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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생을 얻었는가? (요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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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얻었는가?(요17:1-3)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기독교 사학법이 사학법 개정 때문에 복음 전도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일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이 시작됐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을 가리키는 날입니다. 주일을 빼고 40일이니까 45-46일 정도가 사순절이 됩니다. 사순절의 정신은 ‘죽고 다시 살자’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사순절에는 하루 한끼 금식, 화려한 옷은 삼가하고 오락이나 가무등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과 신앙을 돌아보고 재정립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의 40일의 숫자 역시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40일 금식, 부활 후 승천까지 40일동안 계셨고, 모세의 시내산 금식 40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년으로 죽고 사는 숫자가 40일입니다. 오늘 사순절에 처음 맞은 주일에 사순절은 바로 지내기 위한 신앙으로 영생의 복, 다시말씀드리면 현재적 영생의 복을 나누고자 합니다.

영생의 의미가 많이 왜곡되고 있습니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중에 재미있는 학생이 있어서 가끔 웃습니다. 국어 받아 쓰기 시간인데 선생님께서 부르는 대로 받아쓰는 것입니다. ‘미닫이’를 소리나는 대로 쓰는데 미닫이 문이 있잖아요. 답은 ‘미다지’ 라고 쓰면 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재미있게도 ‘드르륵'이라고 썼습니다. 미닫이가 소리나는대로 말입니다. 또 한번은 사회도덕, 바른 생활인가요? 교통이 혼잡한 사진을 보며주고 해결 방안을 쓰라고 했습니다. 답은 ’교통질서 지키자!‘인데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자동차를 때려 부수자‘라고 섰답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교회학교에도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했습니다.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지요?” 답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갑니다.”인데 한 학생이 “죽으면 됩니다.” 라고 했답니다. 죽어야 천국간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영생 받은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맞습니다.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자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5: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고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영생이 있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생의 확신입니다. 영생을 받았다면 ‘죽으면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간다, 지옥가지 않는다, 영생한다,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선고 앞에서, 예수님의 죽음 앞에, 예수님과 떨어져 예수님은 하늘에 가시고 자신들은 이 땅에 있다는 사실 앞에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이 땅에서 구원받은 성도로 영생을 믿는 성도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냐? 영생을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까? 아무렇게나 살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사순절을 지혜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성경의 말씀인데 요한복음 17장 3절입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한목소리로 크게 읽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생의 복은 2가지입니다.
첫째는 미래, 장래에 주실 부활의 보증의 복입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지금이 곧 그때라. 그러므로 죽는 자 가운데 살아나리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미래, 장래에 주실 부활의 보증의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어서 영생, 천국 가게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첫 번째 복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복은 천국에 가서 받게 되는데 여러분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천국가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천국가서 다 아는척 하자구요.

둘째는 현재적 복입니다.
요한복음17:3절의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영생입니다. 이것이 현재적인 복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7장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아멘 그런데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백문이 불여일견’ 이라는 말은 ‘백번 묻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보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체험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봐야 철이 든다고 합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마음을 어떻게 아느냐? 같이 산다고 부모사랑을 받았다고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결혼해서 살아보고 자식도 낳아 길러 보아야 그때 부모심정을 조금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 전쯤에 동태찌개를 끓였습니다. 두 마리를 샀으니 머리, 몸통, 꼬리 3토막에 6토막입니다. 아내가 저에게 몸통, 머리 하나를 줬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미안해서 그런지 몸통을 내려놓고 머리만 2개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왜? 머리만 드시냐고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이 “어두일미라고 머리가 맛있다고..” 그런데 맛이 별로 없습니다. 먹을 것도 별로 없고... 그런데 그 다음에 보니까 동태찌개가 또 나왔더라구요. 몸통하고 꼬리 쪽이 나왔는데 제가 밥을 먹고 나가면 제 아들이 먹는다고 해서 제가 안먹고 다 남겨 놨습니다. 나중에 한달쯤 지나서 대화를 하는데 하도 안먹어서 몸통을 버렸다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얘기는 안했는데 제 마음에 ‘내가 먹을걸’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더라구요. 가끔 그렇습니다. 부모가 되니까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 먹겠더라구요. 이때 부모마음을 알겠더라구요. 그런 마음이 자식들이 알겠습니까? 그 애들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봐야 아는 것입니다. 하물며 신앙생활은 어떻겠습니까? 신앙생활도 체험입니다. 머릿속으로 안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들었다고 해서 아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하는 것만이 신앙입니다.

