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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시는 예수님 (눅 19:41-44, 요 11: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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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19:41-44)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3-35)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으나 울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언제 우셨습니까?  첫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두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이 말씀은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영혼을 울려 주는 말씀입니다. 일생 동안 웃고 사셔도 부족할 하나님의 아들이 울고 사시다니, 즐겁게 사시어도 부족할 하나님의 아들이 울고 사시다니 이 얼마나 비통한 일입니까? 주님이 왜 우셨습니까? 그 눈물은 무슨 눈물입니까? 예수님의 우심의 이유와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1. 하나님과 대면하여 흘린 눈물 / 겟세마네의 눈물

  첫째로 예수님 우신 것은 인간의 제값을 지고 가시는 제사장으로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즉 인간의 죄 값을 지시고 하나님과 대면하여 우신 눈물입니다. 이것은 제사장적 눈물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보면 큰소리로  통곡하며 우셨다고 했습니다.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우심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신 울음이었습니다.
  마 26:37-38절에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고민하며 슬퍼하셨다고 한 것은 인성을 입으신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를 표현한 것입니다.
  밤이 맞도록 홀로 눈물 흘리시며 “아바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은 인간 예수의 고뇌의 눈물로 그의 인성을 잘 나타내줍니다. 그리고 이 눈물은 시험받는 인간의 고뇌를 이해하시고 담당하시는 눈물입니다. 히4:15절에 보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실 때 눈물은 자신의 약함을 인해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약함은 인성을 입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대면하는 눈물은 자신의 약함과 허물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영적인 눈물이며 인간 구원을 향한 눈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속에서 하나님의 심장에 흐르고 있는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의 눈물의 기도 소리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운명의 시간이 가까워 올 때에 큰소리로 통곡하시는 소리로 이어집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의 절정에서 부르짖은 절규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통곡하시는 주님의 눈물이 골고다 언덕을 적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땅을 사랑으로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2) 민족의 장래를 향한 눈물 / 예루살렘에서의 눈물

  두 번째로 민족의 장래를 보면서 흘리신 눈물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셨을 때 성을 보시면서 우셨다고 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이 눈물은 복음이 주어졌건만 받지 않는 자기 민족을 향한 안타까운 눈물이었습니다.

  눅 13:34-35절에 보면 거역하고 반역하는 예루살렘 즉 유대 민족에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그로 인하여 받을 형벌 즉 멸망을 내다보며 우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우신 이 눈물은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며 우신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우신 후 37년 후 인 주후 70년에 로마의 티도스 장군에게 예루살렘은 완전 포위되어 멸망당하였습니다. 그 때 유대인은 나라를 잃고 전 세계로 흩어져 방황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들이 왜 멸망을 당했습니까?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한 죄 때문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파송된 종들을 돌로 쳤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까지 온갖 모략과 흉계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수 죽인 죄 값입니다. 그들 자신이 죄 값을 자청하였습니다.
  마27:24절은 보면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라고 했습니다. 그때 백성들이 무어라도 대답합니까?

  마27:25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그들 자신들이 원한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마24:2절에서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라고 예언하신 대로 예루살렘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던 주님의 울음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심장은 예루살렘이며, 예루살렘의 심장은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 그곳을 보시고 주님은 우셨습니다.

  왜 성전을 보며 우셨습니까?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이  집은 기도하는 집이거늘 강도의 소굴이 되었도다."하시면서 채찍을 드사 소와 양과 비둘기를 밖으로  몰아내시고, 성전 안에서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비통해 하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소나 양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멀리서 가져옵니다 너무 먼 길이기 때문에 오는 길이 어려우니까 성전 밖의 어느 곳에 시장을 세우고 거기에서 소나 양을 사서 바치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돈이 탐나서 성전 뜰에서 장사하게 하였고 얼마의 이득을 제사장들에게 공납하도록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완전히 시장터가 되었고, 성전 안에서 상을 놓고 돈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둘러엎고 내쫓으신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어땠습니까?

