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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적이 있기까지 (요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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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기적이 있기 까지 
◈본 문: 요한복음 6:1-15

사람들은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 때“기적”이라 말합니다. C. S. 루이스는 기적을 정의하기“기적은 초자연적인 능력이 자연 질서에 개입하는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성경은 기적으로 가득 찬 책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기적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시작으로 출애굽, 홍해의 갈라짐, 여호수아 태양의 멈춤, 엘리야의 승천, 그리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재림에 이르기까지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크리스천은 기적을 믿고, 기적을 보고, 기적을 경험하고, 기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라는 말 자체가 그렇습니다. 신앙이란“믿는다.”는 말입니다. 뭘  믿습니까? 믿지 못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는 것이요,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성경의 기적뿐 아니라, 오늘 그 기적이 일어남을 믿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가장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는 먼 거리를 여행한 후 몇 달 후 다시 제 집으로 돌아오는 동물과 새의 능력입니다. 이 동물들은 전에 가보지 못한 수천 마일 떨어진 목적지를 나침반이나 지도의 도움 없이 찾아갑니다. 특히 새는 이러한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예를 들면, 북극 지방의 제비갈매기는 생후 6주밖에 안된 어린 새도 따뜻한 곳을 찾아서 17,700km를 여행합니다. 여름이 돌아오면 이 새는 다시 북극의 자기 둥지를 찾아 돌아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과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훈련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태양을 따라서 갔을까요? 북극성이 그들을 인도했을까요?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새를 이주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는 영국 웨일즈 해안에서 섬새 한 마리를 잡아 다리에 띠를 맨 후 미국 매사추세츠의 보스톤으로 운반했습니다. 거기서 그새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새는 정확히 12일 반 만에 4,900km떨어진 자기의 보금자리에 돌아왔습니다. 섬새는 아무런 표시도 없는 바다를 홀로 건너 자기의 보금자리로 안전하게 도착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에 대하여 많은 학설들이 있었지만 아직 명백한 학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새의 뇌 안에는 본능이라고 부르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와 다른 동물들의 내부에 “시계와 나침반”을 장치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의 생물을 창조하셨을 때 그에게 어떤 능력과 본능을 주셨습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기적을 보기 위해 힘들게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고, 갸날픈 풀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작은 도토리가 커다란 참나무로 자라는 것, 이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기적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도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가득하게 거둔 기적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삶의 귀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一. 두 제자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인 빌립에게“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5절~6절)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빌립의 대답은“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절)고 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돈의 가치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값이었습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라면 노동자가 먹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6개월 이상을 모아야하는 분량의 돈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이러한 돈도 물건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8절~9절)라고 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의 친구로서 한 고향인 벳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빌립의 의견과 안드레의 의견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완전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 반면, 안드레는 현재의 실정을 주님께 그대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내가 미리 판단해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 같으면 기도하고 애쓰지만, 처음부터 가능성이 없을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하고 기도도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루어지고 아니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우리가 내릴 결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있는 그대로를 내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고 아뢰는 기도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빌립은 계산은 빨랐지만 불신앙적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의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해 물으셨는데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빌립의 생각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틀렸습니다. 200데나리온의 돈이 있어도 5000명이 먹기에는 부족할 것이라는 것이 빌립의 계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큰돈이 없었지만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빌립의 계산이 맞았으나 결과는 틀렸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의 생각 속에 믿음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많이 불렀던 찬양 가운데 이러한 가사가 있습니다.“홍해 어떻게 건넜나? 홍해 어떻게 건넜나? 배타고 아니, 헤엄쳐 아니, 뛰어서 아니,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고 급한 바람 불어 바다는 갈라져 육지로 건넜지”홍해를 건널 수 있는 사람의 방법은 배를 타거나, 헤엄을 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이며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갈라놓으시고 육지로 건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신의 생각을 너무 신뢰하지 말기 바랍니다. 틀림없을 것 같았던 내 생각과 계획이 나를 실패의 늪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철학자인 데카르트는“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저녁때가 되면 매일 같은 길을 산책을 하는데, 어느 날 산책 도중 뱀 한 마리가 길가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지팡이로 내리칠까 하고 망설이다가 그냥 다른 길로 돌아서 갔습니다. 다음날 보니 또 같은 장소에서 그 뱀을 보았습니다. 사흘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지팡이로 힘껏 뱀을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 빙글빙글 말려서 뱀과 같은 모양으로 놓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한 말이 “내 눈이 나를 속였다.”는 것입니다. 흔히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은 확실하고 분명하다고 믿는 데 그 눈도 나를 속였습니다.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흥미 있는 데카르트의 이론이지만, 의심하는 것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인간으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때가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기회가 됩니다. 빌립이 계산을 한 후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그때 안드레는 믿음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빌립이 불가능을 말했을 때 안드레는 가능성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믿음의 터전 위에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하셨습니다.

