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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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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비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눅 18:9-14)

들어가는 이야기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마을 뒤편 높은 산에는 많은 금이 묻혀 있는데 몇 사람이 채광하려고 도전했다가 실패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아이는 자신이 커서 돈을 벌게 되면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 이 광산을 개발하여 일확천금을 한 후,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도 자라고 꿈도 자랐습니다. 성인이 되어 어느 정도 돈을 모으자, 그는 버려진 산을 찾아와 광맥을 파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하던 갱도(坑道)는 이미 다 무너져 땅 속에 묻혔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파고 또 파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진전도 없이 시간만 흐르게 되었고, 동업하였던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고 급기야 금광 개발을 위하여 모았던 돈도 바닥이 나버렸습니다. 빈털터리가 된 그와 마지막까지 남은 광부 몇 사람만이 힘없이 곡괭이질을 하고 있던 어느 날, 굴속에서 커다란 고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여기 무엇이 있다!” 달려가 보았더니 손잡이는 거의 썩어 없어지고 쇳덩어리만 꽂혀 있는 곡괭이 하나가 땅에 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혼자서는 도저히 뺄 수 없는 그 곡괭이를 여러 사람이 함께 매달려서 힘껏 뺐더니, 곡괭이 날 끝에 뭔가 노란 것이 묻어나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금이었는데, 흔히 ‘노다지’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이전에 금광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이 땅을 계속 파다 지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내려찍었는데, 아무리 곡괭이를 빼려고 해도 빠지지 않으니까 그것을 땅에 박아둔 채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버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큰일과 작은 일의 구분이 필요 없을 정도로 능력이 많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큰일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많이, 절박하게, 오래도록 기도하게 하신 후에 이루어주실까요? 이에 대해 칼빈은 그의 ‘기도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것은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과, 둘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게 하시고자 함이다.” 우리로 하여금 깊은 기도 속에서 열렬히 간구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견고한 기도생활을 이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큼 그렇게 기도할 능력을 주십니다.

게으른 기도생활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허물며 견고한 기도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쏟아 붓지 않는 나태하고도 견고함 없는 기도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그분이 지정하신 그 위치에서 살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기도의 위대함은 단지 한 순간의 열렬한 기도가 아니라 그런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견고한 기도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견고한 기도의 세계는, 쉼 없이 이어지는 영적인 싸움에 자기를 드리기 싫어하는 안일한 자아와 더불어 싸우지 아니하고는 결코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기도가 없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은 비참하게 고갈되며, 파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기도 없이 살아가는 생활, 간단간단히 때우듯 넘어가는 기도생활에 대해 스스로 이의를 제기하고 제동을 걸 수 있는 신앙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풍성한 영적 비밀들로 가득 찬 은혜의 세계는 하나님의 광대하심만큼이나 드넓습니다. 그 거룩한 은혜의 바다를 넘나들면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사는 사람들, 거기서 험한 세상을 이길 거룩한 힘을 얻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비밀을 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견고한 기도의 세계가 없다면 이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 해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를 보면, ‘이것이 정말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시려는 비유인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도가 아니라 겸손한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시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게다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라는 명시적인 결론은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그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비유의 전반부는 의(義)를 얻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주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시작에서 언급된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에서 “또”라는 말은 이어지는 비유가 기도에 관한 주님의 가르침의 연속임을 증거 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낮아지고 높아지는 것이 기도의 생활과 어떻게 연결되며,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과 회개가 어떻게 기도와 관련되는지에 초점을 맞춰 그 해답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이 비유를 통하여 주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 세계의 그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봅시다.

겸비함과 기도응답

주께서 말씀하신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는 겸비하게 자신을 낮춘 자의 기도를 잘 들으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영광은 하나님의 응답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 응답의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는 ‘겸비함’입니다. 이는 겸비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엎드린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그의 응답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서 온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봄에 난(蘭)을 파는 가게에 가보면 군자란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자라면서 줄기가 굵어집니다. 일 년에 한 번 피는 꽃은 한두 달 밖에 가지 않지만 그 청초하고 우아한 멋이란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꽃이 핀 난과 피지 않은 난의 가격차는 엄청납니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배우는 자들에게는 기도의 거장들이 지닌 태도나 그 과정도 아름다워 보이겠지만, 기도의 응답은 마치 난 위에 맺힌 아름다운 꽃송이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 속에서 맛보는 신비한 체험도 응답보다 더 자랑스럽지는 않으며, 기도에 있어서 응답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영광은 응답받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을 삶으로써 입증할 수 있을 때 그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미국 집회를 갔을 때 듣게 된 간증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한 교포가 사업이 망하여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그는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축도나 받고 죽자’는 심정으로 한 밤중에 목사님 댁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딱한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를 위해 축복을 빌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튿날 아침,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며칠 전 무심코 사둔 복권이 있었는데, 그것이 100만 불에 당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거액을 상금으로 받게 것을 알자마자 그는 제일 먼저 목사님께 기쁜 소식을 알렸습니다. 이 놀라운 일은 그 전날 밤 목사님께서 자기에게 손을 얹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해 주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간증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어떤 요행수를 바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가 목사님과 기도하지 않았다면 비록 복권에 당첨되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이루어주셔도 그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축복을 받아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피를 말리며 매달리는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진 축복을 인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인정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기도 없이는 응답도 없습니다.

