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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영생을 위한 예수님의 포기 (사 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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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시인이 인생을 뒤집어 털어 보면 눈물 편지 한 통밖에 남지 않는다고 적은 것처럼 인생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습니다. 누군가 인생의 눈물을 이야기하면서 10대는 사랑을 찾는 눈물, 20대는 님을 찾는 눈물, 30대는 직장을 찾는 눈물, 40대는 뜻대로 되지 않아서 흘리는 눈물, 50대는 불효한 것이 생각나서 흘리는 눈물, 60대는 늙는 게 서러워서 흘리는 눈물, 그리고 70대는 죽음을 생각하고 흘리는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물 편지 한 통 밖에 남지 않는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위해 흘리는 눈물에는 역사의 진로를 끌어가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무거운 것도 회개의 눈물, 희생의 눈물, 헌신의 눈물 위에서는 떠서 그 눈물이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순수추주(順水推舟)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병법의 용어로서 본래의 뜻은 물 흐르는 방향으로 배를 민다는 뜻이지만, 쓰임새는 상대의 힘을 빌려 역으로 상대의 공격을 해체하고 반격을 가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바다에 떠 있는 배는 물결의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떠다닌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를 빗대어 생각하면 세상사는 권세나 돈의 흘러가는 방향대로 그 위에 떠 있는 모든 것이 흘러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권력을 얻고 돈을 버는 일에 몸을 던집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사 법칙이요 흐름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님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녀의 행복을 위하여 많은 것을 포기하며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죽어 가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행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수없이 많은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구원의 눈물이며 값있는 눈물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600~700년 전에 예언을 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언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비천한 출신으로 탄생하여 온갖 멸시와 천대를 자발적으로 감수하시고 급기야 형벌을 받아 돌아가심으로써 백성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포기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은혜가 감사하여 오늘도 예배하며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성숙한 은혜와 사랑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불신을 당하셨습니다
  본문 1절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누구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나름대로 경건하게 산다고 하였던 제세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더욱 불신하였던 것입니다. 악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야의 모습이 고난의 종으로 오지 않고 백마를 타고 호령하는 모습으로 온다는 생각입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으로 인하여 메시야를 불신하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불신하면 거역하고 살인을 하게 됩니다. 모든 싸움과 불행의 씨앗은 불신입니다. 모두를 죽음과 지옥으로 집어넣습니다. 사람이나 세상에 대하여 불신할 수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것은 죄악이며 저주이며 지옥인 것입니다. 영원한 불행입니다. 불신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탄이 역사합니다. 사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아니하며 믿지 못하게 합니다. 사탄을 추방할 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923년 영국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있었습니다.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들이받아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불과 50km 떨어진 곳에서 캘리포니아호가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사고현장으로부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자 타이타닉호 무선사들은 필사적으로 구조요청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호에도 무선사 한 사람이 타고 있었으나 그는 무전기를 꺼놓은 채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호는 대형참사를 까맣게 모른 채 정해진 항로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만약 무선사가 무전기를 켜놓았더라면 '타이타닉 참사'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선사 한 사람의 무책임이 엄청난 희생을 낳은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대형사고는 보통 작은 부주의 하나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간의 갈등과 싸움도 무관심과 부주의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책임감'은 공동체와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무책임과 불신의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불행하게 합니다. 그러나 성실과 믿음의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살리고 행복하게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불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도무지 무엇도,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재판의 결과를 85%가 불신하고 있습니다. 판사를 석궁으로 쏘는 시대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이 길가나 돌짝 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불신의 마음이 아닌 옥토와 같은 부드럽고 겸손한 신뢰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합니다. 2000년 전에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사람들로부터 불신을 당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자신의 유익이나 명예가 아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구원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2절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메시야의 모습이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만큼 특별하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종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인기나 갈채를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 고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너무 당당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모습으로 오셨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누가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존재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우리 사회의 중년 남성들이 겪는 상실감과 허무감에 관한 내용이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일례로 한 주요 일간지에서 '울고 싶은 남자들'이란 제목으로 한국의 중년에 대한 특집 기사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기자는 한국의 가장들을 가정의 '외딴섬'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중년 가장 남성들의 위신이 부모 세대의 Something(대단한 무엇)에서 Nothing(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실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를 따라가지 못한 채 문화적 충격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평생 애프터서비스'를 하면서도 자녀들로부터, 심지어 아내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가장의 말은 이미 권위를 잃은 지 오래입니다. 딸의 못마땅한 행동을 거들려다가 아내로부터 "그렇게 말해 봤자 당신 말 안 먹혀요"라는 핀잔을 듣고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서,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에 참담한 심정을 씻을 수 없었다는 한 가장의 고백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쓸쓸한 자화상입니다.
