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3.1절] 자유한 그리스도의 사람 (갈 5:13)

  • 잡초 잡초
  • 235
  • 0

첨부 1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 5:13)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우리 민족은 모든 주권과 자유를 일본에 빼앗긴 것입니다.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한반도가 일본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자주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당시 교회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주도적 역할을 다했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그가 누리는 자유에 있습니다. 그가 누리는 자유의 한계, 자유의 영역, 자유의 성격, 의미에 따라서 인간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이란 것도 자유에 기준함을 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졌을지라도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부자유하고, 아무리 명예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속박을 느낀다고 하면 그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가 누리는 자유만큼 행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3.1절을 지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의 삶을 확인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유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서본문의 말씀에서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패드릭 헨리’는 “나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를 말했는데,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요구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더 근원적인 자유를 필요로 하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죄의 속박과 고통으로부터 지배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지배되고 있습니다. 어둠의 권세 곧, 사단인 악령의 지배와 그 사단의 고소로부터 지배되고 있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지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심으로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주심으로 사단의 송사와 지배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심으로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을 자유 하도록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들을 부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인간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유 안에서 살도록 은총을 입은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유를 위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진리의 말씀과 그의 은혜로, 그리고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과 은혜와 능력을 믿고 받아들이며 순종함으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 자유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또는 도덕적이거나 관념적인 수준의 자유가 아닙니다. 율법과 죄와 사단과 죽음으로부터 구체적인 해방으로서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자유는 결코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서 획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역사의 결과로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셔서 스스로 종의 멍에를 메심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롬 7:1-4) 즉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참 자유와 구원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자유는 또한 내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책임과 자유로 이어지는 자유인 것입니다.(롬 12: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참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과 함께 그 자유를 누리는 축복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야말로 우리들의 소중한 소유물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자유롭게 되었기에 우리는 진실로 자유 합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우리의 방종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데서 방종의 사람들이 되고 사회에 대하여 무력한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자유를 누리게 될 때에 세 가지 욕망이 생긴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유에 대한 욕망입니다. 자유롭게 되면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합니다. 두 번째로 향락에 대한 충동입니다. 자유로울 때 즐기면서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에 대한 욕망입니다. 자유를 가지고 소유와 향락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삶을 창조해 나갈 때에 그 자유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로, 피타고라스는 “자제할 줄 모르는 사람을 자유인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영국 감리교의 목사이자 심리학자인 웨더헤드(L. D. Weatherhead)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키잡이나 나침반이나 지도의 좌표들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면서, 나는 자유롭게 바다를 여행하겠다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바다는 그 바보를 비웃을 것이며 그 사람의 항해는 짧은 항해가 될 것이다. 그는 나침반과 좌표와 별들이 그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고 닻을 내릴 때와 정박할 때와 항해를 끝내야 할 때를 알려주는 키잡이의 노예가 될 때에야 비로써 자유롭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유명한 탐험가 밥 바틀렛(Bob Bartlett)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많은 새들을 잡아 배에 싣고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새들 중에서 한 마리의 새가 유난히도 시끄럽게 울어대며 발톱으로 새장을 할퀴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떻게 해서 그 새는 새장에서 나와 미친 듯이 기뻐하며 창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밥 바틀렛과 동료들은 그 새를 영원히 놓쳐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몇 시간 후 그 새는 날개에 힘이 빠진 채 다시 배로 돌아온 것입니다. 맥이 빠진 그 새는 숨을 헐떡이며 갑판 위에 털썩 쓰러졌습니다. 새는 필사적으로 배를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자유를 부인하던 새장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새에게 있어 고향이었으며, 깊고 끝없이 넓은 바다를 건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나를 포로로 잡으소서 주님.”이라고 말 할 때, 우리는 비로써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새장 밖의 육체의 기회로 쓰지 않고, 나를 그리스도의 새장 안에 가둘 수 있을 때 그 자유는 우리의 자유를 자유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육체의 탐욕을 위한 방종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참 자유의 세계를 가지고 사시는 자유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자유를 가지고 가치 있게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나의 자유를 사랑으로 종노릇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그곳에 자유의 완성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사랑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자유의 능력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1m 50cm의 키의 연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1950년에 동전 몇 푼을 가지고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습니다. 그녀가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을 감기면서 사랑을 베푸는 동안에 수녀가 4000명이 생기고 고아원이 517개나 세워졌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이 생기고 AIDS환자를 위한 호스피스가 생겼습니다. 그녀의 사랑은 세상을 감동시켰습니다. 미국의 최고 시민명예상과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죽자 인도 정부가 주관해서 장례를 치렀고 전 세계가 애도했습니다. 그녀의 자유를 사랑의 종노릇하는데 썼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어떻게 당신은 그러한 일을 했습니까?”고 질문을 받았을 때에 “나는 하나님 손에 쥐어진 연필입니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종노릇을 하기위하여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종노릇의 그녀의 삶은 자유를 가치 있게 사용한 위대한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십시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가지고 사랑의 종노릇함으로 더 큰 자유의 기쁨과 감격을 누리십시다. 우리는 사랑의 종노릇하는데서 자유를 누릴 뿐 아니라 자유의 책임을 이루는 것입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노예를 해방하기 전 뉴올리언스의 노예 시장에서 아름다운 흑인 혼혈 소녀가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경매자들은 평소처럼 입찰을 하다가 군중 속에서 들려오는 강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계속 가격을 높여 불렀고 경매는 그 사람이 1,450달러에 소녀를 살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북부에서 온 사람이었는데 소녀는 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 사람은 소녀의 집으로 왔습니다. 소녀는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난 당신과 함께 갈 준비가 됐어요.” 그러나 그 사람은 종이로 된 서류증서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오, 난 당신과 함께 가길 원하지 않소. 나는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당신을 샀소. 이걸 보시오. 이것이 당신의 자유를 보장하는 증서요.” 소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습니다. “나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하여 샀다고요? 정말 내가 자유의 몸이란 말인가요? 내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수 있나요?” “물론 당신은 자유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소.” 그러자 소녀는 기쁨과 감격에 차서 쉰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나의 남은 생애동안 당신을 섬길 수 있도록 저를 데려가 주시겠어요?” 드디어 소녀는 자유로운 섬김과 봉사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종이 되게 하시어 사랑으로 종노릇하도록 사랑의 섬김과 봉사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선언한 3.1절 국가기념일을 보내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우리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가지고 사랑의 종노릇하기 위한 한 가지의 분명한 과제로 간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마음 아픈 것은 ‘국제 정치쇼’와 ‘사이비 민족공조’니 ‘사이비 평화공조’를 부르짖는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의 정치지도력과 대중연합의 포퓰리즘의 거짓 종노릇입니다. 이들에 의해 점점 외면당하고 있는 우리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회복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종노릇을 찾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눈물 흘려 기도하는 기도의 종노릇과 함께 수령세습독재체제와의 공조가 아닌 우리 동포들을 위한 종노릇입니다. 북한 동포들의 인권과 자유회복을 위한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종노릇을 해야 한다는 다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축복 자들입니다. 자유 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을 위하여 사용함으로 더 큰 자유를 누리는 축복 자들이 되십시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