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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마음을 품으라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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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최고의 영성지도자인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박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지체장애자 수용소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살며 뒷바라지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리해야만 했느냐고". 후에 나우웬박사는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혔습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오르막길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교수직까지 올라가 인기와 명예와 부를 함께 누리면서 부족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체 부자유한 '아담' 을 만나면서부터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고통 당하는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올린 모든 특권들을 내던지고 지체장애자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오르막길에서는 안 보이던 예수님이 내리막길에서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내리막길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장애자들과 함께 살면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낮은 자리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살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우며 사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던 교회입니다. 물질을 바쳐서 선교사를 돕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에 옛 사람의 마음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옛 사람의 마음은 자기 위주의 마음입니다. 자기이름 내는 것을 탐합니다. 칭찬 받기를 좋아합니다. 존경받기를 즐겨합니다. 자기의 의견이 인정되기를 원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알아주기를 탐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의 유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야심을 가지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간절히 호소합니다. 본문 5절에 보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는 '너희들의 마음 속에' 라는 말이며, '품으라' 는 의미는 '태도를 가지라' 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기준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충만할 때 교회가 교회다워집니다. 교인은 교인다워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게 될 때 다툼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가 됩니다. 자기 일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하며 지내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생각하며 그 마음을 품어야 할 절기입니다. 부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품어야할 그리스도의 마음은,

첫째로 겸손의 마음입니다

중국 선교사인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교만해지려는 유혹이 더 심할 것 같습니다. 당신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때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와 정반대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을 만큼 작고 약한 자를 찾으시다가, 저를 발견하신 것입니다." 죠지 뮬러가 설립한 고아원원장인 프레드 버거는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젊은 형제들에게 말해 주시오. 그들이 너무 작아서 하나님이 못쓰시는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쓰실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 커서 쓰시지 못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십니다. 본체는 '모르페' 라는 원어로 '단순한 형태'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비롯한 '정체성' 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본질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보다 더러운 욕심과 정욕을 마음에 채우며 삽니다. 섬기기 위해서 낮아지지 않습니다. 종처럼 희생하지 않습니다. 항상 비판만 합니다. 분쟁만 일삼고 삽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낮아지고 더 낮아져야 합니다. 오직 겸손한 마음만이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겸손하지 못함이 문제입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달라질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함으로 다툼은 사라지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남의 일을 돌보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가진 자로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복종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이라 불리우는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 같은 삶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세가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사도요한의 제자인 폴리캅(Polycarp)은 로마의 황제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80평생동안 자신을 한번도 배반하지 않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고백하면서 기꺼이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졌기에 죽기까지 복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이기에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의 겸손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낮아지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으로 십자가를 지심까지 나아갑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원대로 복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하루를 보내고 일을 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립니다. 또 날이 시작되면 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집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이 무겁든 가볍든지 간에 거절하는 적이 없습니다. 오직 복종하는 것입니다. 낙타의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가 짊어지지 못할 짐을 지게 하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질 수 있는 짐만 허락하심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종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모습은 분명히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아시시의 성자인 프란시스(St. Francis of Assisi)가 길에서 나환자를 만났습니다. 그를 잡고 기도해주고 싶은 충동이 있었는데 "전염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하여 성령이 마음에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주님, 나환자를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왜 그냥 지나갔느냐?" 고 물으십니다. 솔직하게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프란시스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는 나환자보다 나으냐? 너는 나환자보다 더 더럽혀진 죄인이었다. 그런데 나는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 순간 자신을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걸음을 돌이켜 나환자의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며 기도해 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시스의 사랑의 순례가 시작되었습니다. 알베르나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순간, 프란시스는 있는 힘을 다해 "나의 사랑, 나의 전부이신 예수여!" 라는 고백을 드렸습니다. 프란시스는 평생 자신이 사랑할 주님을 만났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사랑의 넓이는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사랑이고, 길이는 십자가를 지고 죽기까지 내려가신 무한한 긍휼입니다. 깊이는 무덤에 내려간 자와 같은 고통을 담당하는 것이고, 높이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재 기도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404장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다 기록할 수 없다"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을 유한한 인간이 제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범위밖에 있는 인간이 없고 그의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장소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랑의 마음을 우리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어떤 작가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긴 여행이 무엇인지 아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김 추기경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바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입니다. 나 역시 평생 이 짧은 것처럼 보이는 여행을 떠났지만 아직도 도착하기엔 멀었소이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자기 반성과 회개를 통해 조금씩 마음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께 나아가며 예수를 닮아야 합니다." 예수 믿은 지 퍽 오래되었는데,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 왜 이다지 멀고 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머리로 아는 예수는 오래되었는데, 가슴으로 느끼고 사랑하는 예수는 아직도 먼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까? 부디 가슴으로 예수를 느끼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사랑의 마음을 품고 모든 것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고서는 누구도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 행하는 겸손과 복종과 사랑은 위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도금한 것이 벗겨져서 추한 본색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겸손히 행함으로, 복종함으로, 사랑함으로 덕을 세우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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