가 도화교회에 있었을 때, 이익선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 분은 북한에서 홀로 월남을 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 경로당에서 쓸쓸하게 사시다가 여생을 마친 분이시다. 저는 남한에 연고가 없으신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루면서 놀라운 사실을 것을 발견했다.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면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동사무소나 교회에서 주는 모든 선물을 몇 년 동안 모아두셨다. 또한 본인이 죽은 이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장례식을 치룰 수 있도록, 동사무소나 교회에서 주는 용돈을 쓰지 않고 오래기간동안 모아두셨다. 그분은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다. 우리도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성도 여러분! 죽음을 준비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삶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인가? 재산을 정리하고, 생명보험을 들고, 유언장을 미리 남기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필요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삶을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본문4절에 “산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했다. 죽은 부자의 삶보다도 살아있는 거지의 삶이 낫다. 아무런 고통도 없는 묘지에 묻혀있기보다는 고통을 겪어도 살아있는 것이 낫다. 오늘 본 영상의 후반부에 보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한 자매가 이런 고백을 한다. “아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살아있다는 것은 그 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5절에 “무릇 산자는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저희가 살고 있는 집이 원래는 우리 나라의 언어치료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이화여대 이승환 교수님의 집이다. 이 분은 어느 날 갑자기 심장경색으로 소천하셨다. 장례식 기간 내내에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수 많은 조문객들이 와서 애도를 했다. 대학 총장들, 후배와 제자 교수들 그리고 학생들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지난 오월에 일주기 추모예배를 드렸다. 일년 전의 모습과 너무나도 달랐다. 몇몇 후배들과 제지들만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현실이다. 죽은 사람에 대해 우리가 슬퍼하고 그 분의 업적을 기리며, 묘지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지만은 시간이 지나면, 마치 묘비의 굴자가 흐려지듯이 우리의 기억 속에 사라지게 되어있다.

6절에 “그 사랑함과 미워함과 시기함이 없어진지 오래니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에 저희가 다시는 영영히 분복이 없느니라”- 사랑하고 싶어도, 미워하고 싶어도, 시기하고 싶어도, 용서해 주고 싶어도, 더 잘해주고 싶어도 죽으면 끝이다. 다시는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살아있을 때에 잘해야 한다. 살아있을 때에 더 많이 사랑해야 하고, 더 많이 용서해야 하고, 더 많이 섬겨야 하고, 더 많이 잘해주어야 한다. 장례식장에 가보면, 사람들이 돌아가신 분의 영정을 붙잡고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해줄 걸, 더 사랑하고 더 용서해 줄 걸”-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후회하지 않도록 있을 때에 잘해야 한다.

또한 살아있을 때에, 죽음이 오기 전까지 삶을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을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다이애나비와 테레사 수녀가 같은 시기에 죽었다. 두 사람 다 성대한 장례식을 치루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녀들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죽음과 애도의 눈물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한 여인은 파파라치에 쫓기다가 지하차도에서 죽고 한 여인은 자신이 평생을 봉사해오던 곳에 죽음을 맞이했다. 한 여인의 죽음에도 대한 시민들의 애도는 동정의 눈물이었고 또 다른 한 여인의 죽음에 대한 눈물은 존경과 감사의 눈물이었다.

성도 여러분! 아름다운 죽음을 맞고 싶은가? 나의 죽음을 향한 애도의 눈물이 존경과 감사의 눈물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을 동안에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이 아름답고 의미있을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을 맞기 위한 아름다운 삶, 의미있는 삶은 어떤 삶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첫째, 즐겁고 기쁘게 사는 것이다.(v7)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번 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망치게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먹고 마시되 기쁘고 즐거운 마음하라고 했다. 마음이 즐겁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마셔도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체한다.

여러분! 즐겁게 먹고 마시는 문제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다. 내안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있을 때, 먹고 마시는 것에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다.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다. 그러므로 즐겁게 먹고 마시며 살기를 원하는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경험하시기를 바란다.

둘째, 인격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단순히 외적인 치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의 아름다움과 수양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대철학에서는 인격의 외적인 특성을 향기로움과 깨끗함으로 강조한다. 즉 인격은 향기이다. 우리의 마음속이 깨끗하고 향기로우면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외모가 아름다워도 천해보이는 사람이 있고, 외모가 아름답지 않아도 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우리는 외모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기초로 한 인격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외적인 표현은 인격이다. 갈라디아서5장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를 보라. 모두가 다 인격적인 열매이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인격적인 삶을 살아갈 때, 사람들은 모여들게 되어 있다.

셋째,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헛된 모든 날”, “덧없는 모든 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정말 헛될 수도 있다. 덧없이 그저 황망하게 지나쳐 버리는 시간이 될 때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덧없는 인생길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는 것이다. 좀더 넓게 말하면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며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열심히 땀흘려 일한 보람과 뿌듯함을 어디서 누릴 수 있는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올 때가 있다. 大자 누워서 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자는 모습 속에 찾을 수 있다. 아내의 웃음과 건강하게 자녀들이 자라가는 모습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성도 여러분! 아내와 가족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애쓴 수고의 열매로 받을 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넷째,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삶이 힘들더라도, 일하는 것이 어렵더라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열심히 사는 것이 의미있는 삶이다.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시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시간이 오게 된다. 그 때 후회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야 한다. 직장 일도, 교회 일도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 뜨는 CF가 있다. 현대카드 광고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웃으면서 사는 인생, 자 시작이다. 오늘 밤도 누구보다 크게 웃는다. 하하하. 웃으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앞에 있는 여러분들 일어나세요. 아버지는 말하셨지 그걸 가져라. 그걸 가져라." 저는 여기에 하나도 부쳐 말하고 싶다. “그러다가 망한다. 그게 다 빚이야!”

그렇다. CF광고처럼 인생을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말하는 것을 가져야 한다.  현대카드에서 말하는 카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행복하게 즐겁게 살 수 있다.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되는 대로 사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인생이 허무하고, 덧없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인생이기에 오히려 소극적으로 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더욱 삶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즐겁게 살아야 한다.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

톨스토이는 "행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을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행복은 결코 얻는 것이 아니다. 느끼는 것이다.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행복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이다.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 속에서 믿음으로 감사하고 즐겁게 살며, 말씀으로 인격의 열매를 맺으며,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청지지로서 최선의 삶을 사는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산다면 우리의 삶과 죽음은 아름다운 하나의 그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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