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역설적 기쁨의 신비 (요 3:22-30)

  • 잡초 잡초
  • 592
  • 0

첨부 1


역설적 기쁨의 신비
요한복음 3:22-30

[톨스토이]가 쓴<재난의 원인>이라는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지내던 두 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쪽 집의 닭 한 마리가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습니다. 이집 아이가 그것을 보고 옆집의 친구에게“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가 계란을 낳았으니 좀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아이가 들어가서 보고는 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쪽 집 아이가 저쪽 집 아이를 보고 거짓말 하지 말고 순순히 내 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알이 있다 없다 하면서 서로 싸움이 붙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엄마들이 싸웠습니다.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서로 엉켜 떨어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들이 가세하여 또 싸웠습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한쪽 편의 아버지가 저쪽 집에 그만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삽시간에 불이 번지더니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이 쪽 집도 다 타버렸습니다. 졸지에 두 집이 다 망해서 잿더미 위에 앉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까? 계란 하나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겨우 계란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 깊이 들어있던 자존심과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갈5:15에 보면“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식의 막무가내 정신은 모두를 망하게 합니다. 싸우면서“네가 잘돼라.” “당신이 성공하시오.”하는 사람 없습니다. “쫄딱 망해라.”하다가 안 되면“너도 망하고 나도 망하자.”하고 끝내 버립니다. 이 의식 속에는 네가 잘 되면 내가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피해망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잘 되는 것은 볼 수가 없다. 내가 실패할 바에는 차라리 너도 실패해라.”는 겁니다. 이게 문제거든요.

사람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하느냐 에는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가치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요즘 많이 사용하는 말로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마음속에 어떤 사고의 틀이 있는데 그 틀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해서 불행하기도하고 행복하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틀이<고정 관념>이 되어버리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고란 바뀔 수도 있어야하고 더 나은 것은 받아들여야 하는 융통성이 필요한데 고착해 되어버려서 굳어지면 적잖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사랑 받아야 되고, 내가 제일이 되어야 하고, 내가 가져야 행복한 사람도 있지만 내가 사랑하므로, 내가 희생하므로, 내가 주므로 행복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싸워서 내가 이기는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 내가 져줌으로 저 사람이 행복해합니다.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저 사람이 하면 더 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양보>란 처음부터 기꺼운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포기>란 버티다 버티다가 마지못해 하는 것이 포기이거든요. 그리고 <양보>란 그것으로 기뻐하고 행복해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하지만<포기>는 두고두고 마음속에 앙금이 남아 있어 도무지 기쁨이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져 주지만 언젠가는 도로 찾으리라’는 보복심리가 남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우두머리 되어서 대접 받는 게 행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를 우두머리 삼는 그 사람들이 영원히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나를 떠나가면 이 행복이란 함께 떠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주는 것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은 그 행복을 잃을 염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주어도주어도 행복은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그게 받는 것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주는 것에서 얻는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얻어지는 행복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는 사랑과 희생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는 사람이 행복 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유명한 시인[청마 유치환]이<행복>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자가 분명 더 행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받으려고만 하는 심리 때문에 인간은 행복하지 못하고 또 하나 무엇이 문제냐 하면 질투가 나를 행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질투하는 마음은 사람을 썩게 합니다. 잠언에 보면“시기는 사람의 피를 마르게 하고 골수를 마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흔히<무한경쟁>이라 하여 문자 그대로의 의미처럼 누군가가 일등을 해야 끝이 날까 하는데 이게 쉽지 않단 말입니다. 그래서 끝없는 경쟁의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 일등은 하나가 아닙니다. 한사람은 운동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음악을 잘 해 일등이요, 한사람은 얼굴이 예뻐 일등이요, 한사람은 말을 잘 해 일등이요, 결국, 다 일등 할 수 있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에는 일등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무한 경쟁>이 아니라<무경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잘못 되었느냐하면 내가 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을 죽이려고 한단 말입니다. 남이 살아야 나도 산다는 정신이 없습니다. 나만 사는 경쟁, 이건 공산주의 이론이요, 결국은 같이 붕괴되는 겁니다. 이 경쟁하는 마음, 시기, 질투하는 마음, 이로부터 구원받아야 참 행복이 있습니다.

