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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고후 5:16-21, 눅 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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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세기 최고의 영성가로 일컬음 받는 헨리 나우웬이 중남미를 방문하고 거기서 본 폭력과 전쟁에 대하여 큰 충격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6주간에 걸쳐 기독교 공동체들을 순례하면서 폭력과 전쟁을 막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자고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육체적으로도 극도의 피로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탈진상태에 빠져서 염려와 외로움, 불안에 사로잡혔으며 걷기조차도 힘들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소진상태에서 그가 만난 것이 오늘 복음서 본문을 내용으로 한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 복사본이었습니다. 그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엄청난 영감을 받았으며 그 후 1986년에 러시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에르미타즈궁에서 그 유명한 그림 원본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자기를 강력하게 사로잡았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니 그는 그 그림의 포로가 되고 말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그림에서 자신의 영적 순례에 있어서 삼단계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그가 작은 아들이 되는 체험이었습니다. 우선 작은 아들이 고향을 떠나서 모든 것을 잃고 극도로 곤궁하고 피곤하게 된 상황에서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두 손을 아들의 등에 얹고 영접하는데 아들은 아버지 품에 머리를 기대고 마침내 찾은 안식을 누리는 모습이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거기서 자신이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서 안식과 평화, 그리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아버지 품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것을 최후의 귀향, 즉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은 아버지 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안정감과 영원한 안식입니다. 요14:23에 예수님은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거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바로 나의 거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 참 안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세상을 향하여 우리가 증거할 복음입니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이 바로 그 맏아들이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이전까지 헨리 나우웬은 자신이 맏아들이라고 생각해 본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그림을 통하여 자신이 맏아들이 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자신도 맏아들처럼 매우 충실하게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정상적인 신앙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저 작은 아들같이 가출을 하거나 방탕함과 술 취함에 빠진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매우 책임감이 강하였고 가정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없다고 말한 맏아들처럼 매우 모범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 앞에서 자신의 전혀 다른 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질투심, 분노의 감정, 성급함, 완고함, 무뚝뚝함, 그리고 자기만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평이 많은 사람인지, 얼마나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는 존재인지를 보았습니다. 저 작은 아들이 아니라 사실은 맏아들이 바로 탕자였습니다.

    헨리 나우웬 자신도 비록 작은 아들처럼 집을 뛰쳐나간 일은 없었지만 맏아들처럼 작은 아들에 못지않는 탕자라고 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 맏아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준 당시 유대인들이었고,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세 번째로 헨리 나우웬이 체험하게 된 것은 작은 아들과 맏아들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쩌면 작은 아들의 만신창이의 모습을 볼 수도 없는 눈먼 사람인지도 모습니다. 사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버지 모습을 장님으로 그려놓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마디의 책임추궁도 없습니다. 무조건 맞아들이고 그 등에 두 손을 얹고 부드럽게 포옹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런 부자 상봉의 극적인 현실에 전혀 무감각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돌아온 동생에게나, 그 아들을 맞고 있는 아버지를 향하여 불평을 털어놓는 맏아들을 향해서도 그것을 그대로 들어주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한없이 넓은 그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자신도 이런 아버지의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헨리 나우웬이 성경의 탕자 비유말씀과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받은 영감을 가지고 슨 책이 “탕자의 귀환”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2.  우리는 지금 사순절에 접어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 시작이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극한 아픔과 회개를 나타낼 때  머리에 재를 뒤집어썼습니다. 오늘까지 교회에 내려오는 전통은 “재의 수요일”이 되면 성도들은 손가락에 재를 묻혀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회개와 함께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겠다는 결단을 말합니다.

    그러면 탕자의 잘못은 그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잘못된 인생과과 가치관 때문입니다.

    먼저 탕자는 아버지에게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함으로 물질만 소유하면 행복할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윤락주들은 돈만 있으면 행복하게 된다는 생각 때문에 불법 영업을 하다가 구속되어 먼 나라인 교도소에 가서 돼지 치듯 고생을 하게 됩니다. 서울 강남이라는 특수사회에 가면 한 병에 5백 만 원 이상 하는 양주, 한 벌에 수 백 만원 하는 속옷, 천만 원을 훨씬 넘는 골프채 등이 불티가 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나라가 이런 잘못된 인생관 가치관에 사로잡히다 보니까 한때 먼 나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IMF에 붙여져 산 일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하여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리히는 우리의 하나님 또는 신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나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곧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나의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나의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모나 처자나 형제나 아무것이라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우선순위 첫 번 째 입니까? 여러분은 정말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고 찬양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여 이전에 귀하다고 하는 것들을 분토같이 여겨서 버렸노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탕자의 회개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순절 첫날 새벽 우리가 살핀 성경일과에서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참된 회개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하나님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의 주인도 역시 하나님이 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교회 주인이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의 기본적인 회개는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나는 지난번 경안노회 영남신학동문회에서 “예수님은 어디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도대체 교역자들이 무엇에 정신 팔려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도 모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찾아 모시고, 섬기고, 배우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이 사순절에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아 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자유롭게 살면 행복할 줄로 착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잘못된 인식입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에서 오늘 우리 사회에 청소년 가출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적어도 일년에 2만 명 이상의 청소년이 가출을 하는데 그들이 가는 곳이 어딥니까? 퇴폐업소 아니면 폭력단체입니다. 그들이 가정이나 사회의 간섭을 떠나면 자유와 행복을 만끽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고나서 그들이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라 죄악과 고통의 노예로 전락한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행복한 돼지가 되기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를 원한다”고 할 정도로 순수했으나 오늘 우리들 사회는 오직 쾌락의 최고의 가치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돼지우리와 같이 살게 된 탕자처럼 돼지 신세로 전락해 가고 있습니다. 대 로마제국이 왜 멸망했습니까? 온 국민이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거기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자살, 범죄, 이혼 등이 성문란에서 초래되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해체를 재촉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3.  그러면 오늘 우리 사회는 정말 구제불능입니까? 구언의 길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탕자비유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전해주는 복음입니다.

    먼저,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떠나는 그날부터 아들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까 헨리 나우웬의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입니다. 거기 구원이 있고, 평화가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에 한국 교회가 1907년 백주년을 맞이하여 거 교회적으로 기념행사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행사가 목적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촉구입니다. 그리고 우리만이 아니라 이 나라와 이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 한 소망이 없다는 것,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물질도 아니고 쾌락도 아니고 무슨 이념도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다음으로 탕자 비유에서는 다행하게도 작은 아들이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 품만 벗어나면 거기 엄청난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탕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주와 멸망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난 탕자는 거기서 비로소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떠나온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집을 떠날 때 이미 아버지와 부자인연을 끊은 것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객지에서 주려죽는 것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쉽게 택할 수 있는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노숙하는 많은 사람들이 얻어먹으면서도 차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귀향의 용기를 내지 못해서 자살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끝까지 소망을 잃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합니다. 언제든지 절대로 늦지 않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돌아가기만 하면 옷을 갈아 입혀 주십니다. 가락지를 끼워주십니다.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설하고 풍악을 울리며 온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즐깁니다. 아들은 다시 모든 것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순절에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주님께로 돌아가십시다. 그의 품에 안깁시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합시다. 그리하여 내가 한 사람에게 전하는 이 복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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