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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 '나'가 문젭니다(4): 삐치는 요나 (욘 3:10-4: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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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요나서 줄거리>

오늘 우리는 요나서의 마지막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복습하는 의미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요나는 선지자로서 하나님이 불러 세우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즉각적으로 반발했습니다.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던 요나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할례 받지 못한 이방 나라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혀온 원수나라였던 앗수르 제국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습니다.
그런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니요,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요나는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이었던
다시스, 즉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고서는 도주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탄 배에 큰 풍랑이 일어나 다 죽게 생겼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 모든 사태가 일어난 것을 깨달은 요나는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시퍼런 바다 속에 풍덩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삼야를
뒹구는 동안 요나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메시지를 듣고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각 순종했습니다.

변화된 요나가 사흘 길을 걸을 필요도 없이 겨우 하룻길을 걸으며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외쳤더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 밑에 이름 없는 백성으로부터 위로 임금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와 같이 거족적인 영적 대각성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자 왕은 칙령을 내렸습니다.
금식을 하되 사람만 하지말고 짐승도 금식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굵은 베옷을 입고 자신의 죄악에 대해 회개하되 짐승들에게도 베옷을 입히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간을 비롯해서 살아 움직이는 전 동물들에게 철저한 회개를 촉구한 것이지요!

자, 이렇게 거족적인 회개운동을 일으킨 니느웨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 10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받았다는 말이지요!
   
사실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죄악이 하늘 끝까지 사무쳐 있던 곳입니다.
나훔서 3장은 니느웨가 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니느웨는 우상숭배가 창궐한 피의 도성이요,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이었습니다.

스바냐 2: 15은 니느웨 성의 죄악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라고 외치는, 자만으로 가득찬 도시였습니다.
“세상에는 나밖에 없다” 하면서 속으로 뽐내며 자아도취에 빠진 도시였습니다.
실제로 앗수르는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주변의 약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하며 온갖 약탈과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앗수르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마저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욘 1: 2절의 말씀 그대로 마침내 니느웨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던 것입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라는 말이 있지요.
참으로 눈뜨고 그 광경을 볼 수 없다는 말인데,
꼭 니느웨 사람들을 두고 생겨난 말 같았습니다. 

이렇게 진노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던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을 둘러보는 데에만 꼬박 사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요나는 그저
하룻길을 걸으며 외쳤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모든 죄악을 털어놓고 회개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려던 계획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가증한 우상숭배가 넘쳐나던 이방 백성이요,
온갖 악독으로 부패하던 니느웨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은 도무지 민족과 국경을 몰랐던 것이지요!

<니느웨 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반발>

자, 문제는 이 광경을 지켜본 요나가 보인 태도에 있습니다.
본문 4: 1절을 보면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치 않으시고 건져주신 것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삐쳤습니다.
‘삐친다’는 말은 마음이 삐뚤어져 토라진다는 뜻이지요.
요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마땅해 토라졌던 것입니다.
아니, 토라지고 삐칠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성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3장에서 요나는 하루 종일 니느웨 성을 돌아다니며
40일만 지나면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망하기는커녕, 아직 40일은커녕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토라진 가장 큰 이유는 자기의 메시지대로
되지 않고 정반대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망한다고 선포했는데 망하지 않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는 자기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일어났기 때문에 삐쳤던 것이지요!

여러분,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 이다지도 어렵습니다.
고난의 바다 속에 풍덩 빠져 사방이 꽉 막히고 어두 침침한 무덤 속과 다를 바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밤을 뒹굴며 요나는 완전히 거듭난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 100% 변화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나도 모르게 죽지 않은 옛 자아가 은근히 살아납니다.
비록 참마음으로 회개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교만과 욕심은 마치
손톱과 머리카락이 소리 없이 자라나듯이 우리 마음을 뚫고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사가 아닌 한, 한번 회개로 족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사람도 계속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를 좀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작정한 요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셔도 겸손히 수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자기가 외친 대로 되지 않고 거꾸로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셨다는 사실에 투정을 부립니다.
자기 체면이 깎였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더욱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요나의 편협한 민족주의 선민의식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으면
기뻐해야지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고 원망을 퍼부을 것은 또 뭡니까?
그만큼 요나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었던 민족
우월의식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심령 깊은 곳에 내재해 있는 편견과 고집은 여간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요나를 생각해보세요.
삼일삼야의 물고기 뱃속의 연단과 시련을 통과한 저
대 선지자 요나도 저렇거늘 우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요나를 보면서 우리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하시는 일에 삐치고 성을 내던 요나는 급기야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 보세요.
요나는 자기가 다시스 가는 배를 타고 서둘러 달아났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다 이렇게 하실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 시려던 재앙마저도 거두실 분임을 알았기 때문에 무작정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나라인 앗수르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태도이지요!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셔서 외치기는 했지만
그들이 구원받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다는 태도가 아닙니까? 

