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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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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달여만에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지난 2달동안 미국의 뉴욕과 애틀란타와 잭슨 도시를 중심으로 생활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도움 속에 잘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살때에는 전혀 남의 도움이 필요없는 일들도 거기서는 다른 분들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낯선 나라에 가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꼭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더 많이 경험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고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모든 것이 원만하게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번에 미국에 가면서 저의 경우 가장 많은 도움을 얻은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은 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낯선 나라의 이민 생활을 하기 위해서 교회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울 정도입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통한 도움이 삶에 큰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한번 이번에 느낀 것은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나면서부터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도움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간들의 도움 배후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도우시고 만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이미 받았고, 현재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당시의 부정·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상황에 서 소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운동의 발단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 딪쳐서 낙심하고 절망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하늘을 쳐다보면 무수히 많은 별들이 금방 쏟아질 것처럼 반짝입니다. 그 별들을 받치는 기 둥은 보이지 않지만, 별들이 떨어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운행하시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이 자기도 도와주신다는 것을 믿고 마음에 평안함과 위로 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 않지만, 하나님 은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삶을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로서 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중에 우리의 모든 사업에 참여하시는 '조용한 동업자'이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움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을 마치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한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쓴 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하며 찬송한 시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세워진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갈 때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A Song of Degrees)'로 이 시가 불려졌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짐승의 공격이나, 강도의 습격이 나, 질병이나,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바라며 이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며, 현재 가고 있는 목적지까지 무사히 함께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나그네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 살렘 성전을 향하여 가는 것처럼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 길이 험 하고, 짐승이나 강도의 공격이 있고, 온갖 어려움과 위험이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되어 주십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실까요?

1. 내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 와에게서로다"(시 121 : 1∼2)
요즘 어려운 처지에 놓이고, 피곤하고 지쳐 있으며, 절망과 근심에 쌓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도움을 요구하는 이런 사람들에게 누가 진정한 도움이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도움'이라는 말은 어려움이나 위험한 순간에서 구해주거나, 일을 해결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시인은 어떻게 합니까?
1절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고 하면서 2절에서는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답을 합니다.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께 눈을 들어 도움을 구했습니다.

시인은 창조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위해 먼저 눈을 들리라 고백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바로 기도의 결단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란 무엇입니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더 고상한 차원의 기도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그분을 더 알아가는 차원의 기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기도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7장 7절에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필요와 부족함을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즉 기도란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아뢰는 것입니다. 도와주세라고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입니다. 찾는 자에게 찾아내게 하실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라 도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범사가 다 해당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주기도문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의 일상적인 생존의 도움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용할 양식에는 단지 육체를 위한 밥뿐만이 아닙니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필요가 일용할 양식에 해당이 됩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지만 기도에 대해 냉소적인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나?”라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한다고 하늘에서 당장 양식이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한다고 그것이 당장 완제품으로 우리 앞에 놓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이라면 약속하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양식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을 주실 것입니다.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이번에 잭슨 RTS에 있을때 부산 수영론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신 정필도 목사님이 쓴 책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부흥회를 참석하여 큰 감동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개척하여 세운 그 교회는 이미 부산에서 가장 큰 교회로 부흥하였고 한국에서도 주목받는 큰 교회로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경험과 고백은 엎드리면 길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5천평의 큰 교회를 세우면서 교회가 안정되고 부흥된 이유가 바로 기도에 있엇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하나님께만 답이있다고 강도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의 사인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은퇴를 앞둔 목회의 현장에서 매일 쉬지 않고 반복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마다 쉬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의 도움을 바라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 집중할 수 있습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고 부르는 자는 인생의 부족과 한계를 철저하게 깨닫고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나의 지식 나의 능력 나의 힘 나의 모든 지혜를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주관자되심과 왕되심을 먼저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면 ‘너 혼자 해보라’ 내버려두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언16장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고 합니다. 잠언 16장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요즘 모두가 힘들다 어렵다 합니다. 때로 힘든 그 삶을 사람에게 하소연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도움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먼저 눈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바라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이 발걸음을 지켜주십니다.

3절/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믿음, 의의 길에서 넘어지지 않게 항상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시121:3∼4) '실족'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모트( , mot)'로 '비틀거리다, 흔들거리다, 미끄러지다'는 뜻인 데, 매우 불안정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발을 잘못 디디거나 행동을 잘못하여 재앙이나 혼란에 빠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야 길을 가다보면 구덩이가 있기도 하고, 낭떠러지가 있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는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자는, 구덩이나 위험한 곳에 미끄러져서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족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실족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또한 시험과 유혹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과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니다.

신명기 32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 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라고 했습니다. 아주 미세하고 예민한 신경구조로 되어 있는 눈동자는 신체 중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입니다. 이물질이 들어가면 금방 반응을 하기 때문에 눈동자에 위험한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썹과 눈꺼풀과 눈물 샘이 주위에서 보호해 줍니다. 눈썹과 눈꺼풀과 눈물샘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눈동자를 보 호하듯이, 하나님은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순종하며, 진리 가운데 살아야 하겠습니다.