오늘 성경의 비유는 그러한 기도 응답의 열쇠가 겸비함에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본문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바, 자기를 낮추는 것은 기도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며 혈서를 쓰라는 뜻이 아니라 삶 자체가 겸비한 사람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적 인격이 고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과 많이 대화하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버트 맥체인(Robert M. McChey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주님을 많이 닮는 것이다.” 우리가 많이 기도하면 할수록 인격이 변화되는 것을 느낍니다. 천박하고 즉흥적인 사람들이 신중하고 깊이 있는 성정(性情)의 사람으로 변하고, 세상의 학문에 뛰어나지 못할지라도 지혜로운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기도하는 정신 자체가 한없는 겸비이기 때문에, 깊은 기도는 인품과 기질에까지 그 겸비함이 스며들게 합니다.

기도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죄에 대한 명민한 마음을 간직하게 되며 자기의 내면을 살피고 삶 속에서 묻어나오는 마음의 작용들을 헤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겸비함에 대해 언급하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주님을 의뢰하는 겸비함으로

성경은 우리를 흔히 양에 비유합니다. 그렇게 많은 동물들 중에 왜 하필이면 우리를 양에 비유하셨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동물들은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본적 방어능력이 있습니다. 사자에게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고, 얼룩말은 부지런히 도망갈 수 있는 강한 다리와 강력한 뒷발질이 있으며, 새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카멜레온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할 수 있는 보호색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에게는 자기를 보호할 수 없는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무기가 될 만한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빠른 다리도, 멀리 볼 수 있는 좋은 시력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양에 비유하신 것은 ‘혼자서는 살 수 없도록’ 지음 받은 피조물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가지고 여호와만을 즐거워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교만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죄는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에 차 있는 인간의 불행은 기도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귀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들릴 리 없고, 구원의 길을 물을 리도 없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그분의 도움을 구할 리도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기도하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만큼도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교만입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그렇게 살아온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기도함 없이 살아 온 인생은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산다고 해서 모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처럼 사는 인생도 있고, 산 자처럼 죽는 인생도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졌는데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거부하고 살아가는 그 삶이 오죽하겠습니까? 마치 밀림에 버려진 아이가 짐승의 젖을 먹고 자라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지 않으며 교만하게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짐승과 같은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또 주님이 살아계심을 부인할 수 없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무지막지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 받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힘없는 존재임을 의식해야 합니다.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긍휼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의지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볼 리가 없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도 긍휼에 넘치는 응답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존재 자체가 사랑스러우면 물질을 주시는 것도 그분께는 아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분의 마음에 사랑이고 즐거움인데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겠습니까?
주님이 막으시는 길을 계속 걸어가려는 인간의 마음은 결국 ‘나를 행복하게 하는 데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따라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기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가 왜 하나님께 몸부림치면서 매달리겠습니까? 간절한 기도 제목조차 없는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노심초사 할 리가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기도와 삶은 나뉘지 않고 둘은 함께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유통합니다. 사는 것만큼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삽니다. 그러므로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고, 기도를 능가하는 삶도 없습니다. 기도로 살고, 사는 것으로 기도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낮아진 삶을 요구합니다. 기도의 정신은 삶의 정신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겸비함과 의로움