자, 그러면서 요나는 선지자로 해서는 안 될 아주 극단적인 말까지 합니다.
3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으니, 자기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청원이지요!

요나의 요 ‘나’는 이렇게도 깨어지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물고기 뱃속의 3일 체험 가지고서는 요나의 요 ‘나’가
깨어지는 것은 누구 말대로 ‘택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40일간 있다가 나온다고 해서 달라질까요?
인간으로서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사는 한 100% 장담하기가 어렵습니다!

4절을 보면 이런 요나의 철부지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요!

자, 이렇게 삐쳐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겠다고 난리를 치던
요나가 니느웨 성읍을 빠져나와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거기다가 초막을 지은 뒤, 그 그늘 아래 앉아
그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지켜 볼 셈이었지요.

참 요나도 지독한 사람이 아닙니까?
이미 다시스로 가는 배를 잡아타고 도주할 때부터 알아봤고
물고기 뱃속에서 뒹굴 때도 짐작은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니느웨 성읍이 혹시 자기가 선포한 그대로
망하지나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물고기 뱃속을 통과한 새 사람 요나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이것은 역으로 요나의 마음 깊은 곳에는 그만큼 이스라엘 선민의식과
앗수르 제국에 대한 증오심이 절절히 배여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요나의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철부지 같은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박 넝쿨의 비유’를 통해서 요나를 깨우치시는 하나님>

4: 7-11절은 저 유명한 ‘박 넝쿨의 비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셔서 그것이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요나를 편안하게 해주었습니다.
사막 지대인 중동의 낮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기에 뭔가
조그만 그늘이 있어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박 넝쿨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요나의 머리에
그늘을 만들어서 더위를 피하게 해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렇게 기분 좋게 니느웨 성을 관망하던 요나에게 불편한 일이 생겼습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씹어 쏠아버리니 이내 박 넝쿨이 시들고 말았습니다.
사막 뙤약볕에 그 박 넝쿨이 별 것 아니라고 할지라도 요나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그 박 넝쿨이 벌레 때문에 시들고 말았습니다.

자, 이렇게 그늘이 사라진 것도 괴로운 일인데 해가 뜨자마자
하나님께서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습니다.
여기서 동풍은 ‘시로코’(Sirocco)라고 하는 바람인데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으로서 일사병을 일으킬 정도로 뜨겁고 매서운 바람이라고 합니다.
시로코 동풍을 타고 불어오는 햇볕이 요나의 머리 위에
인정 사정없이 내리쬐니 요나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8절에 보면 또 한 차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하고 울부짖습니다.
3절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 것이 못마땅했기 때문에
내뱉은 것이고, 여기에서는 더위를 참지 못해서였습니다.
앞에서는 영적인 불만을, 그리고 여기에서는 육적인 불만을 각각 토로한 것이지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6-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박 넝쿨을 마련하신 분도 주 하나님이셨고,
벌레 한 마리를 마련하여서 박 넝쿨을 쏠아버리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고,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모든 자연현상이 요나를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는 것이지요!

자, 이와 같은 박 넝쿨 소동으로 인해 또 한 차례 토라지고 삐쳐서
죽겠다고 난리를 치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응답하십니까?

9-11절이 오늘 말씀의 하이라이트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묻습니다.
“이 박 넝쿨이 죽었다고 해서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왈, “옳다 뿐입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점잖게 가르치십니다.
“네가 아무 수고도 하지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고,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린 이 식물도 네가 그토록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 그것도 오른쪽 왼쪽도 가리지 못하는 어린아이들만
12만 명이나 되고 가축들도 수없이 많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여기 보세요.
하나님께서 ‘박 넝쿨’ 하나와 어린 아이만 12만 명이 넘는
‘니느웨’를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요나와 상관없이 하루살이처럼 스러져 간 박 넝쿨 하나만 가지고서도
사니 죽니 하면서 투정을 부리는 네가 어린아이들만 12만 명 이상 사는
니느웨 성읍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며 책망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요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에 빠져서 인간 영혼의 중요성을 간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실 때 민족이나 국경을
훨씬 초월하신다는 구원의 우주적 보편성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요나의 요 ‘나’가 얼마나 형편없이 자기중심적인 편견과
이기심으로 뒤틀려 있었던가를 보여주지요!

<또 다시 요 ‘나’가 문젭니다!>

이제 요나서의 결론을 내립니다.
또 다시 문제는 요 ‘나’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보다는 일신의 안일부터 먼저 구하는 것이 요 ‘나’의 편협한 마음입니다.
박 넝쿨 하나 때문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생떼를 쓰는 요나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요 ‘나’의 그릇된 이데올로기, 편협한 민족주의, 폐쇄적 영토주의,
이런 것들이 요 ‘나’를 사로잡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요 ‘나’의 편견과 아집과 교만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계획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요 ‘나’의 개똥철학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세상을 판단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회개는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오늘도 요 ‘나’의 안을 한 번 들여다보며, 다른 이들이
아니라 요 ‘나’부터 고치고 다듬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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