二. 예수님의 감사입니다.

본문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축사란 감사라는 뜻입니다. 오천 명의 무리 앞에 어린아이 한 끼분의 양식인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누가 보아도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오천 명이 넘는 무리 앞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앞에 두고 어떻게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감사함은 어떤 의미의 감사일까요?

1. 조건을 초월한 감사였습니다.

오천 명의 무리 앞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서 개, 이 상황은 감사할 조건이 아닙니다. 도리어 불평을 해야 할 처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여 감사하셨습니다. 이곳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니엘 6:10에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되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다니엘의 감사에 하나님은 기적을 나타내셔서 사자의 입으로부터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조건과 환경을 초월한 감사가 있는 곳에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2. 작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천 명 앞에서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작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이러한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감사에 예민해야 하겠습니다.

3.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입니다.

오천 명의 무리 앞에서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 이 기막힌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사하셨습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환경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있고 없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많고 적음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형편에서 감사하셨습니다.

4. 미래 지향적인 감사였습니다.

오천 명의 무리 앞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두고 감사하신 것은 앞을 내어다 보신 감사였습니다. 이제 이것을 통해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감사하는 것입니다. 현재 손에 있는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앞으로 받을 것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미래의 감사는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지금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계시지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는 것을 내어다 보시며 감사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현장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기도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고 응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사기도를 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한 부인이 자기도 남편을 위해서 감사기도를 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남편은 매일같이 술에 만취가 되어 늦게 귀가하는 술고래였습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같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겨우 집에까지 와서 문 앞에 쓰러진 남편을 힘들게 끌어다가 겨우 눕혔더니 세상모르게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니 자기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화도 나서 기구한 팔자타령을 하며“하나님, 나는 왜 이런 남자에게 시집을 와서 고생을 합니까?”하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울면서 신세타령 겸, 기도 겸 중얼거리는 중에 갑자기 감사 기도하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감사할 조건을 생각하다가, 감사할 것이 없어서 그저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성령님의 감동으로 감사할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옆에서 코를 골고 있는 남편을 생각하니 그래도 과부보다는 낫고, 앞으로 언젠가는 좋은 남편이 될 가능성이 있어서 감사하고, 저토록 취해도 집을 찾아올 수 있음에 감사하고, 토요일을 더욱 술을 많이 먹어 주일날은 집 잘 봐줘서 감시하고, 교회 나오는 데에 불편하지 않아서 좋고, 계속해서 감사의 조건을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감사였으므로 부인은 웃음이 나왔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남편이 갈증이 나서 잠을 깨고 보니 부인이 웃으며 기도를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남편은 무엇이 그리 좋아서 웃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렇다고 감사를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나도 예수 믿어 줄께”하며 선뜻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을 했다는 것입니다. 후에 그 부인이 간증을 하기를 10년 동안 그렇게 기도를 해도 이루어지지 않던 소원이 단 한 번의 감사기도로 이루어졌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하셨습니다.

三.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본문 12~13절에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했습니다. 한번 기도하고 나면 이처럼 풍성했지만 예수님은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부스러기를 모았더니 열 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절약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버릴 것을 모았더니 열 두 광주나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절약하여 유용한 곳에 활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의 한 학생이 스위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가 가방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학생이 신다가 버린 양말입니다.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부유한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기로는 스위스만큼은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양말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떨어진 것을 깨끗하게 씻어 기웠습니다. 한국에 가져가셔서 한 번 더 신고 버리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절약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또한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들이 본받아야할 정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절약하되 명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절약정신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인색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약하라고 하셨지 인색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부스러기를 버리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6:38에 말씀하시기를“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3:2에도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고 하신 절약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어 나누기 위한 절약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접하기 위한 절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 위한 절약입니다.