  헤롯의 정권에 아부하는 사람들뿐이었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를 삼는 불법과 악행을 범해도 말한 번 못하고 그것을 지적하며 정의와 진리와 회개를 외치는 세례 요한을 고소하여 감옥에 가두고 헤롯의 밥상에 앉아 세례 요한의 목을 베고 밥을 얻어먹는 거짓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경제인이 썩고 정치가가 썩는 것은 주님이 참을 수가 있습니다. 기업가가 썩고 부패하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세속주의에 물들고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권에 눈이 멀고 타락하는 것은 주님이 슬퍼하십니다. 교회의 정치가 세상의 정치와 똑 같아지는 것을 보고 주님이 통곡하십니다.
 
  나사로가 무덤 속에서 썩듯이 우리의 심령이 썩은 심령이 될 때에,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부패하고 타락한 그 모습이 우리 속에 있을 때에 주님은 탄식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우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우리 민족의 희망인 교회라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민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의 아픔을 부여잡고 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민족을 향해 우신 것은 민족주의적인 애국 애국의 감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 우신 것이 아니라 민족이 구원을 위해 울었습니다. 민족의 죄를 생각하며 통곡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비판은 잘하지만 뜨거운 마음으로 울지는 않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치며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 민족의 죄인이올시다. 하나님은 이 민족을 사랑하여 주시는데 저는 이 민족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죄인이올시다"
  그렇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장래와 미래를 위해 울 수 있는 눈물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3) 모든 인생들을 위한 눈물  / 나사로의 무덤에서 

  요11:33-35 에보면 나사로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 그의 집에 가셨을 때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 냄새나는 그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울지 않으시던 주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어도 울지 않으셨던 주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왜 우셨을 까요?
  인간적인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셨습니까? 나사로가 누구였습니까? 주님을 영접한 나사로입니다. 주님을 맞이했던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라는 말은 “하나님께 기댄 자”“하나님께 의존한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사로, 그 이름은 이천 년 전 베다니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나사로 때문에 운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무덤 속에 갇힌 나사로, 썩은 나사로, 냄새나는 나사로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이 썩고 냄새나는 죽은 성도들 때문에 우십니다. 오늘 날 한국  교회를 보고 우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 때문에 우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의 뜻만 쫓아 사는 성도들... 바로 우리들 때문에 우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그의 우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죄악 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베푸신 사랑에 감격하여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우리 시대의 비극은 눈물이 없는 것입니다.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입니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인데,  비해 감동과 눈물을 흘리는 일에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웃음만이 아니라 눈물도 필요합니다.
  눅 23:28절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약함 때문에 울고 허물 때문에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함 없는자가 있습니까? 허물 없는 자가 있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남을 위해 우는 눈물도 흘려야 합니다. 나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고통을 받는 사람,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 슬픈 사람을 위해서 우는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 12:15절에서“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라고 언급했습니다.

  눈물을 회복합시다. 예수님이 우셨던 울음을 우리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눈물이 우리의 심장에서 흐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눈물이 말라 버린 제단과 성도의 심령을 보시면서 그리스도의 영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56:8절에서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 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락 고백한 시편 기자의 기도를 합시다. 주여 내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울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의 우심을 본받아 우는 민족이 되게하소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대신 우셨습니다. 넘어지고 어려움 당하고 범죄하여 넘어진 사람들 그들을 비난하기 쉽지만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며 우는 것은 주님이 마음 사람이 아니면 있을 수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위로는 욥의 친구들처럼 그 위로가 정죄로 바뀌고, 그 위로가 비난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울 때 함께 울어주시고, 우리가 아플 때 함께 아파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물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의 눈물, 사랑의 눈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 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함께 울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예수님 우셨던 것처럼 나도 울게 하소서. 하나님과 대면할 때 나의 연약함과 추악한 죄악을 인하여 울게하시고 하나님 거역하는 내 민족 내 동족을 위해 울게 하시고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나의 형제 자매들을 위해 울 수 있는 눈물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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