자 이제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어떻게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 합니까? 그는 자기 앞의 문제를 신앙적으로 해석합니다. 오늘 본문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갑니다. 그 때 요한도 가까운 곳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또 누가 와서 고자질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감정을 충동질하는 제자들 앞에서 절대로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분을 품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기분이 썩 좋지 않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나에게 몰리던 사람들이 안면몰수하고 저에게 가버린다 맘 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받을 자가 없느니라.”하나님께서 주신 일입니다. 내게 주었고 그에게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남에게 주신 것에 시기, 질투 할 것 없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 내게 주신 은혜 여기에 충실하면 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요한은 더불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어디에서 오느냐 성경을 보면 세례요한이 참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여러분, 이게 뭔지 아십니까? 물러나는 기쁨입니다. 여러분, 기쁨에는 시작하는 기쁨도 있고요, 끝내는 기쁨도 있는 것이거든요. 늘 내가 저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어서 내 말 한마디에 움직여 줘야만 기쁨이 아닙니다. 때로는 물러나는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어려운 기쁨입니다. ‘내가 쇠하여 지므로 기뻐한다.’는 이 역설적인 기쁨은 아무나 감히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세례요한은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일로 볼 줄 아는 신앙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앙 안에서 자신의 적절한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본래성을 알았기에 그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 왜 오늘 이 자리에 있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사람에게는 생일이 두 번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난 날이고, 또 하나는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하고 생의 목적을 아는 날입니다. [오 헨리]가 말하기를“길가에 구르는 조약돌도 필요 없이 뒹구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요한은 예수를 증거 하기 위해서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전위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역설적으로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낮아져도, 쇠하여져도 행복하다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의 위치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해안에서 호화스러운 요트 한 척이 침몰되었습니다. 해안 구조대에 SOS신호가 왔습니다. 구조대 통신원이 회신을 했습니다. “알았다, 곧 구하러 가겠다. 현재 당신의 위치를 알려라.”이 때에 대답이 왔습니다. “나는 한국에 있는 모 은행의 은행장이다.”그리고 회신이 뚝 끊어졌습니다. 결국 이 배는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What is your position?”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탓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현실적 위치가 중요한 것이지 은행장이라는 지위가 중요한 것입니까? 그의 지위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명예가 무슨 상관이 있고, 그의 재산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지금 필요한 건 구조입니다. 난센스 같지만 이것은 정말로 기막힌 사건이었습니다.

한국교회사에[주기철 목사님]과[조만식 장로님]하면 참으로 유명한 분들입니다. 어느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려는 조만식 장로님에게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과 얘기하다 그만 예배 시간에 늦고 말았답니다. 설교하던 주기철 목사님이 늦게 들어오는 조만식 장로님에게“장로님, 오늘은 의자에 앉지 말고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조만식 장로님이 주기철 목사님의 옛 스승입니다. 그런데 스승인 장로님께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조만식 장로님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설교를 마친 주기철 목사님이 조만식 장로님께 기도를 시켰습니다. 장로님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애국 운동한다고 사람을 만나다가 하나님 만나는 예배 시간에 늦었습니다. 목사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시면 설교하다 말고 이토록 책망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을 마음 아프게 한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은혜로운 설교를 듣던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방해한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며 눈물로 기도하자 주기철 목사님과 온 교우들이 함께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과연 그 스승의 그 제자요, 그 목사의 그 장로”라며 칭송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세례요한의 고백 속에는 그의 역설적인 행복이 들어 있습니다. 쇠하여지는 자의 행복과 기쁨을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행복은 자기희생과 양보와 낮아짐에 있습니다. 이 겸손으로부터 오는 역설적인 기쁨의 신비를 아는 자만이 행복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