하나님께서는 겸비한 자에게는 관용을 베푸시지만, 교만한 자에게는 당신의 엄위하심을 보이십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응답 받는 기도생활을 하려면 우리의 삶이 ‘겸비’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나부끼는 상한 갈대의 마음으로, 휘몰아치는 밤바람에 꺼질 듯 몸부림치는 심지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삶이 깃들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이 비유의 전체적 구도는 파악되었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으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결론 지으신 대목입니다. 즉 기도에 요구되는 겸비함과 의로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은 두 사람인데,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또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나무랄 데 없는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그의 이 경건한 기도에 무슨 문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바치게 해주시고, 금식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 감사하다는데 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반면 세리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그는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고픈 말은 많은데 말이나 행동으로써 표현할 길이 없을 때 답답하여 우리의 가슴을 치게 됩니다. 세리는 이 기도밖에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지은 죄를 고백하려 하니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고백할 수 없고, 자랑할 것은 더더욱 없으니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속에는 드리고 싶은 기도가 많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드릴 기도라고는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슬픈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얼굴조차 들지 못한 채 눈물을 뿌리던 세리가 당당하고 거창하게 기도를 드린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함을 받고 성전을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세리의 삶 자체는 의로운 삶이 아니었지만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롭다 하시는 인정을 받게 하였을까요?
신앙에 실패하는 지름길은 늘 변화무쌍한 자신과 세상을 믿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의로운 삶을 살 수 없고 바르게 살려고 하지만 시시때때로 죄를 지음으로써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불결한 영혼을 어찌할 수 없어서 겸비한 마음으로 깊이 참회하게 됩니다. 회개하는 죄인을 용납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우리 영혼에 묻은 더러운 죄를 보혈로 씻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참회할 때에 성령의 불과 회개의 눈물로 정결케 되며, 이런 방식으로 기도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이 비유를 보십시오. 지금 성전에 올라가 눈물로 기도를 대신하고 있는 세리가 무슨 의로운 일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의로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행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리가 주님께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바리새인에게는 없던 참회를 통해 정결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님이 전해주시는 복음을 거절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세리를 이렇게 다루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불공평해보였겠습니까? 그들은 먹고 마시고 출입하는 것까지도 세세히 율법을 따라 살던 사람들인데, 그렇게 살아온 자신들은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죄 많은 세리들이 인정받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결국,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진실한 참회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은 세리의 삶이 아닙니다. 그의 참회하는 태도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신앙이 기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리시기 위함입니다. 그가 만약 참회하지 않았더라면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어졌던 것보다 더 큰 책망과 저주를 받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회개하는 사람의 마음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분명히 세리는 죄 많은 사람이었으나 죄 많은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죄를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의로운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죄에 대해 더 많이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과 자기의 죄에 대한 절망적인 대면은 비례합니다. 세리가 지금 절망적인 마음으로 참회하고 있는 것은 단지 죄가 많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고 싶은 갈망으로 인해 자신이 죄인임을 더욱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었고, 자신의 죄가 점점 더 절망적으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저 주일이나 지키고 헌금이나 좀 내는 것으로 의를 삼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고 있는 더러운 죄들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에 빠지는 교만함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앗아가고, 그러한 갈망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참회하는 기도는 우리를 정결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이전에 어떠한 삶을 살아왔든지 하나님은 참회한 사람들을 정결한 자로 여기시며 그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리만치 깨끗한 사람들에게 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때 우리의 삶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갈망하게 될 것이며,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 생명적 연합과 친교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그분 자신을 구하지 아니하는 교만한 마음을 미워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기도에 익숙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며 겸비한 마음으로 기도 드리는 자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자를 의롭게 여기시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응답의 열쇠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한없이 낮아지는 마음, 진실한 참회를 통해 정결해진 의로운 심령입니다.

의로움과 기도응답

또한 우리는 이 비유에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과 기도 응답 사이에 모종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야고보서의 말씀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왜 엘리야는 기도의 세계에서 이처럼 특별대우를 받았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엘리야는 기도 이전에 이미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도에 위대한 능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소리 큰 사람의 기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우리는 마음이 담기지 않은 통성기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 없이도 기도가 홀로 설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너무나 쉽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진실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삶의 소원이 기도로 이어지고 기도의 간절함이 삶으로 잇대어지는 그러한 기도의 모임은 얼마나 향기로운 모임입니까? 그들에게는 기도의 역사에 대한 주인공 의식이 있기 때문에 자신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이며,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돌덩이같이 굳은 사람들이 당신께 기도할 때면 그를 감화시켜, 어린아이의 살갗처럼 부드러운 심성의 소유자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혼에 은혜의 말씀을 부으셔서 변화시키기도 하십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자신의 부모에게도, 사랑하던 모든 사람들에게도 외면당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드려지는 중보기도를 통해 고치시기도 합니다. 삶으로써 자신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자의 기도는 이처럼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일치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경건하고 의롭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즉시 신령한 정서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인 순발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여러 가지 세상살이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그 모든 섬김의 동기가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

기도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를 배워야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그의 열렬한 기도생활은 장기 자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기도로 하나님의 응답을 거래하려고 하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당신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돌아보기를 요구하십니다.
주님의 이러한 요구를 모두 들어드리십시오. 변화되십시오. 그리고 회개를 통해 정결한 마음을 갖기를 구하십시오. 기도의 응답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언제나 거룩한 간증이 넘치는 삶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마치 장엄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감동적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러한 기도 응답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살아 있으나 사실은 죽은 자들과 방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기도 응답의 감격 없이 살아가게 하는 무딘 마음을 깨뜨리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있는 불결과 죄악을 깨끗이 씻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그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고사시키는지를 생각하고 미워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해 주시기까지 그의 은혜를 구하는 열심을 포기하지 맙시다. 우리는 비록 죄로 말미암아 불결해진 마음으로 나아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구하는 우리의 심령을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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