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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길 (행 15:3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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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제품을 만든 회사는 자기 회사 제품에 이상이 있을 경우 A/S를 통해서 그 제품을 잘 쓸 수 있도록 책임을 져 주는 것을 봅니다. 예전에는 A/S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어서 그냥 대충 대충 물건을 만들어 팔고 나서는 나 몰라라 하던 때도 있었습니다마는 요즘에는 그렇게 했다가는 그 회사는 몇 날 못 가서 망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누군들 그런 회사의 제품을 쓰겠습니까? 아니 설령 쓴다고 해도 당장 소비자 보호센터에 고발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A/S가 필요한 곳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복음 전도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든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을 믿도록 하였다고 할 때 참으로 귀한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온 천하보다도 귀한 것이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교회에 다니도록 이끌었다고 해도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이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뒤를 받쳐주는 일 역시 귀한 일입니다. 사람이 자식을 낳아놓기만 하고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부모냐고 손가락질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전도는 했는데 그 사람이 말씀 안에서 잘 자라도록 계속해서 돌보지 않는다면 이는 아이를 낳아서 다른 집 앞에 던져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한 사람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제 다시 그들을 돌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전도자의 마음과 그에 따르는 결과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전도자의 책임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 생각해 온 것이 있다면 전도는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전도란 단지 사람들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오래 교회를 다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른 말씀의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른 말씀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배울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피했을 경우가 있고 아니면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만 하더라도 그룹으로 제자 훈련을 해 왔고 지금은 전도사님이 개인별로 시간을 내서 제자 훈련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제자 훈련을 이미 받은 사람들도 있고 지금도 제자 훈련을 받도록 요청받고 있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그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좋은 하나님의 군사요 또한 칭찬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배워야 할 책임이 지도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서 믿은 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로서는 뒤에 믿은 사람들이라든가 우리가 이끄는 사람들을 바로 가르쳐서 그들 역시 좋은 지도자요 리더가 되도록 이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던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바 있는 여러 도시로 다시 가서 신자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봅시다.”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이 복음을 전하여 믿음 안에 있게 하였고 또한 좋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을 다시금 찾아보고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자 결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전도자와 가르치는 자의 마음입니다. 복음 전도자와 가르치는 자로서의 마음은 바로 자기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난 사람들이 더욱 더 귀한 일군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바로 서서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전도자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과 바나바야말로 바른 전도자요 가르치는 자의 모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동안 선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할례 파문으로 인해 교회가 시끄러워지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까지 다녀왔습니다.

이제 다시금 교회가 안정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좀 쉬자고 할만도 한데 그들은 또다시 자기들이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아야 되겠다는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전도자의 마음이요 지도자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멀리 나가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든가 자치나 하숙 생활을 하는 자녀가 있다고 한다면 그 부모는 며칠 못가서 자녀가 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할 것입니다. 집을 떠나 있는 자식이 제대로 먹기나 하는 건지, 어디 아프지는 않은 건지,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 하여간 작은 것까지도 신경을 쓰느라고 밤잠까지 설쳐대지를 않습니까? 전도자의 마음이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전도해서 교회를 다니게 된 그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나 기관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 역시 구역 식구나 기관 식구 중 어느 누가 한두 주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안 보이는 건지 궁금해서 찾아가 본다던지 아니면 하다못해 전화라도 돌려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 시대야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들을 다시금 찾아가서 만나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형편을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들을 찾아서 만나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런 전도자와 지도자의 마음을 알아 우리 모두가 바른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 안에서 참된 교제를 나누며 서로를 섬기는 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서로 갈라서는 바울과 바나바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다 보니 누구를 이 여행에 데리고 가야 하느냐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바나바가 마가라 불리는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가가 누굽니까? 처음 전도 여행에 따라 나섰다가 조금 힘들고 지치게 되니까 슬그머니 도망쳐 버린 사람 아니었습니까? 그 때문에 행방불명된 마가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나중에야 그가 예루살렘으로 말도 없이 돌아가 버린 사실을 알고 한 편으로는 안심도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고 하니 바울이 강력하게 안 된다고 막아섭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은 사역 위주의 사람입니다. 그것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는 입장에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습니다. 이는 복음 전도라고 하는 것이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나바는 인물 중심입니다. 어떻게든지 사람을 바로 세워주고 한 사람의 일꾼이 되도록 이끌어주는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역 중심이냐 아니면 사람 중심이냐고 할 때 거기에는 나름대로 어디에 더 가치관을 두느냐에 따라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오히려 당연합니다.