전쟁터에서 한참 교전 중일 때, 앞장섰던 한 병사가 적의 총탄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총알이 비 오듯 쏟아지는 가운데서 부상당한 병사는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누구든지 뛰어가서 저 병사를 구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포에 질려서 아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병사가 시계를 보더니 "소대장님 제가 가겠습니다." 하고, 참호에서 뛰쳐나가 부상당한 병사를 업고 달려왔습니다. 교전이 끝나고 소대장은  "자네는 어떻게 담대하게 뛰어나갔는가?" 하고 묻자, 이 병사는 "제가 뛰어나간 그 시간은 바로 제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호해 주시는데 무엇을 무서워하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기도가 자녀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고, 백성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되 가족이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나라가 민족이 실족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종종 우리의 삶이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가 실족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를 맺다가 실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생활도 실족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삶에 “실족”의 경험들이 나타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잘못입니까? 우리들의 잘못때문입니다. 그 가장 큰 잘못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도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할때 육신의 위로 어떤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마음 속에 깨달음을 주시는 성령님의 마음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구원받은 신자 누구에게나 그 속에서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그 성령님께서 가만히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특별히 그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깨달음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생각과 판단을 주시어서 우리가 주님 뜻대로 길을 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성령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시는지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장7절이하를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오셔서 어떤 유익을 줄 것인가? 결론적으로 요한복음 16장 13절이하에 보십시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합니다. 여기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알리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면 실족하지 않는 길을 진리의 길을 주님의 길을 영광돌리는 길을 걸어가면서 주님의 도움을 경험하게 될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 인도하시는 도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1년전에 제가 차를 구입할 때 네비게이션을 구입하여 차에 장착하였습니다. 2가지 이유때문이었습니다. 모르는 길을 갈때에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도로위에 카메라의 감시를 피하는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시내주행할때에는 그냥 다니지만 먼길을 갈때에는 반드시 네비게이션을 작동하고 길을 찾아갑니다. 서울같은 큰 도시에 갈때에는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지정하여 놓으면 알아서 지도가 그 길을 인도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지도를 보고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가야 하는데 종종 내가 그 지역을 지리를 좀 알고 있으면 지도를 켜놓은채 내 경험을 의존하여 네비게이션을 무시하고 길을 찾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길도 찾지 못하고 더 시간만 낭비하는 결국을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인생의 네비게이션이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실족하지 않 인도하시는 주인이 되십니다. 그 주님의 음성을 순종하면서 그분의 인도를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좀 늦은 것같고 비현실적인 것같지만 우리는 성령님의 음성을 따라 말씀의 길대로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3.하나님께서 환난 중에서 지켜주십니다.

7절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 환난에서 이기게 하시고, 영혼을 지켜주신다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라고 하였 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재앙, 기근, 질병, 슬픔, 악한 일' 등 인간이 당하는 여러 종류의 고통을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을 살 동안에 우리는 재앙이나, 기근이나, 질 병과 가난, 슬픔, 불행한 일들을 당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환난을 면케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해악과 고통들로부터 보존해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간 포로되는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70년동안이나 포로되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이땅에서 이모양 저모양 환난과 시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본다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환난을 면케하신다“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전혀 환난을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도들도 환난을 당하기도합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는가? 가장 목적은 환난은 성도들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다윗도 신약의 바울도 많은 주의 백성들이 환난을 당할때에 그들은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게는 하지만 그 환난으로 인해서 멸망에 빠지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냥 방치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생활입니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환난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하게 멸망당하도록 내버러두시지 않았습니다. 정한 기간인 70년동안 환난을 허용하시다가 결국은 그 환난을 면하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배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에 반드시 갖아야 할 내적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나를 도와주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23편 4절처럼 고백한 것같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도우심을 믿을때 우리에게서 먼저 사라지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환난을 만나거나 문제를 만날 때 두려워하게 되면 모든 것이 마비가 됩니다. 생각이 마비가 됩니다. 생각이 마비되면 판단이 흐리게 됩니다. 또 감정도 마비가 됩니다. 감정이 마비가 되면 마음이 공허하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두려움에 전염이 되면 마귀의 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자같은 동물이 산양같은 동물을 잡아먹는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습니다. 사자가 동물을 사냥할때에 산양감이 많이 있을지라도 꼭 한 마리를 표적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그 표적이 되는 산양은 이미 사자 앞에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먹이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도 환난 앞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작은 환난이 찾아오기도 하고 큰 환난아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이 크고 담대함이 있으면 어떤 환난도 두려워하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하는 것은 어떤 환난도 우리의 육체는 괴롭게하고 우리의 현실은 괴로움이 찾아오겠지만 우리의 영혼을 빼앗아 영혼을 멸망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환난이 무엇입니까?
이미 그 환난조차도 하나님의 허용 아래 있음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은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 출입'은 밖으로 나가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말하는데, 한 사람의 전 생활 영역에서의 모 든 삶과 일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출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을 영원히 지키고 보호하시며 복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결 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한시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 다. 우리가 그를 믿고 의지하는 한 그리고 부르짖는 한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속대로 환난을 면케 해 주실 것입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의미 없는 고난이나 이유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모든 고난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십니다. 죽고 망하라고 주시는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은 힘들지만 죽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잘 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부러 고난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만 원치 않게라도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면 회피하 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고난과 싸우실 수 있기를 바 랍니다. 그리고 승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승리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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