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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패를 넘어 축복으로 (수 8: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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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지성 시인 <장 콕토>가 사람들을 향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당신의 집에 불이 났다면 당신은 무엇을 갖고 나오겠는가.”
사람들의 대답은 각양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현금, 어떤 사람은 주식,
  어떤 사람은 땅문서, 어떤 사람은 보석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장 콕토 자신의 대답은 특이했습니다.
“나는 불을 갖고 나오겠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을 갖고 나와야 불을 끌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불의 열정을 갖고 나오겠다는 고백입니다.
비록 모든 것을 불 속에서 잃었어도
그 속에서 불의 열정만 건졌다면
  잃은 것의 전부보다 더 큰 것을 얻은 셈입니다.

7장에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를 했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아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간과 그의 모든 소유를 처단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8장에는 다시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실패와 성공에는 다 이유가 있듯이
아이성 전투의 승리의 교훈을 통해
    실패에서 축복으로 나아가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장 콕토>가 말하는 실패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의 열정,
그 힘이 어디서 옵니까?
아이성 정복의 실패 후 아간의 처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 우리가 실패에서 축복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1절)
하나님의 사람은 비록 실패의 자리에 서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오늘 실패의 자리에 서 있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1절에
[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네 손에 주었노니 ]
우리가 비록 실패의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주의 위로의 말씀만 있으면 얼마든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아이성 정복의 실패 때에도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탄식을 하고 있을 때
수7:10절 [ 여호수아야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계속하여 엎드리고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 말은 실패를 딛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은 3가지 축복을 주십니다.
1)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이 말씀 어디서 많이 듣던 말씀 아닙니까?
이스라엘 가나안 정복이 시작되면서 수1:1-9절까지 보면
이때가 언제입니까?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모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네가 밟는 땅을 다 너희에게 준다 ”
라고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도록 용기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말씀을 아이 성 정복에 실패한 후 낙심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또 다시 들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새로운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한 번 실패했다고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한번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영원히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든지 주님의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처음처럼
        새로운 은혜를 준비하시고 받아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도리어 위로와 용가를 주십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딤후1:7절에
디모데야 목회를 하면서 절대 두려워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그리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렘29:11절에
[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
그러니 실패다 싶어 거든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장래 소망을 주십니다.
사43:1절-2절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하리라 ] 

2) 일어나라.
  실패했을 때 처방을 아십니까?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한 사람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습니다.
스물두 살에 처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보기좋게 실패합니다.
스물세 살에 주의회에 출마하여 낙선합니다.
스물네 살에 또 사업에 실패, 스물일곱 살에 신경쇠약과 정신분열증 시달림
다시 스물아홉 살에 의회의 의장직에 도전하지만 낙선,
서른네 살에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서른일곱 살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
서른아홉 살에 또 낙선, 마흔여섯 살에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가 낙선,
마흔일곱 살에 부통령 출마 낙선, 마흔아홉 살에 또다시 상원의원 낙선,
참으로 대단한 실패의 경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쉰한 살에 대통령으로 출마해서 당선됩니다.
그가 바로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과 존경받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간단하지요. 저는 실패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면서
싷패할 때 마다 나를 붙들어 일어켜 세우준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요.
롬8:28절 [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우리가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들려진다면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3) 다 네 손에 주었다 - 붙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이성 전쟁의 실패는 아간의 범죄로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 묻은 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은 사람도 성읍도 땅도 다 붙여 주십니다.

그럼 아이성 전투의 실패와 승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2. 두 번의 아이성 전투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2절, 참조/수6:18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 점령 때와는 다른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6:18절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
오늘 본문 8:2절을 봅시다.                         
[ 너는 여리고와 그 왕이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 할지니라`
여리고를 정복할 때에는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전리품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아간`이 그의 탐욕과 범죄의 유혹을 조금만 더 참고 물리쳤더라면
아간의 가족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과 전쟁의 승리와 풍성한 물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원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에 대하여 <훼렘>을 선포하시고
    그 땅의 모든 물질들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보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아간`은 탐욕의 유혹을 물리치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그 은혜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아간`이 탐욕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였다면
`아간`은 그의 가족과 함께 심판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전쟁의 승리는 바로 순종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전쟁뿐이겠습니까?
축복의 원리도, 성숙의 원리도, 형통의 비결도 바로 순종인 줄 믿습니다.
비록 실패 가운데서도 다시금 순종하면 실패를 넘어 축복이 있는 줄 믿습니다.

