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모압드림(Moab Dream)은 없다(1) (룻 1:1~5)

  • 잡초 잡초
  • 334
  • 0

첨부 1



이 세상에는 힘을 숭상하는 부류와 은혜를 사모하는 두 부류가 있습니다. 전자의 '힘'은 보여 지는 것이고, 찰라적인 반면 후자의 '은혜'는 보여 지지는 않지만 영원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부류에 속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분명한 선택을 하여야만 합니다. 세상의 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인지?

이 시대 최고 영향력 있는 작가 필립 얀시(Phlip Yancey)는 우리 시대 마지막 최고의 단어를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신학자 C.S루이스는 '기독교를 규정하는 유일한 단어는 은혜밖에 없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란 과연 무엇일까요? 은혜란 단어의 어원은 '카리스'(charis)입니다. 이것은 '기쁘다, 즐겁다'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이 짧은 단어의 뜻만으로는 은혜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뉴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encyclopedia)에서는 은혜를 무려 13page를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 또한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한마디로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으며 어떠한 문장을 동원해서도 설명되어 지지 않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요? 그것은 스토리를 가지고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 스토리 속에 담겨진 깊고 깊은 의미를 깨닫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중에 특별히 은혜에 관하여 가장 쉽고 실감나게 설명하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오늘 우리가 펴고 있는 룻기서입니다. 저는 이 룻기서를 '은혜의 보고'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책에는 마치 '보화가 감춰진 밭'처럼 천혜의 값진 은혜의 보석들이 노다지로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괴테'는 이 책을 '가장 사랑스럽고 완전한 작품'이라고 평했고 '슈뢰더'는 '세상의 어느 시인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단편소설을 쓸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 책의 작품성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작품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관점에서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룻기서 전체에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기쁨을 맛보게 되어 질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 은혜의 현장인 룻기서 안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룻1:1)로 룻기서가 시작됩니다.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가나안땅을 정복한 이후 왕정시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를 말하는데 그 기간은 약35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때에 이스라엘의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21:25, 17:6)입니다. 이 말씀이 사사기의 결론입니다.

17장과 21장에 두 번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조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여기서 왕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왕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단지 이스라엘 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단순히 왕이 없어서 자기 생각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그 소견에 좋을 대로 행했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형식적으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출애굽기 23장 31~3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직전에 그 땅의 거민을 '내어 쫓으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취한 태도를 보면 하나같이 '쫓아내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삿1:21, 27, 29, 30, 31) 그 결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가시(삿2:3)가 되었고, 그들의 신에 올무가 되었으며, 점차 그들의 생활풍습, 삶의 태도를 닮아가는 신세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자기기분과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와같은 시대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멜렉입니다. 그는 그의 가족을 이끌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활을 합니다. 원래 엘리멜렉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대로 살지 못하고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가 왕이 되어서 하나님께 묻지도 아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가족들을 이끌고 미련 없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장소적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났다는 것은 신앙의 터전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땅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로 자기도 죽고 자식도 죽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멜렉이 취한 행동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발견합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묻지 아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가 자기와 자기 자식이 죽게 된것입니다. 성경에 묻지 아니함으로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 사례들이 있습니다.

사울왕 폐위의 결정적 원인도 하나님께 묻지 아니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대상10:14)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아이 성 정복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수9:14) 묻지 아니함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일을 계획할 때 하나님께 먼저 묻고 또 묻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성급하게 결정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 떡집, 베들레헴을 배정받았습니다. 그 땅은 40여년의 광야생활동안 많은 피를 흘리며 죽을 고생을 해서 받은 곳입니다. 그런데 그는 잠시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베들레헴 즉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축복의 땅과 기대를 저버리고 모압 드림을 꿈꾸며 그곳,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는 모압으로 가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미련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지만 결과는 참으로 처참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는 '모압드림'(moab Dream)이란 없는 것입니다.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라함에게 '애굽드림'이 있었습니까? 사명의 자리를 떠난 요나에게 '다시스 드림'이 있었습니까? 또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자에게 '여리고 드림'은 없었습니다. 먼 나라로 떠났던 탕자에도 '먼나라 드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다시 원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었습니까? 그래서 모압으로, 애굽으로, 다시스로, 여리고로, 먼 나라로, 떠나고 싶은 유혹이 있으십니까? 신자인 우리에겐 결코 '모압 드림'은 없습니다. '모압 드림'을 꿈꾸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주어진 내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은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그 현장을 회피하지 말고 그곳에 한 알의 겨자씨를 심어보십시오. 천국이 그 가운데 이루어지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자기 밭에 겨자씨 한 알 심는데서부터 출발되기 때문입니다. (옥성석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