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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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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동사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노래로 불려져 사랑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1-3절, 8-13절은 사도 바울이 사랑장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서 사랑의 은사가 제일이라고 바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중 몸통이 되는 4-7절까지의 사랑노래는 따로 떼어놓아도 좋을 정도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잘 정의하고 있습니다. 아마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이 더 좋아할 구절일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랑장은 사랑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사랑의 방법론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사랑을 정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 모두 사랑을 정의 하는 15개의 단어가 나오는데 모두 동사들입니다. 3인칭 단수 형태의 동사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동사라는 것은 사랑은 행함으로 나타날 때 사랑이요, 행동화되지 않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쓰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말씀이라는 단어가 너무 정적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있어야 변화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모세에게 소개하는데 특징적인 것은 동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 이르려 하노라”(출3:7-8) 하나님은 묵상하거나 정적 가운데 만나는 분이 아니라 행동으로 자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에게 나아왔던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28)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율법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곧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 율법사는 행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 율법사가 그러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들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에 강도 만난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 지나쳐 갔지만 사마리아 인은 그 강도만난 자를 치료하고 나귀에 태워 안전한 주막으로 옮겼습니다. 이 비유를 든 후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대답도 여전합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율법사의 문제는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것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이렇습니다. 말과 혀로만, 또 머리와 마음으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동사라는 것은 행동한 만큼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전화해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요, 서로를 위해 전화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무언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자주 찾고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15개의 단어는 동사일 뿐만 아니라 현재형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동안 오래 참았다’는 과거형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많이 참았지만 지금 한 번 더 참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앞으로는 오래 참을 것이다’는 미래형도 아닙니다. 미래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참겠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런 현재들이 모여서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사랑의 시작은 오래 참는 것으로부터

사랑의 특성의 첫 번째는 ‘오래 참는 것입니다’ 7절의 첫 구절도 보십시오. “모든 것을 참으며” 그 마지막 구절도 보십시오.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 13장에 나타난 사랑에 대한 정의 중 가장 많은 것이 참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참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만큼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광고 카피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 말은 제가 앞에서 말씀드린 행동화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난 사랑을 말합니다. 그 광고를 보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습니다. 그 여자를 향해 남자가 “돌아와 내가 잘못했어” 하고 문자를 날립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네 꺼야? 난 누구한테도 갈 수 있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사랑의 대상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말로 오래 참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사랑의 조급성을 보여줍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너무 참아서 문제였습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란 말은 시집살이의 혹독함을 보여줍니다. 이에 반발해서 그런지 오늘날의 사람들은 조금도 참지 못합니다. 특히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바로 반응합니다. 인터넷의 화면이 바로바로 넘어가지 못하면 연신 자판기를 두들겨 댑니다. 교통신호가 바뀔 때 정말 단 1초도 참지 못하고 지체하면 뒤에서 ‘빵빵’댑니다.

순간적으로 화를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간관계와 관련된 일이라면 잘못하면 관계 파괴에 이르고 맙니다. 참지 못 하고 화를 벌컥 낸 순간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순간 우리는 냉혹한 현실에 직면해야 합니다. 참지 못하고 서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는 순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기가 힘듭니다. 옛날 강태공이 주나라의 재상으로 쓰임받기 전까지는 낚시질이나 하며 책을 읽으며 지냈습니다. 생활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 쌀독에 쌀이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 부인이 강태공을 버리고 떠나 버렸습니다. 오죽 했으면 떠났겠습니까? 그런데 강태공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이 다시 강태공을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는 다시 결합할 것을 청했습니다. 그때 강태공이 그 부인에게 대접에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합니다. 물을 떠오자 그 물을 바닥에 버리라 합니다. 버리자 다시 그 물을 담으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고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나고 맙니다.

사랑에서 오래 참음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유는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관계를 파괴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관계가 끊어진 후에는 어떤 수를 써도 원상태로 회복하기가 힘듭니다. 아웅다웅 싸워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지요. ‘헤어지자‘는 말입니다. 자녀 때문에 ’저 웬수같은 놈‘ 하며 살아도 좋지만 그 자녀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한 번 실이 끊어진 후에는 다시 잇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사랑의 가장 기본은 오래 참음입니다. 일단 참고 관계를 유지해 놓아야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희망을 기다림이다

오래 참으라는 이유는 율법이 아닙니다. 단순히 속은 끓고 있는데 성질 죽이며 살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래 참아야 되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래 참는다는 것을 기다림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내 마음과 내 상식으로는 조급한데 가을 꽃을 봄에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고 하여 성숙하지도 않은 나무를 자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곧 믿음입니다.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꽃 피고 열매 맺을 때가 있다는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자녀들이 더디게 성장하고, 지금 비론 가슴을 아프게 할지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문제아가 결국은 효도하는 자식이 됩니다. 문제아기 때문에 더 많이 기도하게 되고 그래서 그 기도의 에너지가 소위 문제아를 위대한 사람으로 만듭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지금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심판하러 오지만 믿음으로 견디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형편은 많이 참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합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습니다.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습니다. 그래도 참습니다. 참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이렇게 참다보면 하나님께서 새 희망의 나라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박국 향하여 이런 소망의 약속을 주십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에서도 이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부 중 성격이 서로 맞지 않아 지옥 같은 가정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서로 맞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헛돌고, 혹은 충돌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서로 맞아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서로 닳고 닳다 보면 서로에게 맞추어지고 언젠가는 딱 맞아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참지 못하고 우리는 갈라서고 맙니다. 기다림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기까지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서서히 변합니다. 성격은 서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회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당한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반복합니다.