성 프랜시스의 일화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 두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며
“뿌리는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 잎은 땅에 묻히도록 심으라.” 고 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한 젊은이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고 하며    <5>
                불평하며 돌아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계속 해서 심었습니다.
누가 프랜시스의 수도자로 받아 들여졌겠습니까?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수도사로 받아들였습니다.
프랜시스는 순종하는 마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수도 생활을 하려면 생각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스승의 말에 단순히 순종할 줄 알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창고에 보물이 바닥나서 탈취물을 바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백성이 축복 받을 자격이 있나 없나, 순종으로 테스트 한 것입니다.
순종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이성 정복의 승리의 전략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3. 아이성 전투의 전략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입니까?(3-17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 성 정복에 실패했던 이유는
      아간의 범죄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사적인 전략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아이 성의 규모만 보고 자만했다가 실패했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 아이 성 정복에 나설 때에는 약 3,000명의 군사만 보내어
      그 성을 치려고 했었습니다.
이것은 정탐꾼의 보고를 받은 여호수아의 전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고 여호수아 독단적으로 전쟁을 지시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여리고 성 정복 후 이 여세를 몰아가면
  승리할 수 있다는 용기가 충천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아이 성 정복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싸움,
하나님께서 떠난 이스라엘의 군대는 허수아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명예도, 이스라엘의 승리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아이 성 정복 전쟁에 나서기 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7절을 봅시다. [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
요단강을 무사히 건너게 된 것도,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일도
      하나님이 붙여 주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붙여주신 것에 대해서만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2절에
[ 아이 왕과 그 땅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다 ]
이 말씀은 이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요단강을 건널 때, 여리고를 정복할 때
      똑같이 들리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처음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새롭게 용기를 내어 아이 성 전투를 준비하였습니다.
3절 이하 말씀에서
3만명의 군사를 준비하고 약 5,000명의 군사를 성 뒤에 매복시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패배를 위장하기 위해 아이 성을 치러 올라갔다가
    그냥 도망쳐 나오게 해서 아이 성의 모든 군대가 성을 나오면
    매복했던 군대가 성을 점령하기로 한 것입니다.
    아주 지혜롭고 주도면밀한 작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지하여 여호수아가 세운 이 작전은 그대로 들어맞아서       
아이 성을 완전하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과 아무리 굳은 결심으로 마음을 고쳐먹어도
    내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거두시면 잠시도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많은 실패와 고통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려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처음처럼 함께 하시고
            능력 주셔서 승리케 하십니다.

그런데 아이성 두 번째 전투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수아의 행동 가운데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4. 여호수아가 두 번째 아이성 전투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점은 무엇이며
      이런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18-29절)

18-28절까지 두 번째 승리의 전쟁을 기술하면서
18절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
전쟁이 시작되자 하나님은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명령에 순종하여 단창을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는 순간             
이것이 신호가 되어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단창을 든 여호수아의 손은 단순히 공격신호만이 아니었습니다.
26절에 보면 [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다 ] 고 합니다.
전쟁 내내 여호수아는 이 단창을 들고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말씀의 검을 든 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단창을 손에 들고 아이성을 가리키는 모습을 보면
    또 한 장면을 떠 올립니다.
출17: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과 전쟁할 때
그때도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지팡이를 손에 들고 서 있습니다.
지팡이를 든 모세의 손 - 기도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 단창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왜? 단창을 든 손을 말씀의 검을 들은 손이라 하는가 하면
앞에 여리고 성 정복과 비교를 해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아이 성 전투는
    여리고 성 전투와 전개 방식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하루에 한 번씩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이 전투에는 인간의 노력도 병법도 없습니다.
        순전히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한 전투였습니다.

