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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아는 지식 (빌 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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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이는 한마디로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전도학에서는 이것을 간결하게 정의하기를“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요. 내 주인이요. 내 중심이요. 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삶의 유일한 목적인 사람, 그리스도를 내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리스도가 목적이 아닌 삶의 수단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고, 병 낫고, 복 받고,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가 잘되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는 사람, 이런 생각이 마음속에 있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다니다가도 뜻대로 안되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니까 수단은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성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여 지고 있는가? 내 취미가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때에 내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여기에 나의 나됨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입맛과도 같습니다. 된장찌개를 좋아하면 한국 사람이요. 카레라이스를 좋아하면 인도 사람이요.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이태리 사람입니다. 이처럼 한국인에게는 한국 사람의 입맛이 있고, 외국인에게는 외국인의 입맛이 따로 있듯,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의 고유한 삶의 맛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삶의 초점을 맞추고 항상 마음과 모든 가치관을 예수님께로 향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바울사도로 통해 하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문 8절에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은 후 그는 말하기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했겠습니까?

1.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지배를 받는 육신의 생명이 있고, 또 하나의 생명은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26에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고 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48~51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해 얻어지는 생명은 짧은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본문 9절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의인이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로마서 3:10-18)하셨습니다.

이러한 죄인들의 죄를 없이하여 의인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시키시고자 이 땅에 오신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인을 의인이라 하는 것은 마치 검은 땅에 흰 눈이 덮인 것과 같습니다. 눈 덮인 대지를 아무도 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의가 이와 같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흰옷을 입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내 명함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의 즉 옳다 인정받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다.”라는 표시를 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아 생명의 길로 들어가는 방법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천국 가는 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보다 더 것은 없습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에서 일하던 세일즈맨으로 일하고 있던 한 사람이 NBC 라디오 공개 방송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장내는 조용해졌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그에게 끝없는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이 청중들을 매료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한 스타가 됐습니다. 방송 계약 제의가 들어오고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머리 숙여 기도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에 그의 어머니도 그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들의 출세 길이 눈앞에 보였지만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앉아있는 책상위에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조용히 갖다 놓았습니다. 아들이 보니까 그것은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라는 부인이 쓴 성시였습니다. 그 성시의 가사를 읽다가 이 청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멜로디가 솟아오릅니다. 그는 펜을 꺼내서 작곡을 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이 사람이 빌리그래함 목사와 평생을 동역한 “조오지 베버리 쉬”라는 복음성가 가수입니다. 1983년,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전 세계의 전도자들이 모였을 때 이 사람이 특별찬양을 했습니다. 운집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립하여 끝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박수를 다 받은 후 그가 남긴 한마디는 장내를 다시 숙연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신 박수갈채와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깨달아 아는 것은 참 자유를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의 공통된 욕망은 자유입니다. 자유함이 없는 생명은 살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흉악범에게 가해지는 가장 무서운 중형은 생명을 빼앗는 사형이며, 그 다음으로 무서운 중형은 자유를 영원히 박탈하는 무기 징역입니다. 한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중형자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살았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치하에서 우리민족이 왜 그토록 처절한 투쟁을 했습니까? 자유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잃은 자유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무수한 고난을 받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자유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하여 말하기를“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처럼 소중한 이 자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하셨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또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시며 이 진리가 자유케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유를 주실까요?

1)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십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믿는 자들의 죄를 깨끗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하셨습니다.

2)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함을 주십니다.

가지가지의 염려와 근심 속에 시달리는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태복음 11:28-29)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배울 때 참된 안식 즉 염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이 어디에 계시다가 세상에 오셨으며, 어떻게 죽으시고, 어떻게 다시 살아나셨는지,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그분의 능력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배워서 깨닫게 될 때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유럽의 한 상인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어느 마을에 머물렀을 때 선반위에서 광채를 발하고 있는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인은 주인에게 물었습니다.“저 돌멩이는 누구의 것입니까?”“저것은 내 아들이 산에서 주어온 것입니다.”상인은 주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내가 좋은 장난감을 하나 줄태니 저 돌멩이를 내게 주지 않겠소?”주인은 선반에 놓인 광채나는 돌멩이를 주면서“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감사하지요. 제 아들도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주인은 상인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주인은 그것이 값비싼 다이아몬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이 상인은 그 보석을 가지고 와서 보석상에게 12만 5천달러, 한화로 1억 5천만원에 팔았습니다. 지금은 수백만 달러 즉 수십억원을 호가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가 이와 같습니다.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비방과 멸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워 깨닫게 될 때 그 가치는 엄청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밭에 감추인 보화”(마태복음 13:44) 비유에서 어떤 사람이 밭에 파묻힌 보화를 발견한 후 돌아가서 전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습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너무도 값지고 귀한 것이므로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것 다 팔아도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지불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이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재산을 다 팔기를 주저했다면 그는 보화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정 소중한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의 삶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성공의 지혜가 공급됩니다. 삶에 영광이 있습니다. 자녀들의 앞날에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습니까? 이 귀한 진리를 모르고 도리어 핍박하는 무리들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질병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의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워 그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은 풍성한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편 34:9-10)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아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입니까?

二. 가장 고상한 지식을 깨달은 바울사도의 각오가 있습니다.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해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빌립보서 3:7-8) 하고 말했습니다.

옛날 호롱불에 공부하다가 촛불을 켜면 얼마나 밝습니까? 그러다가 전깃불을 켜면 또 얼마나 밝습니까?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세상을 밝히거나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을 밝히며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은 하늘의 태양뿐입니다.

세상의 각양 지식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이는 호롱불이나 촛불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삶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비하면 역시 호롱불이나 촛불에 불과합니다.

세상의 각종 종교도 작은 빛은 됩니다. 선함과 도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빛은 없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태양만이 세상을 밝히고 동식물을 살리는 생명의 빛이 되듯, 예수 그리스도만이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하셨습니다.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바울사도는 그리스도를 깨닫고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깨달은 바울사도는 지난날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기며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참된 자유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해결하는 열쇠가 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선교에 일생을 바친 슈바이처와 프랑스의 작가 카뮈는 같은 해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평화상을, 카뮈는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다 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카뮈는 그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멋진 별장과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습니다. 카뮈는 어느 날 그 고급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바이처는 그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랑바레네 병원을 지었고, 그 병원에서 아프리카의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카뮈라는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이 되고, 내게 평안과 즐거움을 주며, 나를 영화롭게 할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반면 슈바이처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삶의 차이를 가져왔습니까?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깨달음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달은 심령의 눈에는 세상의 것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찮게 여겨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유일한 관심사가 됩니다. 이렇게 살아간 성도의 삶은 아름답습니다. 귀감의 대상이 됩니다.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섬겨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힘을 다해 배워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며 순종해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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