강철 왕 카네기는 말하기를“부자로 죽는 것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시카고 무디 바이블 처치의 담임으로 섬긴 어윈 루처 목사님이 지은 “영원한 상급”이라는 책에 건전한 재정 관리의 다섯 가지 원칙에 대해 이렇게 섰습니다.

첫째, 돈은 위탁물이지 소유물이 아니다.

돈은 우리가 간직해야할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으로 그분이 다시 찾아가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돈은‘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봉급에는 집으로 가져가기 전부터 이미 각종 세금이 부과됩니다. 집에서도 납부 고지서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채권자들은 우리 돈의 일부가 자기들의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돈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우선 소유한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장이나 주식, 채권, 상호부금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시도록 해야 합니다. 퇴직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원리와 장기적인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둘째, 보다 영구적인 것에 투자하라.

우리는 늘 돈을 다른 어떤 형태로 바꿉니다. 이런 과정을‘변환’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필요한 약을 사기 위해 돈과 약을 바꿉니다. 변환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맞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금을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도구로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거리의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해야겠다고 마음에 부담을 느낀 열정적인 유럽의 한 그리스도인 공주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진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고아들을 돕기 위해 그가 준 보석들을 팔고 싶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녀는 망설이는 남편의 동의를 받아 고아원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 공주는 기쁨의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보석을 찾았어요. 거리에서 구출된 아이들의 맑고 행복한 눈을 좀 보세요. 저는 보석을 찾은 거예요.”얼마나 현명한 여인입니까! 사람들은 죽을 때 돈을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늘에서 가치 있는 형태로 바꿀 수 있다면 그곳에서 우리 돈을 다시 찾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 돈은 보다 큰 특권을 위한 시험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누가복음 16: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돈을‘매우 작은 것’이라고 또한 돈을‘불의한 재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지극히 작은 것’에 신실하지 못한데 주님께서 어떻게 장차 오는 세상에서 보다 큰 것을 우리에게 맡기시겠습니까?‘불의의 재물’을 책임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보다 큰 부를 맡는 것이 합당하겠습니까?‘다른 사람의 것’을 오용하는데 어떻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기 원하는 기업을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돈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통치와 영광을 위한 모든 책임을 감당하며 그분과 함께 다스리기에 합당한 사람들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도구입니다.

넷째, 돈은 우리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전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16:13).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유혹적인 돈에 대한 사랑이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의 위력을 삶에서 뿌리 뽑아 주시도록 기도하며 돈을 종으로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유혹적이고 속이는 힘을 가진 돈은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우리를 찾아들 것입니다.“나는 어떤 것의 가치를 매길 때 그것이 지니는 영원한 가치를 기준으로 측정한다.”라고 고백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섯째, 천국을 위해 돈을 변형시키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잃고 만다.

윌라드 캔텔론(Willard Cantelon)은“돈이 사라지는 날(The Day the Dollar Dies)”이라는 책에서 아돌프 히틀러로 인해 파괴된 도시 프랭크포트의 근교에 성경학교를 재건하는 일을 후원하기 원했던 한 독일 여인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여인이 성경학교를 찾아온 1948년 6월의 어느 날은 독일에 화폐개혁이 발표된 날이었습니다. 정부 정책에 따라 마르크화가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어버린 날이었습니다. 그 사랑스런 여인이 돈을 좀더 일찍 가져왔더라면 학생들의 학비를 보조하고 학교시설을 보수하는 일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가 늦었습니다. 그녀가“아주머니, 정말 죄송하지만 이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절망스러운 말을 들어야 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모든 화폐나 귀금속이 가치를 잃고 영원히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융 시장 월 스트리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주식과 채권, 토지, 금, 건물과 아파트, 자동차들 모두 다 작별을 고할 것입니다. 현명한 투자가는 장기간 최고의 배당을 받을 수 있는 곳에 돈을 투자합니다.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바꾸지 않는 한 천국에 돈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첫째, 빌립처럼 인간적인 계산으로 인한 포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주님앞에 내어놓는 안드레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두고 오천 명의 무리 앞에서 감사하시는 예수님의 감사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떡 부스러기를 버리지 말라하신 예수님의 절약정신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절약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이웃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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