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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3계명 (출 20:7) : 예배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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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계명과 제2계명이 예배의 대상과 방법에 관한 것이라면, 제3계명은 예배자의 태도에 관한 계명입니다. 예배라고 하면 예배 시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 삶에서 경배의 대상과 방법과 자세를 바르게 알고  행하는 삶이 하나님 백성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제3계명은 하나의 금지 사항과 함께 이를 위반할 경우에 대비한 경고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하셨습니다(7a). 망령되다는 말은 ‘늙거나 정신이 흐려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나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단어 자체는 경솔함, 가벼움, 거짓됨, 욕됨 등 좀 더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의미가 되었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게 된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게 합니다. 이름이란 그 존재를 대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던 실례들 몇 가지를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3-16절을 보면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악귀를 쫓아내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악귀 들린 자는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하며 달려들어서 그들에게 상처를 입혔고, 마술사들은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이 경우는 우리 주님의 이름 자체를 마치 마술 주문처럼 경솔하게 사용한 실례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 없이 단지 그 능력만 빌리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기 능력처럼 마음껏 사용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그분의 능력만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입니다.

역대하 18장 5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 사백 명이 이스라엘 왕 시드기야에게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람왕과 전투를 벌인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니 믿고 도전하라고 했습니다. 전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지만 왕께 아부하기 위해서 듣기 좋은 긍정적인 말로 꾸몄습니다. 이 사건은 거짓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던 실례입니다. 자기 생각이면서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하나님의 권위를 도용하여 말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행동입니다.

마태복음 5장 33-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헛맹세뿐만 아니라 모든 맹세를 금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맹세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성도들은 아무런 맹세 없이 ‘예’와 ‘아니오’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성경이 모든 맹세를 금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라고 강조하여 말씀하실 때, 헬라어로는 ‘아멘, 아멘’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을 때도 역시 맹세행위였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 드러내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맹세가 완전히 금지된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이름이 가볍고 경솔하게 또는 거짓을 감추는 방편으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차라리 아무 맹세도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가볍고 경솔한 맹세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참 이상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조차 두려워했다고 들어왔습니다. 실제로 성경을 필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적는 것조차 망극해서 점만 네 개 찍거나 다른 기호로 표시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는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발설하기를 심히 두려워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 맹세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유대인들을 평가하신 말씀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모습으로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는 문제는 단지 입술을 잘 관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입에서 나오기 이전에 이미 마음에서 자라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쌓은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눅 6:45). 따라서 마음 가운데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정이 있어야만 입술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게 됩니다. 반대로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면, 부지중에 입으로 여러 가지 망령된 말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간혹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난스런 노래를 부를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은 철이 없는 문제로 가볍게 지나치기보다 엄히 꾸짖고 훈계해야 될 일입니다. 자녀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형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 또한 뜻 없는 감탄사로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맙소사’나 ‘아이고 주여’ 같은 말들, 그리고 아무 때나 ‘아멘’을 연발하는 것 등입니다. 영어권에서는 ‘God damn’(젠장)이나 ‘Jesus Christ’(제기랄) 등 하나님의 이름을 욕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컬어지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시고 벌하십니다.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아니하리라”(7b).

공산권에서나 회교권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나 찬양을 마음껏 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 마디의 기도와 한 소절의 찬양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진지한 경외심으로 그리할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마음껏 찬양하고 기도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습니다. 이것은 큰 축복이지만 축복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큰 해가 됩니다.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은 먼 상태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많은 찬양과 기도가 과연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가운데서 나오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가사는 음미하지 않고 그저 곡조에 흥겨워합니다. 예배 시간에도 얼굴은 딱딱하게 한 채로 ‘기쁘고 기쁘도다’라고 찬송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의 중심은 전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으면서 습관적입니다. 그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가끔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며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하는 분을 봅니다. 마음에 분명한 감사제목도 없고 깊은 감사의 마음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입술로만 그렇게 합니다. 그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찬양과 감사를 빙자하여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는 모습입니다. 찬양이나 기도는 단지 예배 순서의 일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따라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의식하면서 그분을 향해 찬양하고 그분께 기도드려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부지중에 그렇게 하는 일들은 우리의 일상에 허다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이름으로 장난스러운 노래를 부르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너무 가볍고 경솔하게 사용한다면 그것은 그 부모에게 욕이 됩니다. 예를 갖추어서 임해야 할 예식에서 장난스럽게 사회를 보거나 진지함과 정성이 빠진 채 형식적으로 대충대충 한다면 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리고 우리의 예배하는 삶이 이처럼 마음의 경외심이 상실된 상태라면 하나님께는 욕이 돌아갈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변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동네 어르신들은 아이가 몹쓸 행동을 하면 ‘뉘 집 자손인데 저 모양인가?’라고 꾸짖었습니다. 아이의 행동 때문에 부모와 조상에게 욕이 돌아갑니다. 이처럼 성도의 바르지 못한 행동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목사, 저 집사, 저 성도 보니까 교회 다니고 싶은 마음 싹 사라진다’는 평을 듣는 삶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은 것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는 부지중에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생각과 말과 행동에 유의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서 어떤 낯선 사람이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 이처럼 모욕적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먼저 마음에 분노를 느낄 것이고 당장 못하도록 중지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불신자들에게 그렇게 취급당하고 있을 때, 우리가 마음에 분노를 느끼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방지하는 것 역시 그분의 자녀 된 도리일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에게 거짓 예언을 했던 거짓 선지자들만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거짓 예언에 동조했던 시드기야도 그 전쟁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사무엘서의 한 주제이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망령되게 행하는 것을 보고도 금지하지 않았던 엘리 제사장 가문은 망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 받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골리앗에게 도전했던 다윗은 두고두고 존중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하는 풍조에 도전해야 합니다. 무력으로써가 아니라 삶과 연격으로 싸워야 합니다.

많은 기도와 많은 찬양과 많은 신앙적인 활동들로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과 설교의 홍수 속에서 오히려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염두에 두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하게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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