제가 제일 안타까운 것 가운데 하나는 머릿속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이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하면서 거기에 사도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율법안에서라고 하면서 나온 것은 육적인 일 나오고, 영적인 일이 나옵니다. 소개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가서는 “너희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합니다. 어리석은 신앙인들은 이것이 육체의 일인지 영적인 일인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마음은 이렇게 구분을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의 네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를 가지고 잰다고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겪어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의 길고 짧은 것은 겪어 봐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길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짧은 것입니다. 나에게 주는 은혜는 다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일반화 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17장은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중보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아는 영생, 현재적 축복이 무엇인가를 기도속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저는 요한복음 전체를 본문으로 두고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 읽을 수가 없어서 3절 말씀을 두고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이 영생의 현재적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되라’는 것은 11절-12절에 계속 말씀을 하고 있지만 21절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그들도 다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하나가될 수 있겠습니까?

부부는 3주 연구하고 3달 사랑하고 3년 싸우고 30년을 참고 견딘다고 합니다.
부부가 오래 같이 살다보면 닮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부부가 닮는가? 영국 리버플 대학 연구팀의 발표에 의하면 얼굴의 이목구비가 같아진다가 아닙니다. 눈의 크기가 한사람은 큰데, 한사람은 작다면 작았던 눈이 커지고 컸던 눈이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성형수술은 아니라 같은 일로 웃고 울고 하다보니까 주름살이 같이 생김으로 주름살의 생김과 주름살의 깊이가 같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상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다보면 체질도 같아진다고 합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마시다보니 몸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도 같아지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중보기도 속에는 14-15절에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하셨습니다. 세상이나 악은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외의 것을 나누려고 하면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고 17절에 하셨습니다. 그 위에 보게 되면 ‘악에게 빠지지 말게 하고’ 더 위에 가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라고 그러는데 17절에는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려고 하면 상대를 나에게 맞추기 보다는 내가 상대에게 맞춰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맞추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그래서 그 예수를 믿음으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수준을 맞추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죄를 믿는 것도 아니고 네가 죄를 깨끗이 하고 오라고 요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 입장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주시고 살려주시고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제는 하나님의 수준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시간 머릿속으로 별모양을 그려보세요. 오각형을 그리셨지요, 그런데 과학적으로 보면 별은 동그랗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을 그리라고 하면 오각형을 그리던지 육각형을 그려서 별이라고 우겨댑니다. 하늘은 무슨 색이지요? 하늘색도 모르는 사람들하고 오늘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십시다. 파란색입니다. 우리집에 개가 있습니다. 개는 색맹입니다. 흰색과 검은 색만 알지 다른 색은 모릅니다. 우리집에 있는 개한테 하늘이 무슨 색인지 물어봤더니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라 회색이라고 그러더라구요. 하늘이 파란색이 맞습니까? 회색이 맞습니까? 그럼 묻습니다. 우리가 어려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데 살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살색은 누런색입니다. 살색이라는 이름이 없어졌습니다. 살색이 누런 것만이 살색입니까? 백인은 하얗고, 흑인은 검습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경험한대로 얘기하는 것은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하나되기 위해서 내 생각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말씀속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에 순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을 죽일까 염려를 했지만 요셉은 말하기를 “형들은 나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형들보다 앞서서 우리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의 생각으로 입장을 말합니다. 요셉의 마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애쓰노라면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안에 우리를 두노라면 우리에겐 요셉과 같은 기쁨, 하나님과 같은 기쁨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양보할 기회를 찾습니다. 제가 한번은 지하철을 탔는데 타자마자 문옆에 앉아있던 청년이 벌떡 일어나더니 “여기앉으세요” 아휴 당황해서 안앉겠다고 하니까 앉으라고 해서 제가 앉았는데 별 생각이 들더라구요. ‘벌써 그렇게 됐나... 머리를 좀 가리고 다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앉으니까 좋더라구요. 양보받으니까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누가 내 앞에 빨리 왔으면 젊은 사람들보다 나이든 사람이 오면 양보했더니 그 사람이 얼마나 기뻐하든지... 그런데 그 사람의 기쁨보다는 내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나를 버리고 내 좋은 것을 버리고 희생을 했더니 남의 기쁨도 크지만 내 기쁨이 크더라구요. 중국집에 가면 가끔 싸우는 것 가운데 하나를 보게 되면 늦게 온 사람을 나보다 먼저 주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퉈서 그것을 가려내면 짜장면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래. 바쁜 모양이구나!’ 양보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남은 접시라도 하면 잘 정리해서 잘 가져가게 해주면 그가 기뻐할 뿐만 아니라 내가 기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런지 모르지만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 하나님 여태까지 살게 해 주심을 감사하고 천군천사를 만나고 주님의 뜻을 알고 그리고 때가 돼서 갈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순절은 현재적인 영생의 기쁨은 내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서서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양보하는 기쁨속에 예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이해하는 기쁨속에 예수님의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사순절을 영생 현재적인 영생을 통해 하나되기 위한 그 헌신속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아는 영생, 현재적인 복의 영생의 기쁨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1절 마지막을 보시게 되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도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 여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제가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하나님+나(사람)은 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과 나가 하나가 됐으면 더해지는 것이잖아요. ‘하나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설명해 드릴께요. ‘설탕+물’은 무엇입니까? ‘설탕물’입니다. ‘하나님+사람’은 ‘하나님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우리가 하나가 되면 하나님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묻습니다. 설탕물은 설탕 맛이 나야합니까? 물맛이 나야 합니까? 설탕물이 설탕 맛이 나야지 물맛이 나면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설탕물에서 설탕이 진하면 진할수록 진액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하나님의 맛이 나야 합니다. 사람 맛이 나면 기쁨도 아니고 진액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맛이 진하면 진할 수록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액의 하나님의 사람이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간 신문에 전인범 준장이라고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에 이기백 합창의 장의 수행부관으로 따라갔던 군인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분이 청소년들 앞에서 간증한 내용인데요. 아웅산 폭탄테라 기억하시잖아요. 그런데 이 폭탄테러가 일어나기 5분전에 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밧데리가 안되서 사진을 못 찍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0미터를 순식간에 달려가서 차 문을 여는 순간 폭탄테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쫓아 와서 보니까 이미 십여 명이 죽었고 이기백 합창의장이 부상을 당했는데 아직 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투성이가 된 의장을 병원으로 옮겨놨는데 그때의 이분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모태신앙인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지식적인 수준에서 그렇게 믿었는데 이 순간에 살아났다고 하는 이 자체가 자기에게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생기더랍니다. 시간 시간 사는 것이 두렵더랍니다. 내가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사는 것이라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지식적으로 알았는데 이 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나에게 제2의 생명을 주셨을까를 생각하니 내 사는 삶 자체가 두려움이 생기더랍니다.