  오늘의 이 안쓰러운 세태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골에 살던 한 할아버지가 한 달 동안 도시에 사는 아들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며느리가 "1번 학원 갔어?", "2번 시장 갔다 왔어?", "3번 외출이다"하는 식의 뜻 모를 대화를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표현이라며 허허 웃었는데, 한 달 뒤에야 그 암호의 비밀을 눈치채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번호들은 중요도에 따라 식구들에게 매겨진 순서였습니다. 1번은 손자, 2번은 며느리, 3번은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몇 번이었을까요? 4번? 아닙니다. 강아지가 4번이었고, 5번은 가정부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놀랍게도 6번이었습니다. 이 내막을 알고 충격 받은 할아버지는 다음날 냉장고에 쪽지 한 장 남기고 아들집을 떠났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언젠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6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때에야, '내가 뭘 위해 살아왔나', '내 인생에서 뭐가 제일 중요한가' 하는 생각에 통탄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삶의 우선순위 1위는 무엇입니까? 가정? 건강? 아니면 적금 통장에 들어 있는 돈? 무엇이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합니까? 부모는 자녀의 행복과 부유함을 위하여 스스로 초라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초라한 모습으로 오셔서 초라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이유 있는 초라함입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감격하고 자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본문 3절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메시야에 대한 거절과 배척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고난의 '종'에 대한 태도 문제에 있어서 중립은 없습니다. 인간은 그의 구원을 즐거워하고 높이거나 아니면 배척하고 멸시하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에 대한 무관심 역시 그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질고를 아는 분이십니다. '병을 잘 아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그가 육체적으로 허약하여 이런 저런 질병에 계속 걸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나약하고 병든 사람들을 아시고 아픔을 같이 하시고 병을 고쳐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땅에, 인간 사이로 오셨는데 인간들은 그를 영접하지도 않았고 귀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존귀한 분을 가장 천하게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무지이며 큰 죄악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섭섭해하시거나 분노하시지 않았습니다. 다 참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참으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과 사랑입니다.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베풀고 나누는 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습니다. 여기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무재칠시(無財七施)'입니다.
  첫째, 화안시(和顔施)입니다. 부드러운 얼굴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습니다. 밝게 웃는데 대적할 장사 없습니다. 얼굴빛이 좋으면 만사가 좋은 법입니다.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배우자에게나 상사에게나 웃는 낯빛과 부드러운 얼굴은 최상의 존중이요, 대화법입니다. 아침을 부드러운 얼굴로 시작하는 사람은 하루가 좋고, 하루를 좋은 얼굴로 사는 사람은 인생이 피기 마련입니다. 얼굴 성형을 하는 것은 돈과 위험부담이 수반되지만 자기 얼굴에 미소를 머금는 것은 내 마음의 선택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니 스스로 부드러운 얼굴을 선택합시다. 그리고 부드러운 얼굴로 베풉시다. 그러면 만사가 풀립니다.
  둘째, 언사시(言辭施)입니다. 좋은 말씨로 베풀라는 말입니다. 좋은 말씨란 상대를 배려하는 말 씀씀이입니다. 말을 잘못하면 칼이 되고, 말을 잘 쓰면 천 냥 빚도 갚습니다. 아울러 말 씀씀이가 사람의 품격을 가늠케 합니다. 품(品)자는 입 구(口)자가 세 개 모인 것입니다. 결국 입에서 품격도 나옵니다.
  셋째, 심시(心施)입니다. 마음가짐을 좋게 해 베풀라는 말입니다. 마음가짐을 좋게 한다는 것은 마음의 생태계를 늘 안정시켜 불안하지 않고 평전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마음의 온도계대로 상대를 대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둘러싼 바깥 기온이 덥다고 짜증내고 춥다고 호들갑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도조절계처럼 추웠다 더웠다 하는 외부 기온을 적절하게 컨트롤해 안정되고 일관되며 평정된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거기서 신뢰가 꽃핍니다.
  넷째, 안시(眼施)입니다. 좋은 눈빛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눈빛을 바로 하는 것이 수양의 첫걸음이자 사람을 대하는 기본이었습니다. 어른을 대할 때, 자녀를 대할 때, 아내와 남편을 대할 때, 그리고 상사와 동료를 대할 때, 또 아랫사람을 대할 때 좋은 눈빛이면 만사가 평화롭습니다. '좋은 눈빛'은 곧 좋은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시(指施)입니다. 지시하거나 부리더라도 좋게 하라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 지시하고 부릴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을 시켜도 정작 일하는 이가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잔심부름을 시켜도 일하는 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인정(認定)'에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진정으로 부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의 존재감을 인정해 줍시다. 사람을 인정한 후 부리면 뒤탈이 없습니다. 아니 사람이란 인정받고 있다고 믿으면 목숨을 걸만큼 충성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존재감을 인정하지 않고 부리면 반드시 화가 미칩니다.
  여섯째, 상좌시(狀座施)입니다. 앉을 자리를 배려해 주라는 것입니다. 설사 앙숙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앉을 자리를 도려내지 맙시다. 오히려 앉을 자리를 마련해 줍시다. 그 경쟁자가 나를 밟고 가는 것이 아니라 되레 나를 더 키웁니다. 라이벌 없이 크는 영웅은 없는 법입니다.
  일곱째,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쉴 만한 방을 내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내 방마저 내주면 나는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지 맙시다. 사람들에게 쉴 만한 공간을 내주는 이상으로 나의 존재영역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무재칠시, 즉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는 우리 삶의 윤활유입니다. 겨우내 마음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무재칠시를 골고루 뿌려봅시다. 녹슬고 삐걱거리던 마음의 근육들이 다시 활기를 띠면서 진짜 마음의 봄이 올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남을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구원이며 소망이며 행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결코 우리를 포기하거나 버리지 않으십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다 포기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순절 기간입니다. 우리는 예배와 기도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불신과 초라함과 멸시를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고 고난에 동참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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