그러나 아이 성 전투는 철저히 병법에 의지한 전투였습니다.
밤중에 여호수아가 3만 명을 숲 속에 매복시켜 놓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추가로 5천 명을 더 매복 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아이 성 군대와 전투를 벌여 거짓 패한 척 달아납니다.
    첫 전투에서 승리했던 아이 백성들은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와 이스라엘을 추격합니다.
이 때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이 성 안으로 들어가 성을 불태웁니다.
그리고 뒤쪽에서 쫓아오며 아이 군대를 칩니다.
이 때 달아나던 이스라엘 본진이 다시 뒤돌아서
    아이 군대를 양쪽에서 협공을 합니다.
이 전투 결과 아이 성 백성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둡니다.
철저한 매복 작전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도한 전투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리고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를 계획한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6장에서 여리고 성을 돌도록 명령한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8>
오늘 읽은 8장 2절에서도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고 명령을 내리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두 전투의 진행양식을 보면서
하나님의 역사 섭리에 대한 인식을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기적적인 방법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사와
          인간적인 것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떤 분이 사는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이 분은 독실한 성도였기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물이 차 급기야 지붕 위로 올라선 그에게 구조선이 다가왔습니다.
빨리 보트에 올라타라고 하였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울 것이니까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물이 더 차올랐습니다.
두 번째 구조선이 와서 구명 튜브를 던졌지만 이분은 거절하였습니다.
이제는 물이 거의 목까지 차올랐을 때
    헬리콥터가 와서 이분에게 로프를 던졌습니다.
그러나 신앙심 좋은 이 분은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고 하면서 끝내 거부했습니다.
    결국 이 성도는 홍수에 쓸려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죽어서 천국에 간 이 분은 화가 나서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기도하면 분명히 도와주시겠다고 하면서
      왜 제 기도를 외면하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아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듣고 너에게 구조선을 보내고,
구명 튜브를 던지고, 심지어 헬리콥터까지 보냈는데. 네가 모두 거절했다”
이 분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만 자기에게 응답하실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우리도 신앙 생활하면서
      이렇게 어리석은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방식은 다양합니다.
  우리의 병을 기도로 낫게 해주실 수도 있고,
  병원 의사의 손을 빌어 낫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은 꿈과 신비한 음성으로 들릴 수도 있고,
  책이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서,
  아니면 여러 환경 변화를 통해서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적적인 방식으로 드라마틱하게 도울 수도 있지만,
  평범하게 다른 사람의 손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어느 때는 여리고 성을 돌듯이 무식하게 돌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적으로 우리의 무기력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어느 때는 기도보다는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탁월한 전략과 전술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 중에서 여리고 성처럼 기적적인 승리가 더 많겠습니까?     
아니면 이런 전략과 전술에 의한 전투가 더 많겠습니까?
    사실 전략 전술에 의한 승리가 더 많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나 아이 성 전투에서나 언제든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도하는 방식은 그때마다 다릅니다.
그렇지만 대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략과 전술을 사용하여 싸움에 이기도록 만드실 경우가 더 많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우리 인생에 가끔 있을 뿐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말 간헐적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만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실력을 기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종교개혁 하면 <마틴 루터> 한 사람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마틴 루터와 함께 동역했던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사에 등장하는 <필립 멜랑흐톤>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마틴 루터보다 열다섯 살 아래였습니다.
그러나 굉장히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얼마나 친했느냐 하면 두 사람은 죽은 다음에도 유언에 따라서
부부지간도 아닌데 비텐베르크 교회의 한 무덤 안에 묻힐 정도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일종의 행동주의자였다면
    필립 멜랑흐톤은 이론적인 학자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다가
    종종 좌절하기도 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자기의 후배였지만 친구였던 멜랑흐톤은
늘 `당신이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진리는 반드시 이길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손에 들고 나가세 `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쓸 때마다 말할 때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멜랑흐톤>은 루터에게 성경 한 구절을 통해 그를 격려하였습니다.
마틴 루터가 멜랑흐톤이 권한 말씀 중 가장 좋아한 성경구절은   
롬8:31절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
루터는 이 말씀을 들고 종교개혁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느 때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아이를 가리키는 단창은 목표를 향한 집중력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여호수아의 손에 든 단창만 보고 있습니다.
그 단창이 향하는 방향을 향하여 달려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 나가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거나 중간에 흐트러지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달려 나갈 푯대를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푯대를 놓치지 않는 인생이 승리합니다. 문제는 집중력입니다.
여호수아는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단창을 들어 아이를 향하였고,
이스라엘은 그 지시를 따라 싸움에 집중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 목표를 향하여 단창을 들어 가리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까지 그 잡은 단창을 내려놓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단창이 향하는 목표를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눈을 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아이 성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단창을 내려놓지 않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효과적인 매복 작전으로 인해 아이 군사들과 거민을 사로잡은 여호수아는
자신의 뒤를 따라왔던 군사와 거민들을 들에서 죽이고,
성에 남아 있던 모든 거민 남녀 1만 2천명을 진멸했습니다.
이처럼 아이 거민들을 철저하게 진멸한 것은
우상 숭배를 일삼던 가나안 거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아이 왕의 시체를 나무에 매단 것은 그가 죽은 후에라도 모욕과 수치를 당케 하여
    그와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방지하고자 함이며,
해질 때에 그 시체를 내린 것은 율법의 규정에 따른 것으로(신21:23) 
    저주를 받은 부정한 시체로 인하여
    약속의 가나안이 부정해 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처입니다.
특별히 그의 시체를 성문 어귀에 던진 것은
그가 다스리던 그곳에서 그는 비참하게 최후를 맞음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고, 헛된 것을 좇는 자가
결국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아이 성 전투에서 승리한 여호수아는
승리의 기념으로 축제를 벌이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먼저 단을 쌓습니다.