우리도 그러잖아요. 가끔 자동차를 타고 가다보면 아차! 하는 순간에 ‘어휴.. 사고날뻔했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동시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잖아요. 저는 가끔 부엌에서 칼질하는 아내의 칼을 보면서 섬짓합니다. 그게 어떻게 하다 보면 툭하고 떨어질 때가 있는데 ‘아이쿠 깜짝이야’ 그러면서 놀래면서 뛰어나오는 것을 보면 ‘그래, 하나님이 칼도 붙잡아 주시기를 바랍니다.’합니다. 곳곳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 전준장이 그때부터 생긴 습관이 있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혼자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간증을 하면서 우리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니까 내 마음이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를 자랑해 보세요. 내가 이만큼 됐다는 것을 자랑해 보세요. 당장은 기쁜 것 같지만 그 얘기를 많이 하면 듣는 사람은 짜증이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러면 말하는 사람도 기쁘고 듣는 사람도 소망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우리 주님의 삶도 돌아보면 언제든지 기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간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드러내면 영생을 사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지는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데 기쁨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앞세우는 기도되기를 원합니다. 사순절에 간증해보세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앞으로 하나님이 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꿈꾸며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쁨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높은 산꼭대기에 사는 분들인데 양을 팔아서 사는데 그 양이 얼마짜리인지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은 몸무게로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으로 가치를 판단한다고 합니다. 양을 팔려는 사람과 살려고 하는 사람이 그 양을 비탈에 놓고는 뒤에서 본답니다. 보고 있으면 그 양이 둘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풀을 뜯으면서 위로 올라가는 양이 있는가하면 그 다음에 풀을 뜯으면서 밑으로 내려가는 양이 있다고 합니다. 위를 향해서 올라가는 양은 말랐어도 값이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밑으로 내려가는 양은 토실해도 값이 안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진취적이고 모험적이고 하지 못한 양은 죽게 돼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높은 곳에 놓아도 풀을 뜯으러 밑으로 내려가는데 여러분이 알다시피 풀이라는 것은 봄에는 들에서 자라다가 이것이 들에 있는 것은 마르고 산으로 가면 풀이 있거든요. 그런데 밑으로 내려가는 가면 갈수록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힘이 들어도 먹을 것이 풍성한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으면서 그렇구나! 신앙인의 가치는 내가 가진 것, 지식이든지, 돈이든지. 직분이든지 신앙의 경력으로가 아니라 내 행동, 정말 위를 향해가고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나아가는 그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이요, 가치있는 모습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달라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가진 것을 가지고 지금 있는 몸무게를 가지고 가치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행동의 무게를 다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에 이 40일을 어떻게 지내시겠습니까? 죽어야 사는 것이 그 기쁨이 바로 사순절의 기쁨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이 목적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게 될 때, 우리는 참된 기쁨이요, 영생의 은혜요, 놀라운 하나님의 현재적인 복이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행동의 무게가 여러분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복된 사순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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