우리가 같은 일을 한다고 해도 이왕 사람을 써서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이미 검증이 돼서 누구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과 한번 실패를 해서 그 성공에 대해 확신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중에 누구와 함께 일을 하겠습니까? 아마도 열이면 열 아니면 아홉 이왕이면 검증이 된 일꾼을 쓰고자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일 잘하는 사람으로 누구라도 다 인정하는 사람과 도무지 일을 엉망으로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저부터라도 일 잘 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고 싶어 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려가자 안 된다 하고 바나바와 바울이 그 때문에 심히 다투게 되었던 것이요 이런 마음으로는 우리 같이 할 수 없다 해서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그래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키프로스를 향해 떠나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했고 또 그들로부터 안디옥에 파송 받아 와서도 그 일을 잘 감당했던 실라를 택하여 안디옥 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각 교회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바나바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이 복음 전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고 이를 기록한 누가가 바울과 함께 가며 수고하였던 전도자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바나바의 하는 일이 전혀 가치 없는 일이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비록 더 이상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바나바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나중 그 마가가 베드로의 수제자가 되어 베드로를 도왔고 바울 역시도 그를 인정하여 자기 생애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면서 디모데에게 마가도 함께 데리고 오라고 하면서 그가 우리 일에 유익한 자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갈래 길을 봅니다. 하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수고하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한 영혼이라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한다면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부모와 같은 전도자와 그들을 일꾼으로 키우는 선생과 같은 지도자입니다. 그중 누가 더 크다 또는 낫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둘은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도자는 그 수고자 금방 겉으로 드러나지만 사람을 키우고 바로 세워나가는 일은 당장은 헛수고를 하는 것처럼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일꾼을 세우기 위해 12명의 제자들을 삼년 반 동안이나 함께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이 일 역시 귀한 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쪽만 보고 누가 낫다 누가 못하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잘 하는 것이고 저 사람도 잘 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여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의 수고 역시 열매를 맺게 될 때가 이를 것입니다.

어쨌든 한 팀으로 수고하던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때문에 서로 심히 다투고 갈라선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바울을 그렇게 키운 사람이 바나바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역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일의 결과에 더 집중을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이 되도록 하려니까 마가는 안 된다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나바는 반면에 사람에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 이름처럼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 바나바의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낙심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바로 세워나가는 그 일이 바나바로서는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가를 데려가야 된다고 할 수밖에요.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누가 옳으냐를 자꾸 따집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보는 각도에 따라서 이 사람도 옳고 저 사람도 옳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어느 한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도 인정하고 저것도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이처럼 꼴사납게 서로 다투지 않고도 좋은 길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날도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서로 다투는 일이 교회 안에 종종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 다투기 보다는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 나간다면 참으로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바울과 바나바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요 성령의 사람들이었는데도 이렇게 다투며 갈라설 수밖에 없었으니 우리가 다투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하나님 앞에 함께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느냐 아니냐 하는 이 문제를 놓고 서로 심히 다투기보다는 우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기도해보자고 했더라면 그 아름다운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져왔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서로 다투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서로 다투는 교회나 성도들이 이를 핑계 삼습니다. 그들로 다투지 않았느냐고요. 아닙니다. 그들조차도 그렇게 다투었다고 해도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다투었어도 조금도 하나님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주님의 품에서 멀어지게 만듭니까? 그래서 어떤 의견의 대립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그런 길을 우리 모두가 함께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투고 갈라섰던 이 두 갈래 길 그러나 이 두 길은 모두가 가치 있는 길이었습니다. 비록 한 사람은 기록에 길이 남겨져 그 행적이 모두의 눈앞에 드러나 칭송을 받고 있고 한 사람은 조용히 뒤안길에서 수고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두 길 모두가 옳은 길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더 이상 따지지 마십시다. 오히려 이 길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저 길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항상 좋은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요 또한 자기가 수고하는 그 일에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승리자가 되어 영광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나를 비난합니까? 조금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누구만 칭찬 받는 것 같이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늘 속에서 수고하는 이들의 수고 역시도 귀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의 앞에 나와서 찬양하는 찬양팀만 소중하게 여겨집니까?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모두의 눈에는 잘 뛰지 않지만 교회학교 교사들의 수고 역시 소중하고 귀합니다. 아니 땀 흘려 수고하며 교회를 청소하는 이들의 손길 역시도 귀합니다. 남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 손길 역시도 귀합니다. 특히 전도자의 일이 귀한 것 사실이여 그들을 위해서 중보하며 기도하는 이들의 수고 역시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두는 다 나름대로 중요한 일들을 하나 이상씩 맡아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눈에 잘 띄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눈에 잘 띄는 일은 사람들의 칭찬이 따릅니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이들의 수고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따를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다투고 갈라섰던 두 갈래 길, 이 모두는 다 소중한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편 가름을 하려고 하지를 말고 서로가 그들의 수고 역시 소중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해 주고 격려해주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전도자로서,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자로서 심방하며 위로하는 자는 권면하고 위로하는 그 일로서, 어떤 짐을 맡아 지는 사람은 그 짐을 지는 그 일로서 각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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