사실 문제는 상대방만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도 변화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자기 맞는 상대를 찾아 움직이다 보면 자기 자아는 전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입니다. 만약 그 자아가 내부에 상처를 안고 있는 자아라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내가 참아야 하는 상대방은 나를 연단시키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바꾸는 것이 현명합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우연한 만남은 없다. 모든 만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만남이다. 그 의미를 알기 전까지 먼저 돌아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수는 정확합니다. 저는 바둑을 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프로 기사들은 자기가 둔 대국을 정확히 기억하고 그 바둑이 몇 백 개가 되어도 정확히 복귀합니다. 일전에 보니까 프로기사 한 사람이 아마추어 유단자 10명과 동시 대국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확히 그 수를 기억합니다. 일부러 한 수를 흐트러놓아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 이유는 돌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돌들이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돌을 마구 흐트러놓으면 아무리 프로기사일지언전 정확히 기억할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바둑 실력이 15,6급을 오르내리는 실력이지만 가끔 프로기사들의 바둑을 재미있게 봅니다. 내가 도무지 이해 못하는 수들이 많지만 그 한 돌 한 돌은 의미가 있고 나중에 가서는 결정적인 돌로 역할을 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우리 인생도 그렇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수가 많지만 하나님의 수는 정확합니다. 다 의미 있는 돌들입니다. 믿어 의심치 마세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참지 않으면 하나님의 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오래 참을 수밖에 없다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하는가?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가 오래입니까? 이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 18장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마18:21) 이렇게 묻고는 베드로는 자랑스러운 듯 이렇게 스스로 대답을 했습니다.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 깜냥에는 대단히 많이 참는다고 하고 일곱 번의 숫자를 제시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우리는 한 번도 참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70 × 7 = 490번입니다. 490번이라는 숫자는 영원히 용서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몇 번까지 참아야 하는지 그 숫자를 세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 동기를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나는 의롭고 저 사람은 미운 사람이고 그래서 몇 번까지만 참고 그 이후에는 용서치 않겠다는 태도로는 진정으로 한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자신이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아예 미워하는 감정마저도 없어야 한다는 의도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주님은 그래서 이어지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들어주십니다. 어떤 종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지었습니다. 당시 헤롯 대왕의 1년 세 수입이 700달란트였다는 것을 볼 때 정말 엄청난 액수입니다. 도무지 갚을 여력이 없었는데 주인은 자비롭게도 그 종의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다 자기에게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났습니다. 이 동관이 진 빚은 1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당시 화폐 단위로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1백 데나리온은 6십만분의 1에 불과한 아주 적은 액수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모질게도 그 1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을 때까지 옥게 가두어버렸습니다.

이 무자비한 종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습니다. 자신의 죄는 가볍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죄는 무겁게 생각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원래는 죽은 목숨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정말 사소한 잘못을 한 사람을 미워하거나 가혹하게 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다른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을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자기의 자비심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않아서 입니다. 내가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또 엄청난 죄 때문에 징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인생인데 값없이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한다면 자기에게 행한 정말 먼지처럼 작은 잘못이라면 마땅히 참아야 하겠지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고, 악한 행위에 대해서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래 참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참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예수님은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고 오래 참는 것은 실상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도 오래 참으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불편한 행위에 대하여 오래 참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우리는 긍휼이다 자비다라고 말합니다.

자연만물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보입니다. 금강산에 만물상이 있고 지하 동굴에는 기기묘묘한 암석들이 많은데 이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수억 년을 참으셨습니다. 높은 산과 큰 강을 만들기까지 하나님은 오래 세월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삽시간에 모든 것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참고 스스로 변화하여 큰 산이 되고 아름다운 강이 되고 거목이 되기까지 참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까지 하나님은 오랜 시간을 참으셨습니다. 그렇게 만든 인간이 주님은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에 대해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졌지만 육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시고 또 자손을 주심으로 인류역사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가인의 형제 살해도 참으시고 노아 시대에 악함도 바벨탑을 쌓는 교만도 참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역사입니다.

주님은 이기적인 야곱을 약속의 자녀에서 제하시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평과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참으시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며 율법을 떡먹듯이 어겼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잠깐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셨을 뿐 그 소망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무지와 로마군인들의 채찍질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어 제비뽑을 때도 주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하시며 참으셨습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의 악행도 참으셨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많은 주의 백성들을 결박하고 옥에 가두며 교회를 잔멸하였지만 이것마저도 참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5-16)

만약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재림하시기로 하시겠다고 한 날짜가 자꾸 뒤로 지연되는 이유도 주님의 이 오래 참으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저지르는 죄악의 양으로 따지면 우주는 이미 종말을 맞이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을 하시려다가도 참고 계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는데 우리는 조금도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때문에 수십 년을 참아오셨는데 우리는 단 5분도 참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 대해서 참고 계신데 왜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쪼며 괴롭게 만드십니까? 믿음과 판단과 모든 의지가 우리로부터 나온다면 우리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판단의 근거를 하나님으로부터 찾는다면 우리는 능히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래 참을 수 없다면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십시오. 주님 또한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 주님 또한 연약함에 쌓여 있었을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습니다(히5:7) 이 은혜를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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