5. 왜 하나님은 아이성 정복 후 여호수아에게
  에발 산에 단을 쌓고 율법을 낭독하라고 했을까요?(30-35절) 

30절 [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 ]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정복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백성들을 에발산으로 이끌고 가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연상하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구 선수 홈런 왕 출신 이 만수 감독입니다.
이 만수 선수가 한창 홈런왕 시절에 삼성이 승리하고 나면
감독과 모든 선수들이 저녁에 삼페인을 터트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만수 선수는 철저한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혼자 빠져나와
    오늘 내가 최선을 다했는가?
    그리고 다음 시합을 다짐하며 배팅 연습을 1000번이나 한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이성이 다가 아닙니다.
이제 가나안 전쟁에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끌고 에발산으로 온 것입니다.
에발산은 아이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0Km나 떨어진
  가나안 땅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단을 쌓겠다고
싸움에 지치고, 여행에 지친 백성들을 이끌고 에발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행동은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에발산에 먼저 단을 쌓았다는 것은
1.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아이 성 정복의 기쁨과 감격, 그들은 충분히 그 감격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 기쁨 뒤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에
  아이 성의 왕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붙여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권세와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한 주간 승리하는 삶을 살다가 주님 앞에나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방법을 다시 확인해 주는 의식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가 복된 삶을 누리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발산에다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돌에 새긴 다음  모든 백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에발산에 서게 하고
또 다른 그룹은 그리심 산에 서게 한 후에
그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은 여호수아가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행한 것이었습니다.
신27장에 보면
11절 [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 라고 시작하여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는 그리심 산에 세우고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 지파는 에발 산에 세운 다음
그리심 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축복의 말씀을 낭독하고
에발산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저주의 말씀을 낭독할 것을 명령합니다.
구약 주경가 <델리취>는
이 장면을 두고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늘 하나님 말씀이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내 생각 내 뜻대로 안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언제 이렇게 내게 복을 주었는고 ! 간증할 날이 올 줄 믿습니다.
그러기 그리심 산에 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실패를 넘어 축복으로 일어나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시지 바랍니다.
나아가 그 말씀이 가르키는 방향으로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사람도 땅도 물질도 붙여줄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축복의 산, 그리심 산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내게 축복의 말씀으로 들려지기를 축원합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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